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8.20 | 매일성경
●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1절)
이사야 28-33장은 여섯 번 반복되는 ‘화 있을진저’의 경고입니다. 오늘 30장은 네 번째로, 하나님이 남유다를 향해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부르시며 시작합니다.
이사야서는 처음 1장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고발하시는 장면으로 시작했습니다. 소도 나귀도 자기 주인을 아는데, 이 백성은 자기를 기르신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30장도 그렇습니다. 아버지와 자녀는 서로 신뢰하고 순종해야 하는데, 유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지 않고 거역하는 패역한 자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왜 패역한 자식입니까? 1절 “그들이 계획을 세우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여 죄에 죄를 더하도다” 계획을 세우되 하나님께 묻지 않고, 다른 나라와 언약을 맺되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합니다. 2절 끝도 그렇습니다.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이들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일을 결정하고 진행합니다.
그렇게 결정한 일은 2절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게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합니다. 당시 앗수르라는 강대국이 유다를 위협하자, 유다는 두려움에 떨며 남쪽의 애굽을 의지해 앗수르에 맞서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물으면 하나님이 분명히 허락하지 않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는 애굽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아예 묻지 않고 제 뜻대로 밀고 나간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이 곧 죄입니다. 어떤 일을 하며 하나님께 묻지 않고 내 생각과 욕심대로 결정하는 것, 그 자체가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강해지리라 여긴 그 애굽이 도리어 수치가 됩니다. 3-5절에 ‘수치’와 ‘수욕’이 반복됩니다. 바로의 세력이 수치가 되고, 애굽의 그늘이 수욕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5절보면 그 민족은 “자기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민족”,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게도 못하는”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눈에는 도와줄 것 같고 힘이 될 것 같지만, 그 강대국이 실은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6-7절에서 하나님은 애굽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을 한 편의 시로 설명하십니다. “네겝 짐승들에 관한 경고라” 네겝은 유다 남쪽의 사막 지역입니다. 그 광야를 배경으로, 애굽과 맹약을 맺으려는 사신단이 재물을 어린 나귀 등에, 보물을 낙타 안장에 싣고 애굽을 향해 내려가는 모습이 펼쳐집니다. 그 길은 암사자와 수사자, 독사와 날아다니는 불뱀이 도사린 위험한 사막 길입니다. 그 뙤약볕과 맹수의 길을 뚫고, 선물을 잔뜩 실은 채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여기에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이 길은 과거 이스라엘이 거꾸로 걸어온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열 가지 재앙의 능력으로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났고, 이 광야 길을 지나 약속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지금 유다는 자기들이 구원받고 자유를 얻었던 그 길을 반대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 다시 애굽을 의지하고 그 속박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나님이 자유를 주시고 지금까지 함께하셨는데, 그 하나님을 버리고 옛 종살이의 땅을 다시 붙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이 역출애굽의 그림이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7절은 “애굽의 도움이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라합은 신화 속 바다 괴물의 이름입니다. 괴물이니 겉으로는 무섭고 위력적일 것 같은데, 하나님은 그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 곧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아만 있는 괴물이라 부르십니다. 이름값은 사나운 괴물이나 실상은 무력한 존재라는 조롱입니다. 눈에 보이는 애굽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15절)
그러면 유다는 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애굽으로 달려갑니까. 28장부터 반복되는 남유다의 근본 죄가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지 않고, 들어도 그대로 살지 않습니다. 9절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하는 자식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이라”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싫어합니다. 뿐만 아니라 10-11절에는 이들이 선견자에게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에게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들으면 마음이 찔리고 거북하니, 회개하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 “부드러운 말을 하며 거짓된 것을 보이라”고 합니다. 여기 ‘부드러운 말’은 듣기 좋고 매끄러운 말, 마음을 찌르지 않는 말입니다. 그리고 11절,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들 앞에 계신 것 자체가 부담스러우니, 아예 하나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28-30장에 반복되는 유다의 핵심 문제입니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 “말씀 들어서 뭐 하나, 그대로 산다고 삶이 달라지겠나” 하는 태도가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가 이 백성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갈림길이 됩니다.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순종하느냐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말씀을 업신여긴 결과를 13-14절이 두 개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12절에서 백성이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의지했다고 하는데, 13절은 그 결과를 높은 담이 제 무게를 못 이겨 갑자기 불룩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것에 비유합니다. 스스로 견디지 못해 무너지는 것입니다. 14절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사정없이 깨뜨려 아궁이의 불을 옮길 조각 하나, 물을 뜰 조각 하나 남지 않는 것에 비유합니다. 무너짐과 깨어짐, 이것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자가 겪을 심판입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15절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말씀을 외면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진지하게 그들의 살 길을 일러 주십니다.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세상을 의지하고 애굽으로 달려가던 데서 ‘돌이키라’는 것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겉으로는 조용해도 마음이 조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조용히 있으려면,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앗수르가 쳐들어오는데 어떻게 조용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앗수르보다 훨씬 크고 강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도우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비로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겉보기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내 삶을 어떻게 책임지시는지를 신뢰할 때, 그 내면에서 힘이 솟아 요동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15절과 16절이 대조됩니다. 조용히 머물기를 거부한 유다가 택한 것은 16절, “우리가 말 타고 도망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잠잠히 하나님 앞에 머무는 대신 다른 것을 의지하니, 결국 도망 다니는 삶을 살게 됩니다. 16절에 ‘빠르다’는 말이 두 번 반복되는데, 빠른 말을 타고 분주히 내달리지만 그 분주함은 쫓기며 도망 다니는 것입니다. 돌이켜 조용히 머무는 자는 구원과 힘을 얻고, 돌이키지 않고 내달리는 자는 도망자의 삶을 산다는 대조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묻고 그 말씀을 듣는 자리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유다의 멸망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제 뜻대로 애굽을 의지한 데서, 그리고 말씀 듣기를 싫어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인생을 좌우합니다. 하나님께 묻고 그 말씀 앞에 나를 세우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돌이켜 조용히,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우리를 요동하게 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때 다른 것을 의지하려는 마음에서 돌이켜, 조용히 하나님 앞에 머물고 잠잠히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구원과 힘을 얻는 길입니다.
2026.08.14 | 매일성경
●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3절)
24장부터 이어지는 이사야 묵시록은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승리와 성도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어제 25장이 사망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오늘 26장은 그 구원을 경험한 백성이 유다 땅에서 부를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완성될 승리만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아직 고통이 남은 이 땅의 현실과, 그 너머의 부활 소망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1절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여기 ‘견고한 성읍’이 나옵니다. 어제 25:2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쌓은 견고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26:5절에서도 하나님은 “높은 데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신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쌓은 성은 아무리 높고 견고해도 다 무너지는데, 성도에게는 무너지지 않는 다른 성이 있습니다. 그 성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친히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신” 성입니다. 눈에 보이는 요새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그 자체가 성벽이 되니, 누구도 흔들거나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쌓은 성과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성이 대조됩니다.
이 견고한 성 안에서 누리는 것이 3-4절의 평강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여기 ‘심지가 견고한 자’는 원문으로 그 마음(생각)이 하나님께 굳게 붙들려 기대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다른 데로 흩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고정된 마음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평강, 평강’이라 거듭 이르시는 완전한 평강을 주십니다. 그 근거가 4절입니다.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여기 ‘영원한 반석’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평강의 유일한 기초가 이 변치 않는 반석입니다.
7절부터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의인의 길과, 은총을 받고도 돌이키지 않는 악인의 길이 대조됩니다. 7절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의인의 길은 정직이고, 그 길을 하나님이 평탄케 하십니다. 의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8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 영혼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가장 절박하고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그때,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반드시 역사하심을 신뢰하며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9절은 그 사모함이 밤에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고” 깊은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반면 악인은 10절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악인이 은총을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는데도 의를 배우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않고, 그 은혜를 기억하지 않으며, 도리어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합니다. 곧 악인의 멸망은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셔서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그 길을 택한 결과입니다. 10절 끝의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11절,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높이 들려도 그들은 보지 못한 채 멸망의 길을 갑니다.
반면 13절은 하나님 백성의 신실함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다른 나라가 다스린다는 것은 그 나라의 우상을 강요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백성은 그 이방의 신들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불렀다는 것입니다. 14절은 그 지배하던 자들, 곧 죽은 자들이 다시 살지 못하리라 하는데, 이는 뒤에 나올 하나님 백성의 부활과 정면으로 대조됩니다. 압제자들은 죽어 일어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
●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19절)
16절부터는 이 땅의 냉정한 현실이 펼쳐집니다. 묵시는 하늘의 승리와 땅의 현실을 번갈아 보여 주는데, 1-15절이 하나님이 주실 궁극의 승리라면, 16절부터는 아직 그 승리에 이르지 못한 성도의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16-17절, 환난 중에 백성이 하나님을 찾아, 마치 해산이 임박한 여인이 산고 중에 부르짖듯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부르짖으면 좋은 응답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18절이 뜻밖입니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그 극심한 산고 끝에 낳은 것이 아기가 아니라 바람이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부르짖고 애썼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헛된 수고로 끝난 것 같은 절망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겪는 현실이 종종 이렇습니다. 기도하고 몸부림쳐도 현실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 완전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바람만 낳은 것 같던 그 헛됨의 자리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선언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가장 분명한 부활의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통 속에 죽어 간 성도들을, 하나님이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라는 표현이 아름답습니다. 이슬이 마른 땅을 적셔 생명을 살리듯, 하나님의 생명의 이슬이 티끌에 누운 자들을 살려 낸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 선언은 어제 25장에서 이어집니다. 25:7-8절에서 하나님은 온 세상을 덮은 죽음의 수의를 벗기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26:19절에서는 그 사망을 멸하시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고 하십니다. 죽음을 없애실 뿐 아니라, 죽음에 삼켜진 자들을 도로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신약에서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사망은 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의 문제를 담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죄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곧 죽음이 해결되었습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첫 열매로 이루어진 확실한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27:1절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리워야단은 고대에 혼돈과 악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 곧 사탄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의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용이 이 이미지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 악의 세력을 견고한 칼로 완전히 죽이시고, 성도에게 최종 승리를 주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심지를 하나님께 고정하여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굳게 붙들린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십니다. 우리 삶에 평강이 없다면, 내 시선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흩어져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반석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마음을 고정하는 것이 평강의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의 수고가 바람을 낳은 것처럼 헛되어 보일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입니다. 사망을 멸하실 뿐 아니라 죽음에 삼켜진 자를 도로 일으키시며, 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확증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삶의 모습은 같아도, 성도는 죽음이 가둘 수 없는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걸읍시다.
2026.08.13 | 매일성경
●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1절)
어제 24장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해와 달이 부끄러워할 만큼 영광스러운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오늘 25장은 그 승리를 바라보며 부르는 기쁨의 찬양입니다.
찬양은 1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절망의 시간을 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보면, 그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1절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창세 전에 이미 정하신 뜻대로 이루십니다. 그것도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십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 같고 때로 실패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은 성실과 진실함으로 일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찬양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견고한 성읍을 허무는 것’입니다. 2절, 하나님이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고 견고한 성을 황폐하게 하십니다. 12절도 “네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리라”로 다시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왜 잘 지어진 성을 자꾸 무너뜨리실까요. 사람들은 견고한 성읍과 높은 요새를 지으며 “이것이 나의 안전을 지켜 주리라” 여깁니다. 교만하고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전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아무리 튼튼한 성이라도 하나님이 흔드시면 흔들릴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을 허무시는 것은, 안전을 엉뚱한 데 두는 그 착각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성읍이 무너지자 나타나는 반응이 있습니다. 3절에서 강한 민족과 포악한 나라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화롭게 합니다. 자기 성이 자기를 지켜 주리라 믿었던 자들이, 그 성보다 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리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았다면 은혜와 복을 받았을 텐데, 자기 힘으로 쌓은 것이 무너진 다음에야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구나”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4절입니다. 그렇게 견고한 성을 쌓고 약한 자를 학대하던 포학자들의 기세가 폭풍처럼 몰려올 때, 하나님이 누구의 편에 서시는가입니다. “주는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힘없이 당하던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이 친히 요새와 피난처와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사막의 뜨거운 폭양 같은 공격이 몰려와도, 하나님이 그늘이 되어 그 열기를 구름으로 가려 주십니다. 무너지는 것은 사람이 쌓은 견고한 성이고, 무너지지 않는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8절)
이 승리 위에서 하나님이 잔치를 베푸십니다. 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최고의 음식과 가장 잘 익은 포도주로 차린 풍성한 잔치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이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7절 보면 하나님이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십니다. 여기 ‘가리개’와 ‘덮개’는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표시였습니다. 곧 이 가리개는 온 세상을 뒤덮은 죽음의 ‘수의’입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고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죽음인데, 온 열방을 덮은 그 죽음의 천을 하나님이 벗겨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이 그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고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그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덮은 사망을, 하나님이 영원히 삼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 선언이 얼마나 놀라운지는 신약이 증언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말하며 이 구절을 그대로 가져와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전15:54절)고 외쳤고,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며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계21:4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8절의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사망이 삼켜지니 그 사망의 그림자 아래서 흘리던 눈물이 씻기고, 믿음을 지키다 수치와 고난을 당한 백성이 부활의 영광으로 들려 올려집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이 구원을 누리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9절에 두 번 반복되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기다리던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기다렸다’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은, 잠시 믿다가 어려움이 오면 돌아서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붙들며 인내한 사람들입니다. 일이 잘될 때 기다리기는 쉽지만, 힘들 때 기다리기는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기다림 끝에 하나님은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주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기쁨의 노래 끝에 한 가지 경고를 말합니다. 10-12절 모압의 심판입니다. 왜 하필 여기서 모압일까요. 11절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의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모압을 하나님이 누르십니다. 모압은 제 손으로 이루는 일에 능하고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 능함이 교만을 낳았습니다. 잘하는 것으로 도리어 남을 무시하고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교만을 헤엄치는 자를 물속에 누르듯 낮추십니다.
이 경고가 기쁨의 노래 끝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며 구원의 승리를 바라보는 성도가 마지막까지 조심해야 할 것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기다린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기쁨이라면, 교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낮아짐입니다. 교만을 내려놓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 그것이 기쁨의 잔치에 초대된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성실하게 이루어 가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정하신 뜻을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시는 분이고, 그 안에 우리 삶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 같고 실패 같아도, 그것은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다른 하나는 사망을 삼키시고 눈물을 씻으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을, 하나님이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이 시대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에게 예비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기대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8.12 | 매일성경
●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15절)
어제 본문은 슬프게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땅에서 기쁨이 그치고 탄식만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14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뒤바뀝니다. 심판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처럼 심판과 찬양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는지 묵상해 봅시다.
14절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어제까지 그쳤던 소리가 새로운 소리로 바뀝니다. 세상의 흥청거리던 즐거운 소리는 사라지고, 이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찬양의 소리가 들립니다. 그런데 이 찬양이 한곳에서만 울리지 않습니다. 15절은 동방에서, 바다 모든 섬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한다고 하고, 16절은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라고 합니다. 동쪽에서 서쪽 섬까지, 땅 끝에서까지, 사방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이렇게 찬양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이사야가 계속 말해 온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 자리에서도,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합니다. 여기에 심판의 이중성이 있습니다. 같은 심판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이지만, 하나님을 기다리던 자에게는 구원과 회복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찬양하는 내용이 14절 ‘여호와의 위엄’을 찬양합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강대국과 왕들이 다스리는 것 같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의지하거나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이 임하자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온 땅을 다스리시고 남은 자를 위해 일하고 계셨구나. 그 통치의 위엄을 깨닫고 찬양합니다. 또한 16절은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린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살고 말씀대로 살아도 왜 내 삶은 이토록 힘들고, 그렇게 살지 않는 이들은 왜 잘되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인가. 이런 오랜 질문을 품고 살아온 성도가, 이제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구나. 모르셨던 것이 아니라 다 아시고 그 때를 기다리고 계셨구나.
그런데 16절 중간에서 분위기가 또 한 번 바뀝니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찬양이 울리던 자리에서 갑자기 선지자의 탄식이 터집니다. 심판이 임하고 또 찬양이 울리다가 다시 심판으로 넘어가는 이 흐름이 혼란스러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묵시의 특징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떠올리면 이해가 됩니다. 위에서는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의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하십니다. 그런데 아래에서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면서도 여전히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지나며,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합니다.
선지자를 지치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16절 하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은 크게 배신하였도다” 여기서 ‘배신’이라는 말이 네 번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심판이 이렇게 임하면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돌아설 것 같은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그 상황에서도 끝까지 제 길을 갑니다. 배신하고 또 배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에게는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능력으로 보여 주시면 잘 믿겠다”고 말하는 이들을 만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눈앞에 보여도 배신하는 자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니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기적과 이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실제로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이 이 백성을 책망하신 것도 “기적을 못 보았다”가 아니라 “율법을 범하고 율례를 어기고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자기 백성과 관계 맺으시고 그들을 이끄십니다.
●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23절)
하나님은 끝까지 제 길을 가는 자들을 향해 “땅의 주민들아”라고 부르십니다. 24장에 ‘땅’이 거듭 나오는데, 이는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이 땅이 전부인 듯,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듯 살아가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17절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임하였나니.” 이 세 가지의 나열은 의미가 있습니다. 심판이 점점 좁혀 들어오는 형식입니다. 곧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심판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8절이 그렇죠. 두려운 소리에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립니다.
그리고 18절 뒤가 그 심판의 근원을 밝힙니다.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위의 문이 열린다’는 것은 창세기 7장 노아 홍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물이 쏟아질 때 하늘의 창이 열렸습니다. 곧 하늘의 심판의 문이 열려 온 땅이 진동한다는 것입니다.
19-20절은 그 진동을 반복되는 말로 설명합니다.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절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며 원두막같이 흔들린다.” 이 ‘원두막같이’라는 비유가 인상적입니다. 아무리 견고한 빌딩을 지어도,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면 그것이 원두막처럼 힘없이 흔들리고 주저앉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20절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 모든 무너짐의 원인이 죄악입니다. 그 죄악의 핵심은 어제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저버린 데 있습니다.
21절에서 심판의 시야가 한층 넓어집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하나님의 심판이 두 부분으로 임합니다. ‘높은 데의 높은 군대’는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도 나오는 공중 권세 잡은 악한 영적 세력을 가리킵니다. 세상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하나님께 도전하게 하는 사탄의 세력입니다. ‘땅의 왕들’은 그 세력의 도구가 되어 세상에서 전쟁과 혼란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영적 세력과 그 하수인인 왕들을 함께 심판하시고,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셨다가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 결과가 23절입니다. “그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고 그 장로들 앞에서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 해와 달과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의 하나님께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찬란한 영광 앞에서, 해와 달마저 빛을 잃고 부끄러워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두 세계가 공존하는 시대에 남은 자로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우리는 그 사이의 시대를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땅이 전부인 듯 배신하며 제 길을 가고, 그 가운데서 우리는 남은 자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남은 자는 소수이기에 때로 갈등하지만, 그럴수록 하나님이 반드시 승리하시고 영광 중에 통치하심을 기억하며, 의로우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견고히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으로 보고도 배신하는 자가 있듯, 기적은 우리를 견고하게 하지 못합니다. 깨지고 갈라지고 흔들리는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내 삶의 방향을 내려놓고 말씀을 묵상하며, 서로를 말씀으로 격려하고 세워 가는 성도가 됩시다.
2026.08.11 | 매일성경
●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1절)
오늘부터 이사야는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24-27장까지를 흔히 ‘이사야의 묵시록’이라 부릅니다.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다른 말로 묵시록이라 하는데, 감추어져 있던 것을 하나님이 드러내 보이신다는 뜻입니다. 요한계시록이 핍박 가운데 “이 고통이 언제 끝납니까”라고 부르짖던 성도에게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늘 보좌에서 다스리시며 반드시 승리를 주신다”고 보여 주었듯, 이사야 24-27장도 혼란한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회복하실지를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잠깐 정리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1-6장은 유다를 향한 서론적 예언이었습니다. 7-12장은 아하스 왕 시대를 배경으로 한 유다를 향한 구체적 말씀, 13-23장은 유다를 둘러싼 열방을 향한 심판(바벨론에서 두로까지)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24-27장은 특정 나라가 아니라 온 세상 전체를 향해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1절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이 ‘공허’와 ‘황폐’라는 말이 3절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시기 전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공허’입니다. 하나님이 그 공허와 혼돈과 어둠에 손을 대시자, 공허가 채워지고 혼돈에 질서가 생기고 어둠이 빛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지어진 세상 한가운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두셨습니다. 아름다운 하나님 나라를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세상이 다시 공허와 혼돈으로 돌아갑니다.
1절 중간 ‘지면을 뒤집어엎으신다’는 말이 그렇습니다. 질서 있게 세워졌던 세상이 다시 무질서로 뒤집히는 것, 곧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창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앞선 열방 심판이 개별 나라의 몰락이었다면, 여기서는 창조 질서 자체가 풀리는 우주적 심판이 일어납니다.
2절은 그 심판이 누구에게 임하는지 여섯 쌍의 대조로 보여 줍니다. 백성과 제사장, 종과 상전, 여종과 여주인, 사는 자와 파는 자, 빌려주는 자와 빌리는 자,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입니다. 종교적 지위든, 사회적 신분이든, 경제의 처지든, 어떤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가 같은 상태에 놓입니다. 심판 앞에서는 누구도 자기 자리로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으신 땅이 왜 이렇게 쇠하게 되었을까요? 4절에 ‘쇠잔’과 ‘쇠약’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생육하고 번성하라 축복받았던 땅과 사람이 도리어 시들어 갑니다. 5절에 이유가 나옵니다.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땅이 더럽혀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로 인해 영적·도덕적으로 오염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참으로 더럽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쓰레기가 아니라 사람 마음속의 죄악의 쓰레기입니다.
그 죄악의 뿌리를 5절 중간이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율법을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삶의 기준대로 살지 않았다는 겁니다, 율례를 어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워야 할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웠다는 것이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다는 것은 그 모든 불순종의 뿌리입니다. 세 표현이 결국 한 가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죄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흔히 사람 사이에 잘못한 것을 죄라 여기지만, 죄의 근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데 있습니다. 특히 ‘영원한 언약’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언약은 이스라엘이 요청해서 맺은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택하시어 먼저 맺어 주신 것입니다. “너는 내 백성이니 이 말씀대로 살라, 그러면 내가 너를 책임지고 열방 가운데 우뚝 세우겠다”는 은혜의 약속이었습니다. 그 감사한 언약을 백성이 스스로 깨뜨린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성도인 우리는 더 확실한 언약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한 언약입니다. 먼저 찾아와주시고 사랑해주셨습니다. 그러니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언약을 깨뜨린 결과가 6절입니다.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언약을 지키면 복인데, 깨뜨리니 저주가 임합니다. 다만 ‘남은 자가 적다’는 말에서, 하나님이 완전히 멸하지 않으시고 남은 자를 두신다는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11절)
7-13절까지는 그 심판의 구체적 모습인데, 반복되는 것이 ‘기쁨의 그침’입니다. 7절 마음이 즐겁던 자가 탄식하고, 8절 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끊어지며 수금 타는 기쁨이 그칩니다. 11절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기쁨과 탄식이 뚜렷이 대조됩니다. 이 대조에 담긴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언약 백성으로 살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바로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언약을 깨뜨리니 그 기쁨이 탄식으로 바뀝니다. 7절, 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합니다. 포도 열매가 맺혀야 즙을 짜는데, 나무가 말라 열매가 없으니 즐거움도 마르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약탈당한 성읍이 허물어지고 집마다 닫혀 들어가는 자가 없습니다. 안으로는 소출이 마르고 밖으로는 약탈당하여, 안팎으로 기쁨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13절이 그 심판의 강력함을 비유로 말합니다. “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 곧 감람나무를 흔듦 같고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움 같으리라” 감람나무를 세게 흔들면 열매가 다 떨어지듯, 포도를 거둔 뒤 이삭줍기하듯 몇 알만 남듯, 하나님이 세상을 흔드시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것이 떨어지고 남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도 ‘남은 것’이라는 표현이 완전한 소멸이 아님을 알게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을 공허하게 하는 것이 죄임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돈과 공허의 세상을 채우시고 질서와 빛으로 만드셨는데, 그 세상이 다시 공허와 혼돈으로 돌아가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 저지르는 크고 작은 죄악이 우리를 혼란스럽고 공허하게 하며 하나님의 복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니 복을 구하기 전에, 삶의 작은 일에서부터 죄악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른 하나는 진정한 기쁨이 말씀 안에 있음을 붙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쁨과 평안을 원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율례를 지키며 영원한 언약을 붙들고 살아갈 때 참된 기쁨이 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잠시뿐이지만, 말씀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마르지 않는 기쁨과 평안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먼저 붙들고, 서로 그 말씀 안으로 이끄는 공동체로 세워져 가기를 원합니다.
2026.08.10 | 매일성경
● “두로에 관한 경고라”(1절)
이사야 13장부터 오늘 본문까지, 하나님은 여러 나라를 향한 심판을 이어 오셨습니다. 그 첫 나라가 바벨론이었고, 오늘 두로가 그 열방 심판의 마지막입니다. 이런 구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벨론은 세상 나라의 대표로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 곧 세상의 ‘힘’을 상징했습니다. 두로는 지중해 무역으로 부를 쌓은 나라, 곧 세상의 ‘풍요’를 대표합니다. 열방 심판이 힘으로 시작해 풍요로 끝납니다. 세상이 의지하는 두 가지, 힘과 풍요가 다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1절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다시스의 배는 먼 거리를 오가며 무역하던 큰 상선을 가리킵니다. 그 무역의 중심에 두로가 있었습니다. 두로는 바로 옆 시돈과 함께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 성경에 두 이름이 짝을 이루어 자주 등장합니다.
두로는 이스라엘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다윗과 우호를 맺었던 두로 왕 히람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기술자와 백향목을 보내 도왔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성전 건축을 도왔던 그 두로가 이제 심판을 받습니다. 1절 중간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다” 풍요의 상징이던 도시가 순식간에 폐허가 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깃딤, 곧 지중해 건너 먼 섬에까지 전해집니다. 그토록 견고하던 무역 도시의 몰락이 온 바다에 충격으로 퍼집니다.
두로가 어떻게 부를 쌓았는지 3절에 나타납니다.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시홀과 나일은 애굽의 강입니다. 애굽에서 나는 곡물을 배로 실어 날라 여러 나라에 되파는 중계무역으로, 두로는 ‘열국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곡식이 필요한 나라들이 다 두로를 거쳐야 했으니, 그 부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데 그 풍요가 무너지자, 4절에서 두로는 자식을 낳지도 기르지도 못한 여인에 비유됩니다. 번성의 상징이던 도시가 생산이 끊긴 불모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5절, 이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애굽도 고통받습니다. 곡물을 실어 나르던 판로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몰락이 무역으로 얽힌 이웃 나라에까지 파장을 미치는 것입니다.
7절은 두로의 옛 영광를 회고합니다. “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무역으로 풍요와 향락을 누리며, 먼 곳까지 다니며 식민지를 세우던 그 도시가 이렇게 무너졌느냐는 탄식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도시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몰락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8절 “면류관을 씌우던 두로, 그 상인들은 고관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라 이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면류관을 씌우던’이라는 표현이 두로의 위세를 보여줍니다. 두로는 여러 지역을 정복해 식민지로 삼고 거기에 왕을 세워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왕을 세우고 폐하는 권세를 부리던 나라입니다. 그 상인들은 한 나라의 고관에 견줄 만한 존귀한 자들이었습니다.
이토록 위세 등등하던 두로를 누가 무너뜨렸습니까. 9절이 답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두로의 몰락은 우연이나 국제 정세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없이 쌓은 영화를 욕되게 하시고, 스스로 주인 되어 교만하던 자를 낮추시려는 것입니다.
11절은 하나님의 열방 다스리심을 다시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서 열방을 흔드시며” 사람의 눈에는 강대국이 세상을 이끌고 그 질서가 영원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바다 위에까지 손을 펴서 열방을 흔드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무역 제국도, 하나님이 손을 펴시면 흔들립니다. 결국 무너집니다. 우리 의지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17절)
12절은 학대받는 처녀 딸 시돈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갈지라도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앞서 두로의 몰락 소식이 전해졌던 그 먼 섬 깃딤으로 피신해 가도, 거기서 평안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평안은 안전해 보이는 장소에 머문다고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앙이 없는 곳으로 몸을 옮긴다고 평안이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평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참된 평안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러니 좋은 장소 혹은 좋은 상황이 아닌 좋으신 하나님을 구하고 함께 합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15절부터 ‘칠십 년’이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두로가 칠십 년 동안 잊힌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칠십 년은 사람들이 두로를 완전히 잊을 만큼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정하신 기한이 차자 두로를 다시 돌보십니다.
16-17절은 그 회복을 잊혔던 기생이 다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기억에 오르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는 두로의 무역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그린 것입니다. 무역하는 도시가 이익만 좇아 어디든 오가는 모습, 기준 없이 값을 받는 기생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회복된 두로의 무역 소득이 예전처럼 쌓이고 간직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히 여호와께 구별되어 그분 앞에서 섬기는 자들의 양식과 옷감이 됩니다. 세상의 풍요를 상징하던 두로의 부가,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입히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 소득이 어떤 경로로 하나님께 바쳐지는지 본문이 자세히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풍요마저 결국 당신의 뜻과 백성을 위해 돌리시는 주권자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마지막 모습은 두로를 향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남유다를 향한 말씀입니다. 두로가 겪은 칠십 년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시간을 지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회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남유다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남유다도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을 겪겠지만, 그 고통의 끝에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두로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그 길을 미리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의 힘과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열방 심판의 처음은 힘의 나라 바벨론이었고 마지막은 풍요의 나라 두로였습니다. 세상은 힘과 풍요를 따라 움직이고, 우리 마음도 그리로 쏠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힘과 풍요를 손 안에 쥐고 흔드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무너짐을 통해,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복된 삶의 길임을 보여 주십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두로조차 칠십 년 후에 돌보시고, 마침내 그 소득을 하나님께 돌리는 나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고 흔들림 없이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