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19-34절/장자의 명분을 팔라(26.04.15)

아브라함의 생애가 저물고, 이제 하나님의 약속은 이삭을 거쳐 새로운 세대인 야곱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앞선 긴 시간 동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어떻게 훈련하시고 빚어가셨는지를 묵상해 왔습니다. 이제 이삭이 유일한 상속자로서 복을 누리며 평탄한 길만 걸어갈 것 같지만, 성경은 곧바로 이삭의 가정에 찾아온 깊은 시련과, 그 속에서 태어난 두 아들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23절)

이삭은 40세에 리브가와 결혼했지만, 무려 20년 동안 자녀가 없었습니다. 60세가 되어서야 쌍둥이를 안게 됩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자녀가 없는 이들을 선택하시고 또한 곧바로 약속을 이루어 주시지 않고 이토록 긴 기다림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인간은 종종 하나님의 약속조차 나의 힘과 능력으로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능력이 완전히 멈춘 그곳에서, 약속이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성취됨을 알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자녀가 없을 때 아브라함은 하갈이라는 인간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실수를 범했지만, 이삭은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20년이 지난 60세에 이루어집니다. 오랜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기도했던 20년은 결코 응답 없는 무의미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이삭은 “왜 약속의 자녀를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시작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기도의 자리를 지키는 동안, 그의 기도는 내 뜻을 관철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자리로 나아갔을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은혜입니다. 기도가 즉각 응답되지 않는 시간이야말로,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고 하나님을 더욱 깊이 신뢰하게 되는 가장 은혜로운 시간입니다.

오랜 기도 끝에 리브가는 쌍둥이를 잉태하지만, 두 생명은 태중에서부터 격렬하게 다툽니다. 불안해하는 리브가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말씀을 주십니다. 23절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의 눈에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작은 두 생명이지만, 하나님은 ‘두 국민’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시선은 언제나 그 연약한 생명을 통해 이루어가실 거대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어지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향해 23절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당연히 장자인 큰 자가 모든 축복과 권리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크고 강함의 논리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세상은 언제나 큰 자를 환호하지만, 하나님은 연약하고 작은 자를 은혜로 택하셔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큰 자이거나 남들보다 탁월해서 선택받은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자격 없는 작은 자인 우리를 일방적인 은혜로 부르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크고 강한 자들이 아닌 소외되고 아픈 작은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신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4절)

드디어 출산의 때가 되어 붉고 털이 많은 형 에서가 먼저 나오고, 동생 야곱은 형의 발꿈치를 꽉 쥔 채 태어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은 자’입니다. 태중에서부터 어떻게든 먼저 나아가 하나님의 축복을 차지하려 했던 야곱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합니까? 어떻게든 내 힘으로 타인의 발꿈치라도 딛고 올라서 성공하고, 복을 쟁취해 보려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을 보게 됩니다.

잔머리가 비상했던 야곱은 자신의 힘으로 축복을 차지하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사냥에서 돌아와 지친 형 에서의 허기를 이용합니다. 팥죽 한 그릇을 내밀며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장자의 명분’을 요구한 것입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겠다는 야곱의 생각이 기발합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에서의 반응입니다. 32절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며 서슴없이 그 귀한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과 맞바꿔 버립니다.

단 한 끼를 굶었을 뿐인데, 지금 당장의 육신의 배고픔을 참지 못해 하나님이 주신 영적 장자의 권리를 헐값에 넘겨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에서는 참 가벼운 사람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지 못한 사람입니다. 성경은 훗날 이런 에서를 향해 히12:16절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며 ‘망령된 자’라고 합니다. 자신이 가진 신분이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때로는 목적을 위해 인간적인 잔머리를 굴리는 야곱 같기도 하고, 때로는 당장의 허기를 채우려 귀한 것을 내팽개치는 에서 같기도 합니다. 혹 우리도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피 값으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그 영광스러운 신분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지는 않습니까? “지금 내가 힘들어 죽겠는데, 예배가 무슨 소용이고 믿음이 무슨 소용인가?”라며 세상의 팥죽 한 그릇을 얻기 위해 우리의 거룩한 신분과 은혜를 바꾸려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와 자녀 됨의 특권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맙시다. 오늘 하루, 내 손에 당장 쥐어질 팥죽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잡는 성숙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창세기25:1-18절/이삭에게 복을 주셨고(26.04.14)

오늘 본문에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죽음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사람은 떠나도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약속을 이어가십니다.

● “이삭에게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었고”(5절)

아브라함에게는 사라 외에도 ‘그두라’라는 후처가 있었고, 그녀를 통해 여러 자녀를 두었다고 합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수많은 자녀들 사이에서 누가 아브라함의 진짜 후계자가 될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두라의 자식들은 숫자도 많고 세력도 강해보입니다. 본문에 아브라함의 후처 이야기가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성경의 흐름으로 보면 사라가 죽은 후에 후처를 얻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아브라함이 사라를 통해 이삭을 낳은 때 이미 그는 생산능력이 없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자녀인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등장하는 ‘그두라’와 자녀들은 아마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지 않다가, 아브라함의 죽음을 앞두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음을 앞두고 아주 단호한 결단을 내립니다. 5절 “자기의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고”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많은 재산이 아니라, 오직 이삭이 유일한 상속자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이삭이 아브라함을 이을 ‘언약의 유일한 상속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다른 자녀들에게 재물을 나눠주고 이삭을 떠나 동쪽으로 가게 합니다. 이삭을 다른 자녀들과 분리시키는 아브라함의 지혜로운 조치입니다.

창세기의 역사는 ‘분리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과 세상 나라 백성이 섞여버릴 때 어김없이 타락이 찾아왔고, 노아의 홍수나 바벨탑 같은 심판이 임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훗날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의 싹을 지혜롭게 자르고, 약속의 자손이 세상과 섞이지 않도록 철저히 분리하는 부모로서의 마지막 사명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세상 속에 발을 딛고 살아갑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아가지만, 세상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가치관과 행동,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분리’입니다.

●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9절)

175세의 나이로 아브라함은 기운이 다하여 조상에게로 돌아갑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아 무려 100년의 세월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돌아보면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완벽했던 것은 아닙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도망치기도 했고, 두려움에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연약함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흠 많은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빚으시고 연단하셔서, 마침내 독자 이삭마저 기꺼이 바칠 수 있는 성숙한 믿음의 거장으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아브라함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하늘의 별과 같은 자손이나, 가나안 땅 전체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가나안에서 소유한 땅이라고는 아내 사라를 장사 지내기 위해 헷 족속에게 돈을 주고 산 작은 무덤, ‘막벨라 굴’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억울해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평안히 눈을 감습니다. 비록 내 눈앞에서 약속의 완전한 성취를 보지 못했어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마침내 이루실 것을 굳게 믿고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은 당장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약속 너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구절은 11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거대한 믿음의 조상이 세상을 떠났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고 이삭에게로 흘러갑니다. 사람은 죽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은 계속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영생’은 단순히 나 혼자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 땅에서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가고, 그 아름다운 신앙의 유산이 내 자녀에게, 그리고 그 자녀의 자녀에게로 끊임없이 이어져 내려가는 것, 이 역시 언약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생의 한 단면입니다.

12절부터 이어지는 이스마엘의 족보를 보면 하나님의 또 다른 신실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비록 이스마엘은 언약의 중심부에서 밀려났지만, 하나님은 과거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하셨던 “열두 두령을 낳고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창17:20)는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정확하게 성취하셨습니다(16절). 이삭과 같은 택함 받은 자뿐만 아니라, 언약 밖에 있는 자에게도 약속하신 말씀을 끝까지 책임지시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넓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남기기 위해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자녀들이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때 평생의 붙잡을 수 있는 ‘거룩한 믿음의 유산을 남겨주고 있습니까? 나의 무심한 말 한마디, 작은 행동 하나, 일상의 가치관이 켜켜이 쌓여 내 가족과 공동체에 깊은 흔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오늘 나의 삶은 세상의 가치관과 얼마나 선명하게 ‘분리’되어 있습니까? 세상 한가운데 살면서도 세속의 욕망에 물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명한 십자가의 푯대를 향해 걸어가는 영적인 결단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처럼 처음에는 연약하고 실수투성이일지라도, 말씀에 순종하며 묵묵히 걸어갈 때 끝내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나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내 당대에 모든 기도의 응답과 열매를 보지 못할지라도, 나를 넘어 다음 세대까지 힘차게 이어질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을 굳게 신뢰하며 오늘 하루도 묵묵히 믿음의 씨앗을 심는 복된 삶이 됩시다.

창세기 24:50-67절/가겠나이다(26.04.13)

우리는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 머나먼 고향 땅으로 간 후, 우물가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갈 믿음의 계보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종은 리브가의 집으로 초대받아 자신이 어떻게 이곳까지 왔으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리브가를 만나게 하셨는지 그 모든 과정을 가족들에게 상세히 설명합니다. 오늘 본문은 종의 설명을 들은 가족들의 반응과, 마침내 정든 고향을 떠나 이삭에게로 향하는 리브가의 위대한 결단을 보여줍니다. 이 아름다운 여정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와, 그에 반응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50절)

종의 설명을 들은 가족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50절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51절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고 허락합니다. 이들의 입술에서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와 “여호와의 명령대로”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 놀랍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깊이 알고 잘 믿는 사람들이었을까요? 원래 아브라함의 고향은 우상을 숭배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리브가의 가족들 역시 하나님을 온전히 아는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런 고백을 하는 이유는 바로 아브라함 종의 확신에 찬 고백 때문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종은 가족들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35절과 40절 “여호와께서”, 42절과 48절 “내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반복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오직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증거했습니다.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소개한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세상 문화 속에 살던 가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많은 지식과 논리로 상대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일상에서 만난 하나님, 내 삶을 세심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나의 언어로 담담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실한 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도 그분의 일하심을 보게 됩니다.

결혼에 대한 가족들의 허락이 떨어진 후 종의 반응이 특이합니다. 52절 “아브라함의 종이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 엎드려 여호와께 절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결혼을 허락해준 가족들에게 엎드려 감사해야 할 것 같은데 종은 땅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진짜 주권자가 누구이신지를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보이는 누군가의 호의나 환경의 변화 뒤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가 있습니다. 모든 상황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가장 먼저 감사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 “가겠나이다”(58절)

가족들의 허락 후, 종은 다음 날 아침 일찍 길을 떠나려 합니다. 가족들은 당황스럽습니다. 작별의 시간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열흘만이라도 함께 머물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형통함의 결과를 빨리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이제 선택권은 당사자인 리브가에게 주어집니다.

58절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 그가 대답하되 가겠나이다” 리브가는 놀랍게도 망설임 없이 “가겠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리브가의 짧은 대답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창세기 12장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서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12:1절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떠나 …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에 아브라함은 창12:4절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습니다. 이것을 히11:8절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합니다.

리브가의 “가겠나이다”라는 고백은 바로 이 아브라함의 위대한 순종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리브가는 남편 될 이삭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며,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의 이야기를 통해 들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굳게 믿었기에, 익숙하고 안전한 고향을 떠나 700km가 넘는 미지의 땅으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현재의 안락함을 기꺼이 떠나는 결단입니다.

떠나는 리브가를 향해 가족들은 60절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머니가 될지어다 네 씨로 그 원수의 성 문을 얻게 할지어다”라고 축복합니다. 이 축복은 창22장에서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과 동일합니다(22:17절).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은 시대가 지나도, 언제나 믿음으로 결단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끊임없이 흘러갑니다.

멀고 고된 여정 끝에 마침내 리브가는 가나안 땅에 도착하여 이삭을 만납니다. 67절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본문은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리브가를 인도했다고 합니다. 사라는 창17:16절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여인입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사라의 장막에 들임으로써,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셨던 그 언약이 이제 이삭과 리브가를 통해 단절 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사람의 죽음이나 환경의 한계로 중단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섭리는 한 사람의 헌신과 믿음을 통해 세대를 넘어 반드시 성취되고야 맙니다.

우리의 입술은 내가 만난 하나님을 일상 속에서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담담하고 진실한 믿음의 고백을 통해 내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인정할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됩시다.

또한, 익숙하고 편안한 자리에 머물고자 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믿음의 발걸음을 요구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미래 앞에서도 리브가처럼 “예, 가겠나이다”라고 결단하며 순종의 발걸음을 내딛읍시다.

창세기 23:1-20/믿음으로 심는 씨앗(26.04.10)

창22장에서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엄청난 시험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언약을 재확인했습니다. 창22:17절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바로 백성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면서 두 가지 약속을 하셨는데, 바로 ‘땅과 백성’입니다. 22장에서 백성에 대한 약속을 다시 확증하셨다면, 땅에 대한 약속은 어떻게 성취되는 것일까요? 그것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본문은 사라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그 내용은 1-2절로 아주 짧고, 이어지는 내용이 사라의 죽음으로 인해 매장지를 사는 내용으로 길게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한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의 행동을 하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내가 살아 있을 때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망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의 씨앗을 심고 있습니다.

●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4절)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깊은 슬픔 속에서 아브라함은 일어나 헷 족속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아내를 매장할 땅을 구하며 자신을 가리켜 4절“나그네요 거류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고대 근동의 관습상 나그네에게는 땅을 소유할 법적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평생 하나님의 약속 하나만 붙들고 가나안 땅을 밟았지만, 막상 아내를 묻을 무덤 한 평조차 갖지 못한 철저한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사용한 이 단어 “나그네와 거류자”라는 고백 속에는 우리 삶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역시 나그네 인생입니다. 나그네는 가야 할 본향이 있는 사람입니다. 본향에 도착하기까지 계속 이동하는 삶을 삽니다. 나그네는 그곳에 영원히 머물 것이 아니기에 짐을 가볍게 하고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간소하게 삽니다. 이 땅에 영원히 머물 것처럼 높고 견고한 성을 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늘 본향을 향해 걸어가는 나그네, 순례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존재입니다. 내 생명조차 내가 원하는 대로 연장할 수 없고,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부르시면 언제든지 훌훌 털고 떠나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소망을 이 땅에 두지 않고 하늘 소망으로 매일을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16절)

매장지를 구하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의 헷 족속은 6절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라 칭송하며 묘실을 거저 주겠다고 호의를 베풉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신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제안을 단호히 거절합니다. 대신 그는 당시 모든 공적 재판과 중요한 결정이 이루어지던 ‘성문’ 앞으로 나아가, 수많은 사람을 증인으로 세우고 합법적인 거래를 맺습니다.

아브라함이 소유하고자 했던 땅이 막벨라 굴입니다. 에브론이 주인입니다. 에브론 역시 아브라함에게 거져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땅의 금액을 15절 “은 사백 세겔”이라고 합니다. 막대한 금액입니다. 지금 액수로 환산하면 약 10억 정도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제시한 금액을 정당하게 지불하여 막벨라 굴과 그 주위의 밭을 완벽한 자신의 소유로 삼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큰 대가를 지불하면서까지 무덤을 샀던 이유와 그 내용을 이렇게 길게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거래는 단순히 죽은 아내를 묻기 위한 장례 절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장차 가나안 온 땅을 자신과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확고한 믿음의 선포였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여 합법적인 소유권을 얻어냄으로써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장소를 미리 확보한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나그네의 신분으로 무덤 하나 크기의 작은 땅을 얻었을 뿐이지만, 이 작은 땅은 훗날 이스라엘 전체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거대한 소망의 씨앗이자 믿음의 교두보가 되었습니다. 이 곳에 사라을 비롯해서 아브라함과 이삭, 리브가 그리고 야곱이 매장됩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을 떠나 애굽에서 생활하면서도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약 450년 뒤에나 이루어질, 하나님께서 가나안땅을 후손에게 주실 것을 신뢰하며 오늘 한 알의 믿음의 씨앗을 심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위대하고 아름답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나그네’라는 사실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는 존재임을 기억하고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지 않고 본향의 삶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인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것 하나만 매 순간 기억해도 삶에서 평안과 안정을 누리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또한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가는 존재로서 믿음의 작은 씨앗을 심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창세기22:1-24/여호와 이레(26.04.09)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죄로 가득 찬 세상 속에 새로운 나라를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은 땅과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그에게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25년의 기다림 끝에 100세가 되어서야 기적처럼 약속의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본문 바로 앞 21장을 보면 그 아들이 건강하게 자라났고, 아브라함은 주변 사람들과 평화 조약을 맺으며 부와 명예까지 누리는 그야말로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안정되고 평안하다고 느낄 바로 그때, 하나님의 충격적인 명령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집니다.

●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1절)

2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 그를 번제로 드리라” 번제는 짐승을 잡아 온전히 불에 태워 드리는 제사인데,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독자를 직접 불태워 바치라는 이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께서 약속의 자녀로 주실 때는 언제이고, 이제 다시 바치라고 하니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것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시험’이라고 명확히 밝힙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시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험은 사람을 유혹해 죄에 빠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단련시키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의 그릇이 준비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큰 축복을 구하지만, 그것을 감당할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화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감당할 준비가 안 된 자에게 큰 직분이 주어지면 본인과 공동체 모두에게 유익이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오롯이 받을 수 있는 그릇이 되도록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는가?”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명령 앞에서도 아브라함의 반응은 놀랍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한마디 묻지 않습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이삭과 함께 길을 나섭니다. 모리아 산까지 걸어가는 3일의 길 동안 아브라함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그러나 산 아래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종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5절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아브라함 혼자 내려와야 맞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우리’가 돌아오겠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굳건해졌습니다. 없는 가운데서 이삭을 주셨다면, 이 이삭을 하나님께 순종해서 드린다해도 하나님은 다시 주셔서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분이심을 확신한 것입니다. 이것을 히11:19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사람으로 굳건하게 세워가십니다.

●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이상하게 느낀 이삭이 질문합니다.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8절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이 고백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정해진 장소에 도착한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에 눕힙니다. 당시 이삭은 10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었고, 아브라함은 노인이었습니다. 이삭이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아버지를 밀치고 도망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아버지의 뜻에 이삭 역시 순종합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아들을 내리치려하자, 다급해진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이나 아브라함을 부르며 그를 멈춰 세웁니다. 손대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12절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6절에서도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삭)과 하나님 자신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 우리는 종종 하나님께서 주신 자녀, 건강,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정작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선물보다 주님을 더 사랑함을 확인하셨고,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예비해 주시며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17-18절에 이전에 주셨던 약속을 다시 확증해 주십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시험을 통과해야 주어집니다. 특히 18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고 하십니다. 혼란한 시대, 사랑의 우선순위가 뒤바뀐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신앙이 복된 신앙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다 보면 예수님과 관련된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2절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4절 “제삼일에”, 7절 “번제할 어린양”, 12절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18절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등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독자를 죽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하나뿐인 아들 예수님을 향한 십자가의 고통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를 돌아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축복이나 기대감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자체를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 삶에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도무지 포기할 수 없다며 내려놓지 못하는 우리의 ‘이삭’은 무엇입니까? 우리 인생 가운데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연단과 테스트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잠잠히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내게 있는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고 먼저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를 보일 때, 비로소 우리의 시야에 하나님께서 친히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요한복음21:15-25절/네가 나를 사랑하느냐(26.04.08)

우리는 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찾아오셔서 제자들의 빈배를 채워주시고, 또한 그들의 허기진 배를 따뜻한 숯불과 식탁으로 채워주신 은혜를 묵상했습니다. 이제 아침 식사가 끝난 고요한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한 사람, 베드로를 향하십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식하는 21장 후반부는 철저히 실패하고 무너졌던 제자 베드로를 주님께서 어떻게 다시 회복시키시고, 영광스러운 사명의 자리로 부르시는지를 따뜻하게 보여줍니다.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절)

​예수님은 베드로를 향해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십니다(15,16,17). ‘시몬’은 베드로의 원래입니다. 예수님을 시몬의 이름을 ‘베드로’(반석)으로 바꿔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한때 누구보다 앞장서서 주님을 따르겠다며 굳건한 ‘반석’(베드로)로 자처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실패 이후,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을 반석이라 자부할 수 없는 연약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에게 원래의 이름인 ‘시몬’이라 부르시며, 네 힘과 결심으로는 결코 반석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나와 함께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고 초청하십니다.

예수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그 깊은 상처와 자괴감을 깨끗하게 치유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은 “너는 왜 나를 배신했느냐”고 과거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으시고, 그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가 실패했던 근본적인 이유가 결국 ‘사랑의 문제’였음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전의 베드로는 자기 열심과 자기 기준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십자가의 참 사랑을 경험한 지금, 그는 감히 자신의 사랑을 자랑하지 못하고 16절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겸손히 주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오늘 우리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진정 십자가의 사랑으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이기적인 기준과 방식만을 내세워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무조건적인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 심령이 먼저 채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다른 사람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하며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랑을 고백하는 베드로에게 15절 “내 어린 양을 먹이라”는 사명을 맡기십니다. 영혼의 깊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인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육신의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여 그들을 온전히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절)

​주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가 앞으로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지 예언하십니다.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자기 계획과 뜻대로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남이 네 팔을 벌려 원치 않는 십자가의 길로 이끌 것이라는 순교의 예언입니다. 그리고 19절 “나를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를 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사명 앞에서, 베드로는 문득 곁을 있던 사도 요한에 대해서 물어봅니다. 21절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는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한다면, 주님의 사랑을 유독 많이 받았던 저 제자의 미래는 어떨지 비교하고 궁금해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얼마나 쉽게 흔들리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게 주신 십자가의 길, 나를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에 집중하기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남을 바라보며 비교하고 경쟁합니다. “나는 이렇게 수고하는데 저 사람은 왜 편안해 보일까?”, “나는 왜 저 사람보다 은사가 부족할까?”라고 하며 남과 나를 비교하고 경쟁하며 시기하는 마음은 주님을 따르는 길에 가장 치명적인 걸림돌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22절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다른 사람의 사명이나 형편에 신경 쓰지 말고, 네게 주어진 사명의 길을 신실하게 감당하라는 권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서로 다른 은사와 부르심을 주셨습니다. 타인과 비교하는 어리석음을 내려놓고, 나를 부르신 주님만 바라보며 다른 지체들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것이 진정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24절)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사도 요한은 이 모든 말씀이 참된 ‘기록된 증언’임을 거듭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이 더 있었지만 그것들을 다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기적이나 신비로운 표적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생생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함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지체들과 함께 나누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영적 훈련입니다. 때로는 묵상하는 것이 버겁고 나누는 것이 부담스러워 피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록된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나누는 매일의 영적 훈련이 차곡차곡 쌓일 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은 거짓된 것에 흔들리지 않고 건강하고 견고하게 세워집니다.

오늘 우리 신앙의 중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혹시라도 말씀의 자리를 소홀히 한 채, 당장의 내 문제를 해결해 줄 기적만을 구하며 방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하루, 내 힘과 능력을 다 내려놓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다가오시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에 온전히 거합시다. 비교와 경쟁의 시선을 거두고, 매일 내게 주어지는 생명의 말씀에 깊이 뿌리내려, 주님이 걸어가신 그 생명의 길을 잠잠히 그리고 묵묵히 따라가는 복된 제자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