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21:1-14절/빈 배를 채워주신 예수님(26.04.07)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인 21장입니다. 20장 끝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도마의 위대한 신앙 고백과 함께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나와있습니다. 마치 결론이 내려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21장으로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복음은 그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기뻐하는 데서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한가운데로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전하는 사명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의 영광을 경험한 제자들이 앞으로 복음을 어떻게 세상에 전할 것인지, 그 사명의 중심에 누가 서게 될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3절)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얼마 후 디베랴 호수, 곧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가장 많은 활동을 했던 곳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감격은 있었지만 아직 명확한 사명을 확신하지 못했기에 당장 눈앞의 생계는 이어가기 위해 익숙한 어부의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3절 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현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3년 동안 주님을 따른다고 했지만, 그들 손에 남은 것은 텅 빈 그물과 허탈함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의 배는 어떻습니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문득 돌아보면 텅 빈 배처럼 깊은 공허함이 밀려오지 않는지요. 내 힘으로 채우려는 수고의 결과는 결국 밤이 새도록 애써도 빈 배일 뿐입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인정도, 참된 평안도, 아름다운 열매도 맺힐 수 없습니다.

빈 배를 바라보며 허탈해하는 제자들의 삶의 현장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6절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고 하십니다. 말씀에 순종했을 때, 무려 153마리의 많은 물고기가 잡히고 그물이 찢어지지 않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장면은 누가복음 5장에서 베드로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장면과 같습니다. 그 때도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빈 배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눅5:4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주님 앞에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는 베드로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불러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렇게 주님과의 아름다운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첫사랑의 감격과 은혜를 잊고 현재는 주님을 부인했던 실패를 안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잃었던 첫사랑과 은혜를 기억하고 회복하도록 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를 회복하시기 위해 세심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이 기적을 통해 가장 먼저 주님을 알아본 사람은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 사도 요한입니다. 그가 “주님이시다!” 하고 외치자, 베드로는 벗고 있던 몸에 겉옷을 두르고 지체 없이 바다로 뛰어내립니다. 육지까지의 거리가 8절 “한 오십 칸쯤”된다고 하는데 90m정도의 거리입니다. 베드로는 그 거리를 헤엄을 쳐 주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다.

● “와서 조반을 먹으라”(12절)

​육지에 올라온 베드로와 제자들을 맞이한 것은 주님께서 친히 차려놓으신 따뜻한 식탁이었습니다. 고요한 갈릴리 해변, 숯불 위에서 익어가는 생선과 떡은 밤새 추위와 허기에 지친 제자들에게 위로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여기 ‘숯불’은 베드로에게 대제사장 안나스의 뜰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뼈아픈 실패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을 것입니다(요18:18절).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떡과 생선을 나누어 주시며 그들의 텅 빈 마음과 주린 배를 온전한 사랑으로 가득 채워주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고기를 잡지 못해 ‘빈 배’를 채워주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뒷부분은 제자들의 허기신 육신의 ‘빈 배’를 채워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의 빈 배”를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런 채움으로 다른 “빈 배의 인생”을 채우라는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차려주신 아침 식탁은, 요한복음 6장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님은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떡과 물고기를 축사하시고 나눠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 자신을 요6:35절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육신의 배고픔을 넘어 영적인 허기입니다. 그 빈 배를 채워주실 분은 오직 하나,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 양 예수님뿐입니다, 영적인 갈급함에 시달리는 인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일시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라, 죄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시고 영생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양식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사명이 이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사랑과 생명으로 충만히 채움을 받고, 세상 속에서 영적 기갈에 허덕이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을 전하고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그물을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의 사명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군가의 빈 배를 채워주고 영혼을 살리는 사명은 내 의지나 수고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내가 먼저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의 은혜로 충만히 채워져야만, 지치지 않고 그 풍성함을 이웃에게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또한 기도로 첫 사랑의 은혜와 감격을 회복하고 진리의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빈 배를 채우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 온전히 거합시다, 또한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부활과 생명의 예수님을 전하는 복된 하루가 됩시다.

요한복음 20:19-31절/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6.04.06)

안식 후 첫날, 주님 부활하신 새벽 막달라 마리아와 베드로, 요한은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참된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모여 있던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예수님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두려움 가운데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절망을 평강으로 바꿔주십니다.

●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절)

​제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아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굳게 닫힌 문을 뚫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한가운데 서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도망쳤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람과 죄책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첫마디는 정죄가 아니라, 19절 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는 선포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이 말씀에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19,21,26). 치열하고 불안한 세상 속에서 진정한 평강은 내가 원한다고 노력해서 스스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평강은 주님이 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험난한 내 삶의 현장 한가운데 능력으로 함께하시며, 그 권능의 손으로 나를 굳게 붙들고 도우신다는 사실을 온전히 신뢰할 때 비로소 누리게 됩니다.

평강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특이한 행동을 하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숨을 길게 내쉬며 22절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은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흙의 먼지(원어로 ‘아파르’)로 사람의 형상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비로소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되게 하신 창조 사역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생명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성령으로 새롭게 창조하십니다. 마치 에스겔 37장에서 골짜기에 가득했던 마른 뼈들에 여호와의 생기가 들어가자 거대한 군대로 살아났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은 결코 내 지혜나 인간적인 힘으로 감당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 내 힘으로 감당할 때, 우리는 원망과 불평,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미움이 가득차게 됩니다. 반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행할 때, 비록 겉보기엔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 영혼에는 기쁨과 감사, 그리고 벅찬 감격이 넘쳐나게 됩니다. 만약 주님의 일을 하면서 마음속에 기쁨 대신 불평이 피어오른다면, 그것은 곧 내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다는 영적 신호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성령 충만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만 합니다.

●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주님이 찾아오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는, 예수님의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직접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다시 찾아오사, 도마에게 친히 그 거룩한 상처를 보여주시며 27절 하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십자가의 흔적을 통해 부활의 주님을 만난 도마는 가장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28절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는 부르지만,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이 고백은 태초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혼돈하고 어두웠던 세상을 새롭게 질서로 채우셨던 것처럼,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혼란스럽고 어두운 인생을 생명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도마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29절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은 곧 승천하십니다. 그렇다면 다가올 시대의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은 눈으로 보지 않고도 온전히 신뢰하는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보지 않고 믿을 수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여전히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신비로운 환상, 혹은 귀에 들리는 직접적인 음성을 보여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행하신 그 수많은 표적 중 오직 이 내용들만 선별되어 기록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바로 31절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눈에 보이는 표적이나 체험에 의존하는 신앙이 아니라, 영원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발견하고 부활의 능력을 확신하는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가장 견고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제자들처럼 급변하는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미래에 대한 근심 때문에 마음의 문을 꽁꽁 닫고 두려움 가운데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부활하사 우리 가운데 임하신 생명의 주님을 온전히 바라봅시다.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위로하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합시다. 기록된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삶 속에서 이루어가는 복된 삶이 됩시다.

요한복음19:28-30절/내가 목마르다(26.04.03)

●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28절)

​인간의 본성은 가장 힘들고 절망적인 위기의 순간에 그 밑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생명이 끊어지는 십자가의 가장 극한 고통 속에서도 원망이나 저주가 아닌, 당신의 본성과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명확히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과 복음서 전체에 기록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의 말씀(가상칠언)’을 통해 우리를 향한 십자가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묵상해 봅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기록하며 28절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강조합니다(19:24,18:32,9).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약에 예언된 오실 메시아의 고난을 온전히 성취하기 위해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목마른 예수님의 입에 적셔준 신 포도주가 ‘우슬초’에 매여 있었다는 사실조차도, 예수님께서 출애굽기의 유월절 어린양으로 이 땅에 오셨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말씀의 성취입니다(출12:22절).

●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가상칠언)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마디의 말씀은 그분이 왜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① 눅23: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 상 첫마디는 용서와 사랑에 관한 내용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인들을 사랑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끝까지 변함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② 눅23: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 십자가 좌우편에는 강도들이 달렸는데, 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원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선행으로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은혜로 얻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강도처럼 구원받고 싶다고 말합니다. 세상에서 즐기며 살다 죽음 전에 믿겠다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말입니다. 죽음 전에 그런 은혜가 주어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어 주인삼고 살아가는 삶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③ 요19:26-27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어제 살펴보았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새로운 공동체가 탄생합니다. 혈연을 뛰어넘어 십자가의 사랑으로 맺어지는 새로운 영적 가족, 교회 공동체입니다.

④ 마27:46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두려워하셨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피하려 하셨습니다. 그것은 육신의 고통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바로 이 절규처럼 아버지 하나님과의 단절에 대한 두려움, 고통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절대 분리될 수 없는 분이신데,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예수님이 받으시고 분리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분리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은혜를 누립니다.

⑤ 요19:28절 “내가 목마르다”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은 목마름을 느끼셨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영적 목마름을 가진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며,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해주셨음을 알게 합니다.

⑥ 요19:30절 “다 이루었다” 위대한 선언입니다.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서 죽음은 누가봐도 실패요 억울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목적을 완벽하게 성취하셨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그동안 이 땅과 사람들들 지배하고 있던 사탄의 권세에 대한 승리의 선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우리는 이미 승리자입니다.

⑦ 눅 23:46절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셨습니다. 오신 목적 성취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십니다.

● “내가 목마르다”(28절)

​이 일곱 가지 말씀 중,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내가 목마르다”는 말씀은 역설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던 분입니다. 영원한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께서 왜 십자가 위에서 그토록 타는 듯한 갈증을 겪으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끊임없이 세상의 것을 갈구하며 영적인 목마름에 허덕이는 우리의 모든 절망을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극심한 목마름을 대신 당하셨기에, 비로소 우리는 해갈을 얻고 참된 영적 만족과 영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으며, 내 영혼의 갈증을 채우기 위해 어떤 것들을 붙잡고 있습니까? 세상 것들로 갈증을 채우려는 시도는 마치 목마를 때 소금물을 마시는 것과 같아서, 결국 더 큰 갈증과 죽음으로 우리를 몰아갈 뿐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해갈은 오직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우리 심령을 다른 헛된 것들로 채우지 않고 오직 예수님으로, 예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실패와 문제를 짊어지시고 “다 이루었다” 선언하신 예수님을 굳게 붙잡는 하루가 됩시다. 우리의 승리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달려 있습니다. 나의 모든 갈증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참된 생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하게 채워지기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19:17-27절/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26.04.02)

●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18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는 장면을 아주 현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들을 보면 잔인합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끔찍한 고통의 과정이 너무나 생생해서 보는 내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본문은 그토록 고통스러운 십자가 처형의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 담담하게 23절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라고만 기록할 뿐입니다. 저자인 요한은 우리가 단순히 감정적으로 십자가에 반응하기보다는, 말씀을 통해 십자가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신지에 초점 맞추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중요한 표현이 하나 등장합니다.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입니다. 사실 이 십자가는 종교 지도자들이 강제로 지운 것이고 빌라도가 허락한 사형 틀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셨다고 표현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십자가를 끌고 가신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이고 목적이었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능동적이고 자발적으로, 그리고 당당하게 그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주님을 따르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도전을 줍니다. 주님을 믿고 구원받은 우리 역시 각자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가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복음을 위해 기꺼이 헌신하며 ‘복음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총독 빌라도는 그 위에 명패를 써서 붙였습니다. 히브리어와 로마어, 그리고 헬라어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적었습니다. 지나가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이것을 보고 놀라 빌라도에게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고쳐 쓰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진짜 왕으로 믿어서 그렇게 쓴 것은 아니었겠지만, 요한은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참으로 만왕의 왕이시며, 이 땅에 왕으로 오신 분이심을 성경이 증명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세 언어로 기록되었다는 것은 온 세상이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경배해야 함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23-24절에는 십자가 아래에서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의 겉옷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가지고, 통으로 짠 속옷은 찢지 않으려고 제비를 뽑아 나누어 가지는 참담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잔인한 행동조차 사실은 예수님이 오시기 한참 전, 다윗 왕이 기록한 구약 시편 22:18절의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라는 예언이 정확히 성취된 사건이었음을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바로 그 메시아이심을 틀림없이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겉옷과 속옷을 모두 빼앗기시고 벌거벗은 채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것은 끔찍한 수치였습니다. 무죄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토록 비참하게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 모든 죄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다 짊어지시고 덮어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 덕분에 우리는 죄의 수치를 씻고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26절)

이제 주님의 시선은 십자가 곁에서 눈물 흘리고 있는 여인들과,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을 향합니다.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은 찢어지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십니다. 26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요한에게도 당부하십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 예수님은 왜 갑자기 요한을 향해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선언하셨을까요? 만약 단순히 홀로 남으실 어머니의 부양이 걱정되셨다면 “요한아, 우리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라고 하시면 충분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영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통해, 육신의 혈육 관계를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영적 가족’인 교회 공동체가 탄생했음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보혈 안에서 이제 마리아의 아들이 요한이 되고, 요한의 어머니가 마리아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피를 나눈 혈연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이 땅의 육신적인 혈연관계는 우리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 결국 다 끊어지고 마는 유한한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맺어진 영적인 가족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관계입니다.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는 주님의 피로 맺어진 진정한 ‘영적인 가족’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를 더욱 사랑하고, 기꺼이 섬기며, 약한 자를 따뜻하게 세워주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인 순종으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의 모든 수치를 온몸으로 담당하셨으며, 우리에게 ‘영적 가족’이라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 역시 각자에게 주어진 복음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짊어지고 생명의 길을 묵묵히 따라갑시다. 또한 주님께서 십자가 아래에서 영원한 가족으로 묶어주신 우리 지체들을 한 번 더 돌아보고 사랑으로 섬겨주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요한복음18:39-19:16절/죄를 찾지 못하였노라(26.04.01)

●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40절)

​평소에는 좋아 보이던 관계도,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위기가 닥치면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진짜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봅니다. 특히 자기 뜻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거나, 움켜쥔 것을 빼앗길 위기에 처하면 참지 못하고 큰 소리를 지르곤 합니다. 이유는, 결국 그 마음 깊은 곳에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강한 욕망과 이기적인 본성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기적인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무섭게 소리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과, 세상의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 타협하는 빌라도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롱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룹니다.

유대인들의 압박 속에 예수님을 심문해 본 빌라도는 38절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고합니다. 그러면 풀어주면 되는데 종교 지도자들의 반반을 생각해서 하나의 방법을 찾아냅니다. 당시 큰 명절인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한 명을 특별 사면하는 전례가 있었기에 39절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라고 제안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비교 대상으로 ‘바라바’라는 흉악한 죄수를 내세웠습니다. 바라바를 ‘강도’라고 하는데 의미가 로마 제국에 대항해 무력 폭동을 일으켰던 테러리스트에 가까운 위험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기다리고 있는 인물입니다. 빌라도는 당연히 흉악범 바라바보다는 죄 없는 예수님을 풀어달라고 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이것이 상식적인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반응은 빌라도의 예상을 빗나갔습니다. 그들은 무죄하신 예수님 대신, 흉악범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아마 바라바보다 더 흉악한 죄인이 등장해도 그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제거해야 한다는 분노가 강했기에, 진리나 정의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예상치 못한 군중의 반응에 당황한 빌라도는 이제 예수님을 데려다가 잔인하게 채찍질을 가합니다. 당시 로마의 채찍은 끝에 동물의 뼛조각이나 쇠붙이가 달려 있어,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무서운 형벌 도구였습니다.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님의 머리에 푹 씌우고, 왕을 상징하는 자색 옷을 입힌 뒤 3절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며 손으로 때리고 조롱했습니다.

빌라도는 이토록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이런 비참하고 초라한 자가 어떻게 너희를 위협할 왕이겠느냐”라며 군중을 만족시키고 풀어주려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과 아랫사람들의 본심이 드디어 폭발합니다. 그들은 더 큰 목소리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들은 왜 대화나 타협도 없이 이렇게까지 맹렬히 소리를 질렀을까요? 바로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발했고, 이 말을 들은 빌라도는 더욱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빌라도의 아내가 꿈에 예수님 때문에 애를 태웠으니 그 옳은 사람에게 상관하지 말라고 경고했기에 빌라도는 두려움을 느낍니다(마27:19절).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은 주저하는 빌라도의 가장 치명적인 정치적 약점을 찌릅니다. 12절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닙니다!”라며 로마 황제에게 총독을 반역자에게 동조한 자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해 15절 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왕으로 섬겨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을 채워주는 세상의 권력을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비극적인 장면입니다.

●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11절)

​예수님의 침묵에 답답함을 느낀 빌라도는 10절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생사가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겁니다. 맞는 말 같지만 아닙니다. 예수님은 11절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라고 하시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고백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할 것을 아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감당하시기 위해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순종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본문 14절은 이날이 “유월절 준비일”임을 명확히 밝혀줍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구원받기 위해 유월절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던 바로 그날에, 예수님은 친히 ‘흠 없는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의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주님은 수치와 조롱을 피하실 무한한 능력이 있으셨지만,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아무런 저항 없이 십자가의 길을 잠잠히 걸어가셨습니다. 인간의 악한 계획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이처럼 위대하게 성취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 앞에 우리를 돌아봅니다. 생명이 없는 종교, 예수님이 빠진 신앙의 끝은 결국 자기 욕심을 이루려고 소리치게 됩니다. 또한 빌라도처럼 진실 앞에서도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 자신이 왕이 되어 살아가려는 교만과 욕망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내 인생의 유일한 왕으로 모시고, 때로는 억울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사랑과 용서의 방식을 선택하는 삶이 됩시다. 우리를 위해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주신 주님의 그 크신 십자가 사랑을 가슴에 깊이 품고, 오늘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생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시다.

요한복음18:28-38절/진리가 무엇이냐(26.03.31)

●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28절)

​어제 본문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 앞에서 당당하게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붙잡히신 예수님은 먼저 실세인 안나스에게로 가셨고, 다음으로는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에게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손을 떠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로마 제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서게 되십니다.

그런데 28절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처형하기 위해 새벽부터 로마 총독의 지휘 본부인 ‘관정’으로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정해서는 안되기에 이방인이 머무는 로마 관정에는 들어가지 않습니다. 무서운 모순입니다. 겉으로는 율법의 의식과 정결 규례는 철저하게 지키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유월절의 완성이신 어린양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불법적으로 제거하려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신앙의 참된 본질인 생명과 사랑, 공의는 철저히 내다 버린 채, 종교적인 형식과 의식에만 집착하는 타락한 종교인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혹시 우리도 겉모양은 그럴듯하게 갖추고 있지만, 내 삶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 이웃을 미워하고 십자가의 진리를 가볍게 여기는 ‘껍데기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뼈아프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이들의 문제가 종교적인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31절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죄인을 죽일 수 없다는 말이 아니라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달아 죽게 할 권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즉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종교범이 아닌 정치범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길 원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신21:23절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에 비추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식게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의 음모를 모든 사람의 저주를 대신 짊어지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계획이 성취되는 사건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절)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33절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이 죄목으로 유대인들이 고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35절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라고 하면서 “네 나라”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부분에 대해 분명하게 대답하십니다. 36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예수님은 이 땅의 나라가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이 세상 나라의 특징을 이야기하시는데 ‘싸워’입니다. 세상 나라는 로마 제국처럼 힘과 무력으로 지배하는 나라입니다. 미움과 경쟁의 나라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세상 나라 방식으로 이들과 싸우신다면 이들은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속한 하나님 나라는 세상과 다른 의와 평강의 나라입니다. 사랑과 용서의 나라입니다. 나의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살리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진정한 소속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 두 나라의 싸움이 치열합니다. 세상이 자기 이익을 위해 시기하며 싸우고 칼을 휘두를 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사랑으로 평화와 하나됨을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빌라도는 37절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당당히 선언하시며,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밝히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야기하시면서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진리에 대해 증언하러 오셨고, 진리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생명의 길입니다. 지금 빌라도는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빌라도는 38절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묻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진지한 질문이 아닙니다. 회의주의자들의 비웃는 듯한 질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질문만 하고 예수님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도 돌아서버립니다. 그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죄도 찾지 못했지만(38절), 자신의 정치적 안위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진리이신 예수님을 철저히 외면하고 결국 불의한 군중과 타협하는 길을 택하고 맙니다. 진리를 눈앞에 두고도 깨닫지 못하는 영적 소경의 뼈아픈 비극입니다.

신앙의 형식에 치우쳐 가장 중요한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다른 일에 집중해서 예수님을 외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속이려 들지만,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오늘 하루도 세상의 경쟁과 이기심에 동화되지 말고, 성령께서 부어주시는 힘과 능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겨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