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23 | 매일성경
●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
야고보는 2-4장에서 참된 경건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어제 본문에서는 세상과 벗하지 말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과 벗한 사람, 곧 교만한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 줍니다.
오늘 본문은 4:13절과 5:1절이 모두 “들으라”로 시작합니다. 흘려듣지 말고 귀담아들으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들으라”는 하나님 없이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에 대한 내용이고, 두 번째 “들으라”는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고 재물을 쌓는 부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야고보는 이 둘에게 같은 경고를 합니다. 둘 다 하나님을 빼놓고 자기 힘과 자기 재물을 의지한다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13절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그 당시 여러 도시를 다니며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계획을 철저하게 세웠습니다. 어느 도시로 갈지, 얼마나 머물지, 무엇을 하고 얼마의 이익을 볼지까지 다 정했습니다. 우리도 하루를 시작하며 할 일과 만날 사람과 갈 곳을 계획합니다.
야고보는 계획 세우는 것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 철저한 계획에 딱 하나가 빠져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빠져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완벽한 계획인데 그 안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내 생명이 내 것인 것처럼, 하나님 없이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영원히 살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획을 세우되 하나님을 기억하고, 내 생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이 참된 지혜입니다.
그래서 14절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일 년 뒤의 이익을 계산하지만, 사실 우리는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이어서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합니다. 1:10-11절에서 부한 자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간다고 했던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생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내 힘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개 같은 인생인데도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에 나와 기도하고, 하루를 삽니다. 이것은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고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저도 새벽 설교를 마치고 앉아 기도할 때 가장 먼저 드리는 기도가 오늘 하루를 살게 하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할 일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도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목자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15절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하나님의 뜻과 허락이 아니면 우리는 살 수도 없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으로 받은 생명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16절은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도 안에서 숨 쉬며 사는 존재가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는 것처럼 자랑하는 것은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것 역시 같은 잘못입니다. 겸손은 내 하루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17절)
4장의 결론은 17절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 오늘도 내일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면, 그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선을 행하며 사는 것이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하루를 주신 것은 내 뜻대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5:1절에서 야고보는 다시 “들으라 부한 자들아”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부자는 보통 부자가 아니라 넓은 땅을 가지고 많은 일꾼을 부리던 큰 지주들로 봅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배부르고 편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장에서 가난한 형제와 부한 자를 말했던 야고보가 이제 부한 자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2-3절은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라고 말합니다. 금과 은은 쉽게 녹이 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녹이 슬었다고 말하는 것은, 재물을 나누어 쓰지 않고 쌓아 두기만 해서 그대로 썩어 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녹이 그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됩니다. 3절 끝은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설 날이 가까운데, 그들은 하늘이 아니라 땅에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부자가 되었을까요? 4절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그들의 부는 일꾼들이 땀 흘려 일한 삯을 주지 않고 빼앗아 쌓은 것이었습니다. 품꾼들의 피눈물로 자신들의 배만 채운 것입니다.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울음소리를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대로 갚으시는 분입니다.
5절은 그들이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마음을 살찌게 했다고 말합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자기 것처럼 누렸습니다. 6절은 그들이 대항하지도 않는 의인을 정죄하고 죽였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악하게 재물을 모았고, 얼마나 냉정하게 가난한 이웃을 외면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세상에서는 이렇게 사는 것이 지혜요 잘 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어리석음이요,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시고 들으시며 알고 계십니다. 행한대로 갚으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계획과 삶의 중심에 항상 하나님을 기억하고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은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모든 계획 앞에 “주의 뜻이면”을 두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갑시다.
또한 주신 것을 감사하며 하늘에 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게 주신 것은 나만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가난하고 힘든 이웃이 눈에 보인다면 그것이 선을 행할 기회입니다. 땅에 쌓은 재물은 썩고 좀먹지만, 하나님 앞에서 행한 선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을 행할 줄 알면서 미루지 말고, 오늘 그 선을 행하며 하늘에 보물을 쌓읍시다.
2026.10.22 | 매일성경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2절)
야고보는 1:26-27절에서 참된 경건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2-4장은 그것을 하나씩 설명합니다. 2장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차별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했고, 3장에서는 혀를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4장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을 말합니다. 어제 본문에서 땅의 지혜는 시기와 다툼을 낳는다고 했는데, 오늘 본문은 그 다툼과 싸움이 어디서 오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합니다.
1절에서 야고보는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고 묻습니다. 흩어진 성도들은 시련과 가난 속에서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서로 붙들어 주어도 힘든 형편에 그 안에서 싸움과 다툼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싸움의 심각성을 전쟁에 사용하는 단어를 사용해서 설명합니다. 이처럼 교회 공동체에서의 싸움과 다툼은 심각한 일입니다. 싸우는 교회에 다니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 싸우는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 교회 공동체를 바라보는 야고보의 마음이 무겁습니다.
야고보는 싸움의 뿌리를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여기서 ‘정욕’은 원어로 쾌락, 곧 내가 즐기고 누리고 싶은 욕구를 가리킵니다. 그 욕구가 우리 안에서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싸울 일이 아닌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은 대개 내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싸움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욕 때문입니다.
2절은 그 욕심이 어디까지 가는지 보여 줍니다.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안의 다툼도 겉으로는 의견 차이처럼 보여도, 그 밑에는 내가 얻고 싶은 것을 얻지 못한 마음이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이런 문제의 원인을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2절 하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하나님께 기도로 구하지 않고 내 힘으로 얻으려 하니 싸움이 납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내 방법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3절입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내 욕심을 채우려고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에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기도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구하느냐입니다. 내 욕망을 채우려는 기도는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채우십니다. 어제 말씀처럼 땅의 지혜를 따라 구하지 말고, 위로부터 난 지혜를 따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다툼을 멈추고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정욕은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4절 이하에서 설명합니다. 야고보는 갑자기 “간음한 여인들아”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언약과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가까이하는 것은 남편을 두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은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하고,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한 번 더 말합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함께 가까이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는 성도들에게 5절은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안에는 성령께서 계십니다. 아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데 가만히 있을 남편은 없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세상과 벗하는 것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시기하실 만큼 우리를 사모하십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세상과 벗됨으로 성령님을 근심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 세상을 가까이하면 근심하신다는 사실을 늘 기억하며 성령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8절)
6절은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벗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내 힘과 내 방법으로 원하는 것을 얻으려는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내 힘으로 살 수 없으니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엎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7절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성도들을 다투게 하고 욕심을 내게 하고 세상과 벗하게 만드는 밑바닥에는 마귀가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싫어합니다. 마귀를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만 하고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면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복종할 때 마귀가 우리를 피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길은 8절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이 새벽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온 것도 하나님을 가까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로 교제하는 것이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일입니다. 늘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8절 끝은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는 것이 두 마음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9-10절은 슬퍼하고 애통하며 회개하라고 하고,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약속합니다. 6절에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한 말씀이 10절에서 다시 나옵니다. 내 힘으로 얻으려 할수록 얻지 못하고, 낮추고 하나님을 의지할수록 하나님이 높이십니다.
11절에서 야고보는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1절의 싸움과 다툼은 대개 비방에서 시작됩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12절은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주시고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내 기준으로 형제를 헐뜯고 정죄하는 순간, 나는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비방과 판단이 일상이 되어 그 심각함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12절 끝은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고 묻습니다. 형제 향한 비방을 멈춰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싸우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무언가를 얻으려고 싸우고 다투어서는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시고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싸우고 싶을 때, 다투고 싶을 때, 그 자리에서 먼저 기도합시다.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기뻐하시도록 하나님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세상과 벗하고 형제를 비방하며 다투면 성령께서 근심하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낮아질 때 하나님도 우리를 가까이하십니다.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은혜를 누리며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2026.10.21 | 매일성경
●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13절)
어제 본문에서 야고보는 혀에 대해 말했습니다. 혀는 작은 지체지만 큰 불을 일으키고, 사람은 무엇이든 길들여도 자기 혀는 길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듯, 입에서 나오는 말은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속을 말씀과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다른 말로 ‘지혜’로 설명합니다. 어떤 지혜를 가졌느냐가 어떤 말을 하느냐로 이어집니다.
13절에서 야고보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고 묻습니다. 어제 1절에서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자기에게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의 결과로 다툼이 일어난다면 어떻습니까? 내가 안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과 하나 되지 못하고 갈등과 분쟁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지혜를 말로 증명하지 말고 삶으로 보이라고 합니다. 13절 끝은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이 편지 내내 행함을 강조합니다.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혜를 삶으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제 말씀처럼 말은 많은데 삶이 따라오지 않으면 그 지혜는 오히려 더 큰 심판을 부릅니다. 참된 지혜는 입이 아니라 선한 행실로 증명됩니다.
지혜 있는 사람의 특징은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은 날카롭지 않고 세지 않은 것, 부드럽고 온화한 것입니다. 문제를 풀 때 경쟁과 억압과 명령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윗사람이 억누르고 지시하면 따르기는 해도 마음에는 금이 갑니다. 그렇게 관계가 깨집니다. 관계 속에서 온유함으로 지혜를 드러내는 사람이 진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14절은 지혜 있다는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지혜로 자기 삶을 바르게 하고 다른 사람을 돕고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지혜롭다고 하면서 밑바닥에 시기와 다툼이 깔린 사람이 있습니다. 시기와 다툼에 사로잡히면 이기기 위해 거짓말도 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충격적인 것은 야고보가 이 편지를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성도들에게 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말씀을 따라 산다는 성도들 안에 시기와 다툼이 가득했고, 그것 때문에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그 당시 교회의 슬픈 현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시기와 다툼이 있는지 정직하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야고보는 이런 모습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지적합니다. 15절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어제 혀의 불이 지옥 불에서 난다고 했던 것처럼, 오늘도 야고보의 말은 매우 강합니다. 시기와 다툼에서 나온 지혜는 인간적이고 육신적일 뿐 아니라, 귀신의 것이라고 합니다. 공동체를 깨뜨리려는 악한 세력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탄은 지금도 시기와 다툼을 이용해 성도들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16절은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그 밑에는 대개 시기와 다툼이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모인 자리에서도 시기와 다툼이 생기고, 나중에는 큰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안다, 내가 옳다, 내 말이 맞다고 할 때, 그것이 시기와 다툼에서 나온 것인지 하나님이 주신 지혜인지 마음 밑바닥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된 지혜가 필요합니다.
●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17절)
삶의 열매로 지혜가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 관계에서 맺히는 열매가 갈등과 혼란이라면, 내 지혜는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니라 땅의 지혜입니다. 내 관계에서 평안과 쉼이 맺히고, 갈등이 풀리고 하나 됨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위로부터 난 지혜의 열매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내 곁의 관계가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느냐가 내 지혜를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위로부터 난 지혜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7절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성결은 깨끗한 마음입니다. 사심과 욕심이 섞이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관용은 너그럽게 이해해 주는 것이고, 양순은 다른 사람의 말을 받아 주는 것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는 것은 치우치지 않고 위선이 없는 것입니다.
17-18절에서 ‘화평’이라는 말이 3번 나옵니다. 17절의 “화평하고”와 18절의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입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의 중심은 ‘화평’입니다. 다툼은 대개 서로 자기가 옳다고 할 때 일어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나의 옮음이 다툼으로 이어진다면 둘 다 위로부터 난 지혜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위로부터 지혜를 받은 사람은 옳고 그름의 문제에서도 화평의 열매를 맺습니다. 18절 끝은 그렇게 화평으로 심은 사람이 의의 열매를 거둔다고 약속합니다.
보통은 내가 알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만 옳다고 하는 데서 많은 문제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잘된 방법이 우리 공동체에서도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다르고 환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사람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 되는 길인지 기도하며 묻습니다. 내 방식과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합니다. 야고보는 1:5절에서 이미 지혜가 부족하거든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라고 했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십니다.
교회를 위해 열심히 수고하다 보면 마음에 상처가 생기고, 내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때 낙심하지 말고,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가는 그 과정이 바로 지혜가 자라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지혜로운 성도들이 많은 공동체는 어떤 문제를 만나도 다툼이 아니라 화평으로 하나 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내가 맺는 관계의 열매로 내 지혜를 점검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할수록 내 주변에 갈등과 혼란이 아니라 화평과 기쁨이 맺히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위로부터 난 지혜로 살아갈 때, 그것이 나에게도 복이 되고 공동체에도 아름다운 열매가 됩니다. 안 해도 될 말은 참고, 불평과 원망은 삼키며, 온유함으로 화평의 열매를 심읍시다.
또한 위로부터 난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로부터 난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지혜는 기도하고 말씀 안에서 구할 때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방법을 묻는 사람이 지혜로 자라 갑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평안과 하나 됨이 풍성하도록 날마다 지혜를 구하며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2026.10.20 | 매일성경
●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2절)
계속해서 야고보는 1:26-27절에서 말한 참된 경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2장에서 야고보는 이웃을 차별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했고, 어제 본문은 그 연장선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3장은 참된 경건의 다른 한 가지인 ‘혀’에 대해 말합니다. 1:26절에서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경건하다 하는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1절에서 야고보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선생은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고, 말을 많이 하면 실수도 많습니다. 어제 본문과 연결해서 보면, 옳은 말은 많이 하는데 그 말대로 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겁니다. 믿음을 말하는데 행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라고 말합니다. 잠10:19절도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은 자리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처음 교회에 온 사람의 말과 오래 신앙생활 한 사람의 말은 무게가 다릅니다. 새신자의 실수는 웃어넘길 수 있지만, 교회에서 자리를 맡은 사람의 한마디는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내가 교회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지 돌아보고, 그 자리에 합당한 말을 해야 합니다. 인정받고 싶어 하면서 정작 자신이 한 말로 그 신뢰를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 해야 할 말을 하고, 안 해야 할 때 감정을 드러내면 그 피해는 결국 나에게 돌아옵니다.
2절은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말을 다스리는 것이 온전한 신앙의 표지라고 봅니다.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합니다. 할 말과 하지 않을 말을 분별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말은 누군가를 격려하고 위로하고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악된 본성 때문에 말은 상처와 문제를 일으킬 때가 훨씬 많습니다. 감정이 가는 대로 말을 쏟아 내면 나는 편할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상처를 받습니다. 많은 봉사로 쌓은 것을 말 한마디로 잃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상처받은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단한 일이 아니라 말 한마디로 인한 것이 많습니다. 말 한마디가 이 교회를 계속 다녀야 할지 고민하게 합니다.
혀의 중요성에 대해 야고보는 두 가지 예를 듭니다. 먼저 말에 대해서 말(馬)을 예로 설명합니다. 힘세고 빠른 말도 입에 작은 재갈 하나를 물리면 온몸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광풍에 밀려가는 큰 배도 지극히 작은 키 하나로 사공의 뜻대로 움직입니다. 5절은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라고 말합니다. 혀는 몸에 비하면 아주 작지만 그 영향력은 어마어마합니다. 작은 재갈과 작은 키가 큰 말과 큰 배의 방향을 정하듯, 작은 혀가 한 사람의 인생과 공동체의 방향을 바꿉니다.
5절 끝은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말합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온 산을 태우듯,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을 태우고 한 공동체를 태울 수 있습니다. 6절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고 말합니다. 그 당시 흩어진 성도들은 핍박과 가난 속에 있었습니다. 서로 보듬고 격려해도 부족할 때에 말 한마디가 가시가 되고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야고보의 표현이 이렇게 강한 것은 그만큼 상황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6절은 혀가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라고 말합니다. 삶의 수레바퀴는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인생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봅니다. 함부로 놀린 혀가 내 인생 전체를 불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공동체에도 유익이 없습니다. 그리고 6절 끝은 그 불이 지옥 불에서 난다고 말합니다. 혀를 잘못 쓰는 일이 그만큼 무섭다는 것입니다.
7-8절은 더 심각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은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을 다 길들입니다. 코끼리 같은 큰 짐승도, 맹수도 길들입니다. 그러나 8절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큰 짐승도 길들이는 사람이 자기 입 안의 작은 혀는 길들이지 못합니다. 조심하겠다는 결심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12절)
9절은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이런 상황입니다. 주일 오전에 함께 모여 은혜롭게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합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모인 자리에서 같은 입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성도를 저주하고, 비방하며 정죄합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너무 익숙해서 충격이 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10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입술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을 저주하는 입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야고보는 이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다 그렇지 하고 넘길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자연의 이치로 설명합니다. 한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없습니다.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맺을 수 없고,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12절 끝은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의 핵심이 여기 있습니다. 샘에서 나오는 물은 그 샘 안에 있는 물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그 사람 속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눅6:45절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혀를 길들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듣고 조심하겠다고 다짐해도, 어느 순간 내 속에 있는 것이 그대로 나옵니다. 세상의 가치관, 남과의 비교와 경쟁, 시기와 미움과 욕심이 속에 있으면 상황이 생길 때 그대로 말로 나옵니다. 그래서 혀를 바꾸려 하기 전에 먼저 속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쌓아가야 합니다. 십자가의 사랑으로 마음을 채울 때 우리 입에서 격려와 위로의 말이 나옵니다. 언어 습관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채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내가 선 자리에 합당한 말을 해야 합니다. 자리가 주어졌다면 그 자리만큼 내 말의 무게도 커집니다. 내 한마디가 생각보다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하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합시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그 입술로 성도를 깎아내리지 말고, 공동체를 세우고 사람을 격려하는 지혜로운 입술이 됩시다.
또한 내 속을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듯, 속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옵니다. 말씀으로 채워진 성도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 공동체를 아름답게 세워 가십니다.
2026.10.19 | 매일성경
●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야고보는 1:26-27절에서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말했습니다. 혀를 재갈 물리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2-4장은 이 세 가지를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2장은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외면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심각하게 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결론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야고보의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같은 격한 표현도 나옵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분노가 아니라, 믿는다는 성도들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느냐는 거룩한 안타까움입니다. 그만큼 그 당시 성도들의 삶이 심각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한 꾸중으로만 듣지 말고, 내 믿음을 점검하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14절에서 야고보는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습니다. 그 당시 많은 성도들이 믿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을 들여다보니 행함이 없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말과 실제의 삶이 따로 였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신앙에 대해 14절 끝에서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문제 삼는 것은 입술과 머리에만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왕과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변화가 나타납니다. 변화가 전혀 없는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고 말한다면,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어낸 예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흩어진 성도들 가운데는 믿음 때문에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형편이 넉넉한 성도들이 곁에서 입으로만 걱정하고 도움의 손길은 내밀지 않았습니다.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행함과 믿음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17,18,20,22,24,26절). 그리고 같은 결론이 17절과 26절에 두 번 나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26절은 이것을 몸에 빗대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라고 말합니다. 형체는 있어도 생명이 떠난 몸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야고보는 좀 더 강하게 말합니다.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귀신들도 압니다. 알고 두려워 떨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아는 것으로 끝나는 믿음이라면 귀신들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을 자랑하는 성도들을 향한 야고보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20절에서 야고보는 그런 사람을 “허탄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허탄하다는 말은 원어로 속이 비었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안이 텅 비어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신앙의 모양도 갖추었지만, 그 안에 삶으로 드러나는 열매가 없는 사람입니다.
●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3절)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려 주겠다며 두 사람을 예로 듭니다. 21절의 아브라함과 25절의 기생 라합입니다. 두 사람은 겉으로 보면 극과 극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고 믿음의 조상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여인이었고 신분도 기생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든 이방 여인이든, 살아 있는 믿음은 똑같이 행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23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훨씬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창15:6절).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21절처럼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믿음이 순종, 행함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은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22절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1:4절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우리가 온전하게 된다고 했는데, 거기 사용된 ‘온전’이라는 단어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합니다. 24절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라고 한 것도, 믿음과 행함을 떼어 놓은 성도들을 향해 둘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3절 끝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을 삶으로 드러냈고, 하나님은 그를 벗이라 부르셨습니다. 믿음이 있다 하면서 삶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믿음을 삶으로 실천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벗이라는 이름은 믿음을 삶으로 살아 낸 사람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입니다.
25절은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을 숨겨주고 다른 길로 나가게 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 눈에 정탐들은 적이었고, 이 일이 드러나면 라합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에 대해 듣고 믿었고, 그 믿음이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목숨을 건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드리는 것으로, 라합은 자기 목숨을 거는 것으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모두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믿음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믿음을 작은 행함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이 편지는 오래전 성도들에게 쓴 것이지만, 야고보가 오늘 우리에게 편지를 써도 내용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입술에만 머무는 믿음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행함은 큰일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이웃을 배려하는 작은 행동 하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내 곁의 이웃에게 그 믿음을 드러냅시다.
또한 하나님은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성도를 벗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찾으시고 귀히 여기시며 기뻐하십니다. 우리 늘봄교회 안에 하나님이 친구로 삼고 싶어 하시는 성도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2026.10.16 | 매일성경
●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12절)
어제 말씀에서 야고보는 시련 가운데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했습니다.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련을 만난 사람이 모두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가난한 형제는 높음을, 부한 자는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다시 시험에 대해 말합니다.
12절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4절에서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참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힘들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인내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왜 참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은 승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끝까지 견딘 사람만 받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멈추고 싶은 마음을 이기고 끝까지 달려야 우승의 면류관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길에도 멈추고 싶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바라보며 견디는 사람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지금 내가 인내해야 할 자리와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특히 이 면류관이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련을 견디는 것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견딜 수 없습니다. 인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막상 시련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시련 앞에서 죽겠다, 못 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주님이 살아 계시고 반드시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견디면, 주님은 생명의 면류관으로 우리 삶을 풍성하게 이끄십니다.
13절은 같은 ‘시험’이라는 말을 쓰지만 다른 의미로 이야기합니다. 12절까지의 시험은 믿음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었습니다. 그런데 13절부터의 시험은 죄로 끌어들이는 유혹입니다. 원어에서도 같은 단어가 두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믿음을 단련하려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련이 있고, 내 안에서 생기거나 사탄이 속여서 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혹에 넘어가 무너진 사람 가운데 하나님을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런 시험에 들게 하셨느냐고 핑계를 댑니다. 그 당시 성도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유혹해서 무너지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유혹은 어디서 옵니까? 14절은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속이는 사람이 가장 큰 문제지만, 속는 사람에게도 욕심이 있으면 그 안의 함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옳은 길인지 분별해야 하는데, 욕심에 끌리면 눈이 가려져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유혹이 밖에서 오는 것처럼 보여도, 그 유혹에 끌려가게 만드는 것은 내 안의 욕심입니다.
●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17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욕심이 작은 것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작은 욕심이 생명처럼 자라서 죄가 되고, 그 죄가 자라서 사망에 이릅니다. 우리 안의 작은 욕심을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이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여기서 12절과 14절이 대조를 이룹니다. 12절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14절은 “자기 욕심에 끌리는 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길의 끝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고, 욕심을 따르는 길의 끝에는 ‘사망’이 있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자기 소견대로 살다가 죽음과 같은 결과를 맞은 것처럼, 욕심은 결국 사망을 가져옵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무엇에 속지 말라는 것일까요? 욕심을 부리면 이 땅에서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17절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말합니다. 좋은 것은 욕심을 부려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주셔야 얻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려 움켜쥔 것은 오히려 나를 죄로 끌고 가지만,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온전한 선물입니다.
17절은 그 아버지를 “빛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고 말합니다. 해와 달과 별 같은 빛들은 움직이고 그림자도 바뀝니다. 그러나 그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채우십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생각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이 위로부터 좋은 것으로 우리 삶을 채우십니다.
18절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합니다. 15절에서는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았습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십니다. 같은 낳는다는 말로 두 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낳는 것은 죄와 사망이고, 말씀이 낳는 것은 의와 새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피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려고 낳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유혹을 받고 욕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욕심에 끌려가면 죄와 사망으로 갑니다. 그러나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살면 그 길이 의와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좋은 것은 모두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것은 욕심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변함없으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위로부터 주십니다. 지금은 시련 가운데 있어도 반드시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견딥시다.
또한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욕심이 많은 세상에서 내 생각대로 살면 결국 죄와 사망에 이릅니다. 우리를 말씀으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택의 순간마다 말씀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생명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으로 승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