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5 | 매일성경
●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3절)
어제 바울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은 사람을 ‘신령한 자’, 곧 성숙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은 성숙하지 못한 성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바울의 말에 고린도교인들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스스로 성숙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알고 다양한 은사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기에는 달랐습니다.
1절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들을 어린아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2절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바울이 처음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기초적인 것부터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기초, 그것이 젖입니다. 젖은 어린아이에게 먹여주는 것입니다. 스스로 먹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거기서 성장해야 합니다. 밥, 곧 단단한 음식을 스스로 먹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스스로 묵상하고 곱씹어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그것이 단단한 음식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젖을 먹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심각한 것은 자신들이 그렇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의 삶에 어린아이의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3절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오” 시기하고 분쟁하고 다투는 것, 그것이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나이는 어른인데 하는 행동은 아이 같은 모습, 이것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성숙함의 기준은 지식의 양도, 교회 출석 연수도, 직분도 아닙니다. 삶의 열매입니다. 그 사람이 공동체를 세우는가, 아니면 무너뜨리는가. 격려하고 위로하는가, 아니면 시기하고 분열을 일으키는가. 이것이 바울이 보는 성숙의 기준입니다.
4절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사람을 따라 움직이는 것, 그것도 어린아이의 특징입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따라 줄을 서는 것이지요.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5절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이 그 때에 보내서 일하게 하신 사역자들일 뿐입니다. 섬기는 종입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7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내가 했다, 내가 무엇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내가 열심히 했는데 왜 열매가 없지, 왜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지 하는 괴로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면 달라집니다. 내게 맡겨진 일을 그 때에 감당하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도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8절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교회 공동체에 문제가 생겨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물이 자랄 때 온실에서만 자라지 않습니다. 비바람을 견디며 건강하게 자라납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사람을 바라보고 문제를 바라보지 말고, 이 과정을 통해 우리를 더 성숙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10절)
9절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얼마나 영광스러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자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섬기는 이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밭이고 하나님의 집입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들어와 생명을 얻는 곳, 성도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곳,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세워가야 할까요? 바울은 지혜로운 건축자의 비유를 사용합니다. 10절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첫째로 기초가 중요합니다. 11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교회의 기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기초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의 복음을 기초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도 물질도 지식도 기초가 될 수 없습니다. 신앙이 흔들릴 때, 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지금 내 기초가 무엇인지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삼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것을 기초로 삼고 있는가.
둘째로 그 위에 무엇을 세우는가가 중요합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짓는 사람이 있고,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했던 모든 일들은 마지막에 하나님의 불을 통과합니다. 그 불에서 남는 것이 있고, 사라지는 것이 있습니다. 겉으로 화려하고 거대해 보여도 불을 통과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초라해 보여도 불을 통과하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다. 15절, 불타버리면 해를 받지만 구원은 받습니다. 구원은 받지만 하나님 앞에서 그동안 한 일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불을 통과하고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정신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행한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았는가는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느냐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어린아이 신앙에서 성숙한 어른 신앙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젖만 먹는 단계에서 단단한 음식을 스스로 먹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스스로 묵상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그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불을 통과할 때 남을 수 있는 것인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십자가의 정신으로 감당하는 일들이 결국 하나님 앞에 남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잘하였도다”는 칭찬을 받는 삶을 오늘부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6.04 | 매일성경
●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4절)
바울은 어제 말씀에서 세상 지혜와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를 설명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세상 지혜가 가득한 고린도에서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했을까요? 사람들은 탁월한 언변과 설득력 있는 지혜를 기대했습니다. 바울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전혀 다른 선택을 합니다.
2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것이 바울의 선택이었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보았듯이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었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무시하고 외면한다 해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증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3절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강해 보이는 바울도 연약했습니다. 고린도라는 도시 앞에서,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야 할까 하는 고민 앞에서 바울은 떨었습니다. 그런데 그 약함과 두려움 속에서 바울이 의지한 것이 있었습니다. 4절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나의 언변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을 구했습니다. 내가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감동하시고 역사하셔서 이들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기를 의지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5절이 이유를 밝힙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함이라” 사람의 말에 설득되어 믿게 된 믿음은 흔들립니다. 더 똑똑한 사람이 나타나 “그것은 틀렸어, 이것이 옳아!”라고 하면 무너집니다. 세상의 지혜는 시대가 흐르면 바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깨달은 믿음은 다릅니다. 2천 년 전 바울이 고린도에서 선포한 십자가의 진리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 안에 살아 있습니다. 신앙의 기초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 위에 있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6절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는 지혜를 말하노니”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세상의 지혜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당시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은 통치자들이었습니다. 나라의 최고 지성들이 그 주변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8절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세상 최고의 지혜를 가진 자들이 인류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습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을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지혜는 어떤 것입니까? 7절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만세 전에, 이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계획하셨다는 것. 그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영광을 위해 이 모든 일을 계획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신비인지 알 수 없습니다.
●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10절)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인간의 어떤 능력으로도 이것을 알 수 없습니다. 대신 10절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성령께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완벽하게 아십니다. 그 성령께서 우리에게 이것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을 바울은 우리 이야기를 통해 설명합니다. 사람을 가장 잘 아는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영입니다. 그것처럼 하나님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그 성령께서 12절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십니다.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를 깨달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놀라운 은혜를 받습니다. 만세 전에 나를 위해 계획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우리 마음 가운데 깨달아질 때, 흔들림 없이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초가 세워집니다.
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성령 없이는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신령한 자, 곧 영적으로 성숙하고 성령으로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이 말은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비판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분별하고 가치를 평가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새로운 렌즈를 갖게된 사람입니다.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니 세상의 어떤 가치관과 시선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된 사람은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16절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피조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을 알거나, 하나님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성령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만세 전에 우리의 영광을 위해 계획하시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 그 마음을 알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이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게 되며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이유입니다.
오늘 말씀을 두 가지로 정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성령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든, 소그룹에서 나누든, 아이들을 가르치든,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감당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설득하려 하지 말고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만세 전에 나를 위해 작정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성령을 통해 깊이 알아가는 것입니다. 성령을 통해 이 신비를 깨달아 알면 알수록 우리 안에 은혜와 감격이 넘칩니다. 말씀 묵상을 시작하기 전,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성령님, 내 눈을 열어 주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을 보게 하여 주십시오.”
2026.06.03 | 매일성경
● “십자가의 도가 …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18절)
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지도자를 중심으로 네 파로 갈라진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그 원인은 고린도 사람들이 세상의 지혜, 철학, 말 잘하는 것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하나님의 지혜를 대조하며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18절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같은 십자가인데 보는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비웃습니다. 한 사람이 나무에 달려 죽은 것이 어떻게 모든 사람을 구원한다는 말이냐고 합니다. 그들에게 십자가는 미련하고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에게는 다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은 생각할수록 신비고 은혜고 사랑입니다.
여기에 십자가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의 지혜는 똑똑한 사람이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십자가를 똑똑한 사람만 깨닫는다면, 교회에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만 앉아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이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구원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세상 지혜로 알 수 없는 십자가를 두고, 오히려 세상 지혜를 교회 안에서 추구하며 갈라졌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19절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바울은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세상의 지혜를 무너뜨리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명확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 굳이 십자가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 구원하셨을까요? 21절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전도, 곧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전하는 것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22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세상 사람을 둘로 나누면 능력을 원하는 사람과 지혜를 원하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유대인은 표적, 곧 능력을 구했습니다. 로마의 압제 아래 있던 그들은 자신들을 해방시켜 줄 강한 메시아를 원했습니다. 헬라인은 지혜를 구했습니다. 철학과 똑똑함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무엇을 전했습니까? 23절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능력을 원하는 유대인에게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전했고, 지혜를 원하는 헬라인에게도 같은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습니다. 자기도 구원하지 못한 무능력한 메시아를 어떻게 믿느냐는 것입니다.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모두를 구원한다는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24절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유대인이 무능력이라 한 것이 진짜 능력이고, 헬라인이 미련하다 한 것이 진짜 지혜입니다. 십자가는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이고, 우리의 죄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31절)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자신들을 돌아보라고 합니다. 26절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린도 교인들은 서로 지혜롭다, 능력 있다 하며 파를 나눴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보기에는 도토리 키재기처럼 누가 더 낫네 하며 끼리끼리 나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세상에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도 많은데, 하나님은 왜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한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27-28절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반대입니다. 세상은 지혜 있고 힘 있는 사람이 자리를 차지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부족한 사람들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 이유가 29절에 있습니다.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똑똑하고 잘난 사람은 무언가를 이루면 “내가 했다”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내가, 누구도 불러주지 않던 내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때, 그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31절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여기 있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알량한 지혜와 지위를 가지고 교회 안에서 거들먹거리며 파당을 이뤘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세상의 지혜를 추구하지만, 우리는 세상 지혜와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곧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 십자가가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고 위대한 지혜인지를 깨닫고 감격하며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고 연약해도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자랑하지 않고 주님을 자랑할 때, 하나님이 그 삶을 통해 영광을 받으십니다.
2026.06.02 | 매일성경
●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10절)
어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문제 많은 교회지만 하나님의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거룩하여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본격적으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지적합니다. 그런데 그 문제가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10절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부르는 첫 단어가 “형제들아”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잘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볼로와 비교하며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이며, 한 가족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 감정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권면하거나 문제를 지적할 때, 내 감정과 기분, 경험으로 말하면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커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권면할 때 비로소 문제가 풀립니다.
10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같은’이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같은 말, 같은 마음, 같은 뜻. 교회 공동체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 됨은 아무 생각 없이 누군가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교회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가 되면 같은 말을 하게 됩니다. 살리는 말, 격려하는 말, 위로하는 말, 하나 되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루에 수많은 말을 하며 삽니다. 그 말이 누군가를 공격하고 비방하는 말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성도로 부름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갈등은 열심히 하는 사람들에게서 일어납니다. 열심히 한다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될까요? 열심히 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방향이 다르면 열심히 할수록 상처가 깊어집니다. 다툼이 많아집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열심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같은 방향을 향하는 것입니다.
10절 끝의 “온전히 합하라”는 원래 ‘찢어진 그물을 수선하다’, ‘부러진 뼈를 맞추다’는 의미입니다. 그물이 찢어져 있으면 아무리 던져도 고기를 잡을 수 없습니다. 던지기 전에 먼저 그물을 깁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 되지 않은 열심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바울의 안타까움이 여기 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열심이 있었지만 하나가 되지 못해 그 열심이 오히려 교회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13절)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후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세운 교회가 분쟁으로 갈라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요. 분쟁의 핵심이 12절에 나옵니다.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고린도 교회는 특이하게 지도자를 중심으로 네 파로 갈라졌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베드로)파, 그리스도파. 지도자를 중심으로 줄을 섰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고린도는 철학과 말 잘하는 사람을 우상처럼 숭배하던 도시였습니다. 그 세상의 정신이 교회 안으로 그대로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데, 누가 더 똑똑하고 말을 잘하느냐를 따지며 사람, 지도자를 중심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지금 시대에도 이것이 문제입니다. 세상이 교회로 들어옵니다. 경쟁하고 시기하고 높아지려 하고 인정받으려는 세상의 정신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회를 보며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있지 않은가” 돌아봐야 합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사람을 중심으로 교회가 갈라지는 것은 예수님의 몸을 찢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파를 만들고 분쟁을 일으킬 때, 그것이 주님의 몸을 찢는 일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그저 내가 분하고 억울한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둘째,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나를 구원했는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셋째,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고린도 교인들은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지를 특별하게 여겼습니다. 그 사람과 영적인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주는 사람은 도구일 뿐입니다. 세례를 주는 사람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서 세례를 통해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작은 문제 같지만 중요합니다. 부목사님이 심방을 오는 것보다 담임목사님이 오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합니다. 이런 잘못된 생각들로 오해와 서운함이 쌓이고, 그것이 결국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17절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세상을 감동시킬 화려한 말과 지식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말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말과 탁월한 지식이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가 빠지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언변이 십자가의 지혜를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단순하게 전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내일 본문에 나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중심으로 나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 되어야 합니다. 어떤 열심보다 하나 됨이 먼저입니다. 찢어진 그물로는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버리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나는 누구 편”이라는 나 중심의 생각 때문에 나뉘었습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예수님 중심, 십자가 중심의 신앙으로 살아갈 때 아름다운 하나 됨을 이룰 수 있습니다.
2026.06.01 | 매일성경
●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1절)
창세기 묵상을 마치고 오늘부터 고린도전서를 묵상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파당 싸움, 음행, 법정 다툼, 우상 제물 논쟁, 은사 문제까지. 그런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쓴다면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책망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분노하거나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감사로 시작합니다.
1절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는 첫 마디입니다. 내가 원해서 사도가 된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이 뛰어나서 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을 아볼로와 비교하며 가볍게 여기는 상황이었습니다. 고린도는 철학과 수사학이 발달한 도시였고, 말을 잘하고 지식이 뛰어난 아볼로가 인기를 끌었습니다. 바울은 이 교회를 직접 개척하고 오랜 시간 혼신의 힘을 다해 복음을 전한 사람이었는데도 가볍게 여겨졌습니다. 섭섭할 만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를 변호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원래 교회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구원받을 수 없는 삶을 살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사도로 부르신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은혜였습니다. 그 부름을 생각할 때마다 바울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바울의 삶은 우리가 묵상했던 창세기의 요셉과 비슷합니다. 순간순간 고통받고 눈물 흘렸지만, 하나님은 그 인생 전체를 통해 야곱 가족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바울도 같은 고백을 합니다. 죽어가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 전체에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요셉처럼 바울처럼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십니다.
바울이 자신의 부르심을 이야기한 것은 성도들의 부르심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가 바로 자신들이 어떤 부름을 받았는지 모르기 때문이었습니다. 2절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 바울은 사도로, 성도들은 성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표현이 있습니다. ‘거룩하여지고’입니다. 앞으로 거룩해질 것이 아니라, 이미 거룩하여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죄가 해결되었고, 우리는 이미 거룩한 성도의 신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를 볼 때 거룩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부족하고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미 거룩하여졌지만 옛 사람의 본성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가야 합니다. 거룩하지 못하게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가득한 고린도 교회를 바울은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릅니다. 완전한 교회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러나 불완전한 교회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사람만 쓰신다면 부름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부족한 우리를, 부족한 교회를 통해 일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8절)
4-7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감사를 표합니다. 5절 “모든 일 곧 언변과 모든 지식이 풍족하므로”, 7절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고린도 교회는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성경을 지식적으로 탐구했으며, 병 고치는 은사, 예언의 은사, 방언과 통역의 은사 등 다양한 은사가 나타났습니다. 대단한 교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문제의 씨앗이었습니다.
언변과 지식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데, 자기 자랑이 되었습니다. 은사가 교회를 세우고 성도를 섬기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데, 자기를 드러내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은사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방향이 잘못된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하나 이상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 은사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8절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주님 앞에 설 날을 생각하며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 날에 “주님이 주신 은사로 교회를 섬겼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삶, 책망이 아닌 칭찬을 받는 삶이 중요합니다.
9절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절이자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봉사 중심으로 하는 사람, 사람들과의 관계 중심으로 하는 사람, 습관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는 신앙의 핵심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기도로 주님과 대화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뿌리입니다.
주님과의 교제 없이 성도끼리의 교제만 활발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주님과 상관없는 모임이 됩니다. 서로 비난하고 세상 이야기만 가득한 모임. 그것은 세상 모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가진 문제의 뿌리였습니다. 매일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과 교제하고, 그 바탕 위에서 성도들과 교제하는 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첫째, 나는 성도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부름을 받았는지 기억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이미 거룩하여진 하나님의 성도이고,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 정체성을 가지고 오늘 하루도 성도로서의 삶을 각자의 자리에서 살아갑시다.
둘째, 신앙의 핵심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는 것이 모든 신앙생활의 기초입니다. 이 뿌리가 건강할 때 우리의 삶도, 공동체도 건강해집니다. 오늘도 말씀을 묵상하며 한 말씀을 붙잡고 살아갑시다.
2026.05.29 | 매일성경
●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18절)
야곱은 어제에 이어 나머지 여섯 아들에게 축복합니다. 유다에게 가장 길게, 요셉에게도 길게 이야기했다면, 나머지 아들들에게는 짧게 선포합니다. 그러나 짧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각자에게 맞는 선포를 합니다. 28절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야곱이 한 명 한 명의 삶을 보고, 거기에 알맞은 복을 선포했습니다.
16절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심판’한다는 것은 단 지파가 이스라엘의 기준과 모범이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단은 길의 뱀이요 밭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뱀과 독사의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느껴지지만, 이것은 단 지파의 지략을 말합니다. 숨어서 기다리다가 정확한 순간에 공격하는 능력, 즉 지혜로운 전략으로 적을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 뒤에 야곱이 갑작스런 고백을 합니다. 18절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왜 이 고백이 여기에 나올까요? 단 지파가 지혜롭고 지략이 뛰어날 것이라는 말을 하다가, 야곱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 것 같습니다. 야곱 자신도 지략과 꾀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형의 발꿈치를 잡고,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사고, 아버지를 속이고. 그런데 그것이 자신을 혼돈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의 인생을 하나님은 과정과정을 통해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단 지파가 지혜롭다는 말 뒤에 이 고백을 붙인 것입니다. 인간의 지략이 아무리 탁월해도,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이것이 야곱이 평생에 걸쳐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방법을 찾아도, 진정한 복과 구원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 노력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19절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갓 지파는 위기에 몰릴 것 같지만 오히려 역전승을 거두는 역할을 합니다. 눈에 띄지 않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반격하는 지파입니다. 20절 아셀은 기름진 것을 생산하여 왕의 수라상을 차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지파들처럼 싸움을 잘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좋은 재료를 생산하여 왕의 식탁을 풍요롭게 채우는 일을 합니다. 이것도 하나님이 주신 역할입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으로 비유됩니다. 자유롭고 민첩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것처럼 그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갓, 아셀, 납달리는 유다나 요셉처럼 긴 축복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는 한 종류의 사람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눈에 띄는 역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역할을 감당할 때 공동체가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고, 그것을 통해 함께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니다. 서로를 비교하며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내게 주어진 은사를 따라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면 됩니다.
●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24절)
오늘 본문에서 요셉에게 가장 풍성한 말씀이 선포됩니다. 22절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무성한 가지는 풍요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그냥 무성한 것이 아니라 샘 곁에 있습니다. 생명의 물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무성한 것입니다. 시편1:3절 말씀처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따라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은 복입니다. 그리고 그 가지가 담을 넘었습니다. 자기 자리를 넘어 다른 곳에도 영향을 끼치는 삶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런 축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23절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도다” 이 무성함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닙니다. 형들의 미움, 노예의 삶, 억울한 감옥.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왔습니다. 그런데 24절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요셉이 굳셀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전능자이신 하나님, 반석이신 하나님, 목자이신 하나님이 요셉의 손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야곱은 전능자, 반석, 목자라는 단어를 연이어 사용합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형들에 대한 분노를 품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노예 생활에서도 성실할 수 있었던 것, 감옥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은 것.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사람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의 손을 꼭 붙잡고 고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줄 수 없는 복을 주십니다.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깊은 샘에서, 생명을 잉태하고 기르는 복까지. 전능자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복입니다.
고난은 끝이 아닙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선포한 이 축복은 고난 없이 온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과한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어떤 고난의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무성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26절 “내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리로다” 하나님의 약속은 세대를 거치면서 점점 더 구체화되고 풍성해집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 이삭을 거쳐 야곱에게 왔고, 이제 요셉에게 흘러갑니다.
27절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물어뜯는 이리. 강력한 전사의 이미지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용맹한 군사적 지파로 성장할 것이라는 선포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28절 말씀이 중요합니다.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새번역은 “그는 아들 하나하나에게 알맞게 축복하였다”입니다. 야곱은 열두 아들 모두에게 같은 복을 선포하지 않았습니다. 각자의 삶을 보고, 각자에게 맞는 복을 선포했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복은 준비된 사람에게 맞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기 전에 먼저 그 복을 담을 그릇이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받는 큰 복은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말씀 안에서 살아가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삶을 사는 것이 복의 그릇을 준비하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고백처럼, 우리의 지략과 노력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내가 먼저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볼 때 비로소 진정한 복이 옵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을 통과하는 자에게 무성한 가지의 복이 옵니다. 요셉처럼 전능자이시고 반석이시고 목자이신 하나님의 손을 꼭 붙잡고 고난의 길을 걸어갈 때, 그 고난이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