●“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4절)
하나님께서 경고의 말씀을 주십니다.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은 1절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입니다.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 특히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분이라고 하십니다. 심령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10절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셔서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 참 어렵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의 심령을 지으신 분이시며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새 마음을 주십니다. 진정한 변화는 심령의 변화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에 필요한 것이 근본적인 변화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의 현실은 미약합니다. 주변 이방 나라들의 거침없이 공격 대상입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세 가지의 그림 언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호해 주실 것을 알게 하십니다. 첫째는 2절 “예루살렘으로 그 사면 모든 민족에게 취하게 하는 잔”이 되게 하십니다. 예루살렘이 한 잔의 술처럼 꿀꺽 삼켜버릴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공격하면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고 넘어질 것입니다. 두 번째는 3절 “예루살렘을 모든 민족에게 무거운 돌”이 되게 하십니다. 이 무거운 돌을 함부로 건드는 모든 자가 크게 상처를 입게 됩니다. 세 번째는 6절 “유다 지도자들을 나무 가운데에 화로 같게 하며 곡식단 사이에 횃불”같게 하십니다. 이방 나라들이 공격하기 위해 가까이하면 오히려 이 불에 타버리고 맙니다.
이 모든 일들이 연약한 예루살렘과 유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4절 “유다 족속은 내가 돌보고”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5절 “유다의 우두머리들이 마음속에 이르기를 예루살렘 주민이 그들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로 말미암아 힘을 얻었다 할지라”고 고백합니다.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지만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았습니다. 세상 나라들을 열심히 따라가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모든 것 무너진 초라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회복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까지 회복하신다고 말씀하시냐면 7절 “다윗의 집의 영광”보다 더 영광스럽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또한 8절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백성 중 약한 자가 다윗과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동경하며 기대하는 왕이 다윗입니다. 이때도 메시아가 오시면 다윗 왕국과 같은 나라를 회복시켜 줄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약한 자도 다윗과 같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더 나가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하나님의 왕권을 대신 수행한 것처럼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보여주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이 놀랍습니다. 연약한 가운데 소망을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허황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하게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의 강하고 부요한 나라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세상 나라들을 통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이들을 역사의 주인공으로 세우시고 함께 하십니다. 이 시대 성도인 우리가 늘 기억하며 선포해야 할 내용이 이것입니다. 돌보시며 함께 하시는 하나님, 힘을 주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10절)
그런데 이런 회복을 위해 중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10절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하나님께서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주십니다. 한마디로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회개해야 할까요?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의미는 “그들이 찔렀던 자, 나를 바라보고 애통하기를”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기에 여기 “나”는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찌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들을 거부하고 공격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찔렀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대리자들이기에 이들에 대한 찌름은 곳 하나님에 대한 찌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도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찔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찌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찌름에 대한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하는 심령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애통해야 할까요?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부모의 심정으로 애통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시 한번 11절에서는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이라고 합니다. 므깃도는 유다 요시야왕이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 전사한 장소입니다. 요시야는 왕이 되어 쓰러져가는 나라를 세우기 위해 개혁을 단행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아깝게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죽음을 모든 백성들이 탄식했습니다. 그런 애통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12절 “온 땅 각 족속이 따라 애통하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따로”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는 누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하나님에서 홀로 서서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찌른 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시대를 회개가 사라진 시대라고 합니다.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 원하는 것만을 요구하는 시대입니다. 신앙은 혼란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애통함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찌른 자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므로, 여전히 세상 정신을 따라 살므로, 여전히 누군가를 찌름으로 하나님을 찌르고 있지 않는지 돌아보며 애통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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