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7 | 매일성경
●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9절)
죽음을 앞둔 야곱의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육신이 노쇠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야곱의 영적인 눈은 오히려 더 밝았습니다. 손을 엇바꾸어 축복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고백하고, 죽음 뒤에도 이루어질 약속을 확신합니다.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영적으로는 가장 선명했던 야곱의 고백이 오늘 본문입니다.
축복을 받게 하기 위해 요셉이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야곱 앞에 왔습니다. 야곱이 묻습니다. “이들은 누구냐” 요셉의 대답이 눈에 띕니다. 9절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내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므낫세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내 고통을 잊게 하셨다”는 뜻이고, 에브라임은 “하나님이 나를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두 아들의 이름 자체가 하나님에 대한 고백입니다. 요셉은 자녀를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내 것인 것처럼 함부로 대해서도 안 되고, 하나님보다 자녀를 우상처럼 섬겨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이 맡겨주신 존재로 바라볼 때, 부모의 역할도 달라집니다.
야곱은 11절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네 자손까지 내게 보이셨도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의 얼굴을 보고, 그 아들의 아들들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한 것보다 더 놀랍게,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드디어 야곱이 두 아들을 축복합니다. 요셉은 이스라엘의 오른손이 장자 므낫세의 머리에, 왼손이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닿도록 아들들을 배치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보면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을 상징하는 손이었고, 반드시 장자의 머리 위에 놓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14절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야곱이 손을 바꾼 것입니다.
요셉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17절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혹시 눈이 안 보이는 아버지가 실수하신 게 아닐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19절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이것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영적으로 분명하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말했습니다.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창세기를 읽다 보면 이 패턴이 반복됩니다. 이스마엘보다 이삭, 에서보다 야곱, 르우벤보다 요셉, 므낫세보다 에브라임. 하나님은 세상의 순서를 따르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 뛰어나고 강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부르실 때도 세상적으로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 연약한 열두 사람을 통해 시작된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입니다. 우리의 뛰어남이 아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중요합니다.
●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15절)
축복 기도 중에 야곱이 고백합니다. 15-16절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세 가지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 대대로 함께하신 하나님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이제 야곱의 하나님이 되었고, 그 하나님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하나님이 되어달라는 간구입니다. 신앙은 세대를 거쳐 전해집니다.
둘째, 출생부터 지금까지 기르신 하나님입니다. 야곱은 험악한 세월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돌아보니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목자가 되어 인도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힘으로 살아온 것 같았지만, 하나님이 이끌어 오셨습니다.
셋째,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하나님입니다. 야곱의 인생에는 환란이 많았습니다. 형에게 쫓기고, 외삼촌에게 속이고, 딸이 성폭행당하고, 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 환란을 억울함으로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그 환란에서 건져주셨고,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입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이 환란에서 건져주신다”는 시각으로 바라볼 때,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진다고 확신할 때 고난이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과정이 됩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마지막 말을 남깁니다. 21절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리라” 놀라운 고백입니다. 야곱은 한때 눈에 보이는 축복을 얻기 위해 힘썼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을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성숙시키십니다.
지금 야곱은 애굽 땅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백성의 숫자도 아직 작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확신합니다.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가 죽는다 해도 하나님의 약속은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 후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목자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출생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인생도 하나님이 이끌어 오셨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과정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었습니다. 오늘도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보이지 않아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야곱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확신 위에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2026.05.26 | 매일성경
●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29절)
야곱이 애굽에 온 것은 130세였습니다. 그동안 죽었다고 생각했던 요셉을 만났고, 고센 땅에서 가족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17년이 흘렀습니다. 이제 야곱의 나이 147세,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야곱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도망쳤고, 외삼촌에게 속임당하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먼저 떠나보냈고, 아들 요셉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애굽 땅에서 보낸 마지막 17년은 달랐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을 만났고, 고센 땅에서 가족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야곱이 마지막을 준비하는 장면입니다.
27절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어제 말씀과 대조해보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애굽 백성들은 기근 속에 모든 것을 잃고 바로의 종이 되었습니다. 특권층인 제사장들만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가족은 고센 땅에서 생업을 얻고 생육하고 번성합니다. 총리인 요셉의 배려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민족을 이루게 하시려고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시고, 총리가 되게 하시고, 야곱 가족이 고센 땅에 오게 하신 모든 과정을 통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기근으로 황폐할 때 하나님의 약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부릅니다. 죽음을 앞두고 유언을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자녀들에게 유언을 남긴다면 어떤 내용일까요? 분명 가장 중요한 내용일 것입니다. 29-30절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실에 장사하라”
야곱이 원한 것은 단 하나, 애굽 땅이 아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묻히는 것이었습니다. 허벅지 아래 손을 넣는 것은 고대 근동에서 가장 엄중한 맹세의 방식이었습니다. 죽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을 의미했습니다. 요셉이 30절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라고 했는데도 야곱은 31절에서 다시 “내게 맹세하라”고 합니다. 그만큼 중요한 부탁입니다.
왜 그토록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을까요? 야곱에게 애굽은 이 세상이었습니다. 비록 풍요롭고 문명이 발달한 곳이지만,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고향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이 가야할 본향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입니다. 비록 지금은 그곳에 없지만, 죽어서라도 그 약속의 땅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자기 몸이 묻힌 곳이 어디인지를 통해 자손들에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이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곳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사람으로 살고 죽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도 화려하고 풍요로운 세상 속에 살지만 이 땅이 전부가 아니요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이 비록 몸은 애굽에 있지만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을 품고 살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돌아갈 본향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임을 항상 소망하며 하나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5절)
48장에서 야곱은 더욱 쇠약해졌습니다. 요셉이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왔습니다. 그 야곱이 죽음 직전에 꺼낸 이야기는 세상에서 이룬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3-4절 “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사 복을 주시며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를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소유가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루스, 곧 벧엘이었습니다. 형을 피해 도망치던 야곱이 돌을 베개 삼아 잠들었다가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자리.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하셨던 그 약속. 험악한 세월을 살아오면서도 놓지 않았던 그 약속. 야곱은 죽음 앞에서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는지가 우리가 무엇을 붙잡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야곱은 한때 세상의 축복을 갈망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선 야곱이 기억한 것은 벧엘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비록 험악한 세월을 살았지만 야곱의 인생 전체를 이끌어오셨고, 이제 세상의 축복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믿음의 조상으로 만드셨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특이한 말을 합니다. 5절 “네가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 될 것이라” 요셉의 두 아들을 야곱이 자기 아들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을 ‘장자’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장자는 두 배의 몫을 받습니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 아들로 받아들임으로써, 요셉은 한 몫이 아닌 두 몫을 받게 됩니다. 실제로 후에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각각 땅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주어지지만, 앞으로 만들어질 이스라엘 민족의 왕권과 메시아가 오는 조상은 유다가 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우리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에 묻히기를 원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이 아무리 풍요로워도 그곳이 우리의 최종 고향이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입니다. 야곱의 험악한 세월이 그를 오늘의 야곱으로 만들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려움도 하나님이 우리를 빚어가시는 과정입니다. 죽음 앞에서 벧엘의 약속을 기억한 야곱처럼, 우리도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마음에 품고 살아갑시다.
2026.05.25 | 매일성경
●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13절)
오늘 본문은 좀 특이합니다. 야곱 가족의 애굽 이주 이야기가 흘러가다가 갑자기 애굽 백성들이 양식을 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앞뒤 이야기를 연결해보면 오늘 본문이 없어도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왜 이 이야기를 여기에 넣었을까 궁금합니다.
13절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흉년 7년 중 이미 2년이 지났고 앞으로 5년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 5년 동안 애굽에서 일어난 일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먼저 돈을 가지고 와서 양식을 샀습니다. 그런데 기근은 계속됐습니다. 이제 돈이 없습니다. 그러나 먹어야 삽니다.
요셉이 말했습니다. 16절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없으면 가축으로 받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가져왔고, 요셉은 그 대가로 양식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기근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가축도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다시 요셉에게 왔습니다. 18절 “우리에게는 우리의 몸과 우리 토지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제안했습니다. 19절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이다” 요셉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20절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토지가 바로의 소유가 되었고, 백성들은 바로의 종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불편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던 지혜롭고 선한 요셉이 백성들의 돈을 거두고, 가축을 거두고, 토지를 거두고, 결국 사람들을 종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극심한 기근이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무질서한 죽음을 막기 위한 통제 시스템을 요셉이 구축한 것으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셉은 지금 자신이 왕이 아닙니다. 애굽이라는 나라 속에서 총리로서의 직무를 감당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룰 야곱의 가정을 잘 보존하는 사명이 주어졌고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25절에서 백성들은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살리셨사오니 우리가 주께 은혜를 입고 바로의 종이 되겠나이다” 착취당했다는 분노가 아니라, 살았다는 감사가 담겨 있습니다. 요셉이 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의 생명을 구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요셉이 정한 제도를 보면 24절 “추수의 오분의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오분의 사는 너희가 가져가서 너희의 종자도 삼고” 그 당시 어떤 나라는 수확의 삼분의 일을 세금으로 거두기도 했습니다. 극심한 기근 상황에서 오분의 일만 내도록 한 것은 오히려 관대한 제도였습니다. 이처럼 요셉은 위기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20절)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애굽 땅과 가나안 땅”(13,14,15). 저자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가나안 땅도 이 기근의 상황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야곱의 가족이 가나안 땅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애굽 백성들처럼 먹을 것이 없어 황폐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의 가족은 고센 땅에 있습니다. 내일 본문인 27에는 이렇게 기록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세상이 기근으로 신음하는 그 시간에 이스라엘은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를 22절, 26절은 갑작스런 제사장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려줍니다. 애굽의 제사장들은 바로에게 녹을 받기 때문에 토지를 팔지 않았고, 따라서 바로의 소유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의 권력이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제사장조차 바로의 녹을 먹으며 바로에게 충성하는 구조였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제사장들과 같은 특권층들만 토지를 유지할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이상의 특권과 안전을 고센땅에서 누렸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기근이라는 위기 속에서도 자기 백성을 가장 안전하고 풍요롭게 보호해주십니다.
한편 모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게 될 환경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센 땅에서 번성하겠지만, 이런 절대 권력 아래 살다 보면 언젠가 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실제로 출애굽기를 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의 노예가 되어 고통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씨앗을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세상 나라의 특징입니다. 먹고 살게 해주겠다고 하면서 결국 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돈을 주고 양식을 삽니다. 그러다 돈이 떨어지면 가축을 내주고, 가축이 떨어지면 토지를 내주고, 결국 자기 자신을 종으로 내어줍니다. 세상이 주는 풍요 속에서 정작 자유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제공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돈의 종, 성공의 종, 남의 시선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들을 하나씩 내어주면서 자유를 잃어가는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빼앗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입니다. 풍요로 우리를 종으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영적 자유와 생명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드시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나라와 다른 나라, 착취하고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고 나누는 나라를 만드시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 나라의 본질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풍요를 약속하지만 그 안에는 종으로 만드는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살면서도 무엇이 우리를 종으로 만들고 있는지 깨어 분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이 착취하고 군림할 때, 우리는 섬기고 나누는 삶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머무는 곳마다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2026.05.22 | 매일성경
●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18절)
요셉이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형제들과 화해하는 장면이 바로의 궁중에까지 알려졌습니다. 바로와 신하들이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이 어떻게 야곱에게까지 전해지고, 야곱의 인생에 가장 큰 반전이 어떻게 일어나는지가 오늘 이야기입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명령했습니다. 18절 “너희 아버지와 너희 가족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의 좋은 땅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 19절 “애굽 땅에서 수레를 가져다가 너희 자녀와 아내를 태우고 너희 아버지를 모셔 오라” 어제는 요셉이 애굽 땅으로 오라고 권면했다면 오늘은 최고 권력자인 바로가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합니다. 당시 수레는 애굽의 최고 이동 수단으로 왕실 권위의 상징이었고 최첨단 기술의 결정체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바로의 의전 차량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그것을 내어줍니다. 가나안 땅의 살림들도 미련 두지 말고 버려두고 오라고 합니다. 애굽 땅의 좋은 것을 모두 주겠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저자가 이 장면을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요셉의 성공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 야곱에게 약속하신 민족의 형성이 지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바로 왕을 움직이셨습니다. 바로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셨고, 그 과정에서 요셉을 총리로 세우시며, 이제는 세계 최강국의 왕이 야곱의 가족을 위해 최고의 혜택을 베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세상의 가장 강한 권력도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눈에 띄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요셉의 기쁜 소식을 듣고 함께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이 아닙니다. 히브리인 노예 출신입니다. 그런데도 바로의 신하들이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요셉이 총리의 자리에서 자기 유익을 추구하지 않고 나라를 살리는 일에 헌신했기 때문입니다. 7년 흉년을 대비해 수많은 생명을 구한 요셉, 그의 헌신을 신하들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의 기쁜 소식이 자신들의 기쁨이 된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기쁨이 내 기쁨이 되기보다 시기와 질투가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믿지 않는 애굽 사람들조차 요셉의 기쁨을 함께 기뻐했습니다. 누군가의 기쁨을 진심으로 기뻐해 줄 수 있는 것,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아파해 줄 수 있는 것. 이것이 진정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어 요셉은 형들에게 수레와 길 양식을 주었고, 각기 옷 한 벌씩을 주고, 베냐민에게는 은 삼백과 옷 다섯 벌을 줍니다. 요셉의 이야기에서 옷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채색옷을 입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소년, 형들에게 그 옷이 벗겨지고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 채색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아버지를 속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요셉이 형들에게 옷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형들은 이 옷을 받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요셉의 채색옷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 옷 하나 때문에 시기하고 미워했던 자신들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요셉이 자신들에게 옷을 나눠주고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용서했습니다. 과거의 그 일로 당신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베냐민에게는 은 300과 옷 다섯벌을 주지만 이제 형들은 비교하거나 시기하지 않습니다.
●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28절)
형들을 돌려보내며 요셉이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24절 “당신들은 길에서 다투지 마십시오” 이제 22년 전의 범죄가 아버지에게 알려질 것입니다. 형들은 가는 길에 그 이야기를 어떻게 꺼낼지 고민할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 누가 더 나빴는지 따지다 보면 다툼이 벌어집니다. 요셉이 그것을 미리 차단했습니다. 지난 일에 대해 책임 공방하지 마십시오. 끝난 일은 끝난 일로 두고,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 삶에서도 이런 장면이 많습니다. 가정에서, 공동체에서 오래된 일을 다시 꺼내며 싸우는 경우가 있습니다. 누가 잘했고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다 보면 상처만 더 커집니다. 요셉의 말이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지난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앞으로 함께 걸어갈 방향을 찾는 것이 지혜입니다.
형들이 가나안에 도착해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26절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나이다” 야곱이 어리둥절했습니다. ‘어리둥절하다’의 의미가 “마음이 무감각하다, 기절하다”입니다. 22년 동안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 그것도 애굽의 총리가 됐다는 것.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수레를 보았습니다. 수레가 요셉이 애굽에 있다는 것과 높은 지위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증거가 되었습니다.
28절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야곱의 고백이 우리 마음을 울립니다. “족하도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것 하나로 충분합니다. 22년 동안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끝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오셨습니다.
여기서 저자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른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21,28). 오늘 본문에서 야곱과 이스라엘이 번갈아 등장합니다. 이것은 야곱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어 가는 이야기임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함께 기뻐하는 공동체입니다. 바로의 신하들이 요셉의 기쁨을 함께 기뻐했듯, 우리도 서로의 기쁨을 함께 기뻐하고 서로의 슬픔을 함께 아파하는 공동체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은 끝났다고 생각해도 하나님은 끝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이 22년 동안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 일이 오늘 회복되었습니다. 우리가 포기한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2026.05.21 | 매일성경
● “나는 요셉이라”(3절)
22년 전과 동일한 상황에서 유다는 동생을 외면하고 팔아넘기는 자가 아니라 동생 베냐민을 대신해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막내를 살리기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모습입니다. 형제들의 모습이 과거와 달라졌습니다. 이제 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낼 시간이 되었습니다. 유다의 이야기를 들은 요셉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합니다. 1절 “요셉이 시종하는 자들 앞에서 그 정을 억제하지 못하여” 요셉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물러가게 합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을 부정하게 생각하는 애굽사람들의 오해를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형제들과의 이 만남을 오직 가족만의 자리로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애굽의 총리라는 신분보다, 한 가정의 아들로서 형들을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2절 “요셉이 큰 소리로 울었으니” 그동안 참고 있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옵니다. 기쁨과 슬픔이 섞인 눈물이었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애굽 사람들에게 들리고 바로의 궁중에까지 들릴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을 밝힙니다. 3절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요셉이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권력도, 원망도 아닌 ‘아버지’였습니다. 자신을 사랑해주었던 아버지, 그런 아들을 잃어다고 생각하고 그동안 슬퍼하셨을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그러나 형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놀람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들이 팔아버린 동생이 지금 애굽의 총리로 서 있기 때문입니다. 형들 입장에서는 심판을 예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요셉이 형들을 안심시킵니다. 4절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리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요셉은 과거의 죄를 덮지 않습니다. 사실을 정확히 짚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입니다.
5절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이어지는 말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팔았지만, 하나님은 나를 보내셨습니다.” 몇 차례 반복해서 강조합니다(5,7,8절). 요셉은 “당신들이”를 “하나님이”로, “팔았다”를 “보내셨다”라고 말합니다. 같은 사건이지만 해석이 완전히 다릅니다. 사람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해석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다른 해석이 다른 삶을 만들어 냈습니다.
6-7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흉년이 계속될 것이고, 하나님이 이 가족과 후손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먼저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중심의 해석이 어느날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닙니다. 고난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며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서서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셨던 이스라엘 민족(후손)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8절 “나를 이리로 보내신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요셉의 시선은 완전히 하나님께 향해 있습니다.
●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8절)
본문에서 반복되는 핵심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고백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인생을 사람의 행동으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으로 해석합니다. 만약 요셉이 “형들이 나를 팔았다”는 것에 머물렀다면, 오랜 시간 동안 그는 형들을 원망하고 복수의 기회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다”고 해석했기 때문에, 그는 용서할 수 있었고 사명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문제 자체보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에도 고난과 갈등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쉽게 “누구 때문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과 싸우게 됩니다. 환경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선을 바꾸어 “하나님이 왜 이 일을 허락하셨을까”라고 묻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게 됩니다. 고난은 피할 수 없지만, 해석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할 때 삶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고난의 뒤편에 있는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보게 됩니다.
요셉은 이 해석 속에서 사명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9절 이후에는 형들에게 구체적인 계획을 말합니다. “아버지를 애굽으로 모셔오라”, “남은 흉년 동안 자신이 책임지겠다”, “가족들이 머물 곳까지 준비했다” 10절에서 말하는 고센 땅은 이스라엘이 번성할 터전이 됩니다. 요셉은 복수를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을 살릴 준비를 했습니다. 하나님으로 해석한 사람의 삶은 이렇게 달라집니다.
마지막 장면은 눈물의 화해입니다. 14절 요셉이 베냐민을 안고 웁니다. 형들과 입맞추며 웁니다. 그제서야 형들이 요셉과 말을 합니다. 두려움이 사라지고,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해석이 결국 용서와 화해를 만들어 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첫째, 해석의 변화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사람에게 두지 않고 하나님께 두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해 무엇을 하시려는가”를 묻는 삶입니다.
둘째, 용서와 화해입니다. 요셉은 상처에 머물지 않고 용서했습니다. 그리고 가족을 살리는 사람으로 섰습니다. 우리도 상처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해석하며, 용서하고 섬기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종종 형들의 자리에 서기도 하고, 요셉의 자리에 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자리에서든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믿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2026.05.20 | 매일성경
●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18절)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형제들에게는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베냐민만 종으로 남기고 열 명은 자유롭게 돌아가면 됩니다. 과거라면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요셉도 팔아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다시 요셉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창세기에서 한 사람의 말로는 가장 긴 고백이 시작됩니다.
18절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당신의 종에게 내 주의 귀에 한 말씀을 아뢰게 하소서” 범죄 사실이 명백한 상황에서 죄인이 총리 앞에 나아가 말을 꺼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유다가 앞장섰습니다. 이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전에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한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형제들은 그 말에 청종했습니다.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문제를 해결하러 앞에 나섭니다. 이것이 변화입니다.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성숙한 어른의 모습으로 성장했습니다.
유다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처음부터 차분하게 설명합니다. 핵심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이 모든 일의 시작이 요셉의 질문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19절에서 시작하는 유다의 설명은 “주께서”라는 단어를 반복합니다. 19절, 21절, 23절에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당신이 아버지가 있느냐, 아우가 있느냐 물었고, 우리는 사실대로 답했으며, 그러자 당신이 막내를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유다는 핑계를 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상황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설명하면서, 그 모든 과정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막내를 잃으면 아버지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27-29절에서 유다는 아버지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짐승에게 찢겨 죽었고 이 아이 하나만 남았습니다. 이 아이마저 사라진다면 흰머리가 슬픔으로 스올에 내려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30절 “아버지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하나로 묶여 있거늘” 야곱에게 베냐민은 삶의 이유였습니다. 베냐민이 없으면 아버지는 살지 못한다는 것을 유다는 알았습니다.
셋째, 가장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유다 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해서 ‘담보’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32절 “주의 종이 내 아버지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다가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유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채색 옷에 짐승의 피를 묻혀 아버지에게 가져갔습니다. 요셉이 죽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찢어지는 고통을 당했을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감정, 자기 시기와 미움에만 집중했습니다. 그것이 문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유다는 다릅니다. 아버지의 아픔을 헤아립니다. 막내가 사라지면 아버지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찢어진 요셉의 채색옷을 보았을 때 아버지의 마음이 찢어졌을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압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내 생각만 하는 어린아이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어른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33절)
33절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유다가 베냐민을 대신해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죄는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책임질 사람은 베냐민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나서서 내가 대신 종이 되겠다고 합니다. 베냐민이 짊어져야 할 것을 자신이 대신 짊어지겠다는 것입니다.
34절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이 말에서 유다의 간절함이 드러납니다. 베냐민 없이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아버지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유다의 이 고백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봅니다. 베냐민이 짊어져야 할 죄의 짐을 유다가 대신 짊어지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신 예수님이 하신 일의 그림자입니다. 우리는 베냐민의 자리에 있습니다. 죄의 증거가 발견된 사람들입니다.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다가 요셉을 노예로 팔던 일에서 베냐민을 노예에서 건지는 일로 바뀌었듯이, 죄인이었던 우리가 은혜를 입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존재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성숙의 모습입니다. 유다는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자기 생각만 하던 사람에서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우리도 내 입장만이 아니라 상대방의 마음을 헤아리는 사람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감사입니다. 우리는 베냐민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죄의 짐을 짊어진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 대신 담보가 되어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오늘 다시 기억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