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7 | 매일성경
●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1절)
사사기는 21장까지 있는데, 19-21장까지가 마지막 사건입니다. 지금까지도 사사 시대가 이렇게 어둡고 혼란스러웠나 싶었지만, 19장부터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비극적이고 슬픈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의 시작입니다. 겉으로는 한 가정의 평범한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이미 무너져버린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 때에” 사사기는 이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합니다. 왕이 없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왕이신데 내가 왕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다 보니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사사기에서 모든 문제의 출발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회복의 출발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거류하는 어떤 레위 사람이 등장합니다. 17,18장 이야기도 에브라임 산지에서 일어났고, 그 중심에 떠도는 레위인이 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준다는 미가의 집에서 제사장 노릇을 하다가 더 나은 자리를 준다는 단 지파를 따라간 사람입니다. 그 레위 청년은 유다 베들레헴 출신이었는데(17:7절), 오늘 레위 사람도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맞이합니다. 사사기는 마지막 두 이야기가 이렇게 연결되며 중심에 레위인이 있습니다.
레위인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이스라엘 곳곳에 흩어져 살게 하시고, 백성을 말씀으로 가르치며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도록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런 레위 사람이 첩을 맞이했습니다. 사사기 저자는 이 일을 잘했다 잘못했다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맡은 레위인이 첩을 두었다는 것이 좋은 모습일 수는 없습니다. 말씀으로 백성을 세워야 할 사람이 자기 사명보다 자기 욕망과 세상 정신을 따라 살고 있습니다.
2절에서 그 첩은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넉 달 동안 지냅니다. 행음이 간음을 뜻한다면 그 시대 율법으로는 돌에 맞아 죽을 일입니다. 그래서 이 말을 “화를 내다, 다투다”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두 사람이 다투고 첩이 화가 나서 친정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레위 사람은 넉 달 동안 첩을 데리러 가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 산지에서 베들레헴은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습니다. 반나절이면 갈 수 있는 길(48km)을 넉 달 동안 가지 않은 것입니다. 넉 달이 지나서야 그는 하인 한 사람과 나귀 두 마리를 데리고 첩에게로 가서 다정하게 말하며 데려오려 합니다. 첩이 그를 아버지의 집으로 인도하고, 그 여자의 아버지는 그를 보고 기뻐합니다.
부부 사이에 다툼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흐름 안에서 이 이야기를 읽으면 질문이 생깁니다. 다투고 친정으로 가버린 아내, 넉 달이 되도록 가만히 있는 남편, 이것이 정상적인 가정의 모습입니까?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나라 전체가 무너지기 전에 먼저 개인이 무너지고 가정이 무너집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라는 말은 교회에서 봉사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개인의 삶이 혼란스러워집니다. 이 레위인처럼 가지 말아야 할 길, 욕망과 탐욕의 길을 걷다가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게 됩니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사기를 묵상하며 내 삶의 왕이 누구인지, 내가 왕이 되어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점검해야 합니다.
●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하매”(5절)
4-10절은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이야기가 길게 이어집니다. 정리해보면, 장인이 레위 사람을 머물게 하자 그는 삼 일 동안 함께 머물며 먹고 마시며 거기서 유숙합니다. 5절에서 넷째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떠나려 하자 장인이 떡을 조금 먹고 기력을 돋운 후에 가라고 합니다. 6절에서 두 사람이 앉아 함께 먹고 마시자 장인이 청합니다. “청하노니 이 밤을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라” 7절에서 그 사람은 일어나 가려 했지만 장인의 간청으로 다시 유숙합니다.
8절에서 다섯째 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떠나려 하자 장인은 또 기력을 돋우고 해가 기울도록 머물라고 하고, 두 사람은 함께 먹습니다. 9절에서 그가 첩과 하인과 함께 일어나 떠나려 하자 장인이 다시 붙잡습니다. “보라 이제 날이 저물어 가니 청하건대 이 밤도 유숙하라 보라 해가 기울었느니라 그대는 여기서 유숙하여 그대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일 일찍이 그대의 길을 가서 그대의 집으로 돌아가라”
10절에서 그 사람은 다시 밤을 지내려 하지 않고 일어나 떠나 여부스 맞은편에 이릅니다. 여부스는 곧 예루살렘입니다. 그 시대에는 길이 안전하지 않아 해 질 무렵에 길을 떠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떠났어야 할 길을 해가 기울어 떠난 것이 다음 본문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일어나야 할 때 일어나지 못한 것이 결국 큰 비극의 출발점이 됩니다.
4-10절까지 같은 말이 계속 되풀이됩니다. ‘유숙하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4,6,7,9), “먹고 마셨다, 기력을 돋우라, 마음을 즐겁게 하라”는 말이 반복됩니다(5,6,8,9). 그 사이사이에 레위 사람이 “일찍이 일어나 떠나고자 했다”는 말도 나옵니다(5,7,8,9). 장인이 사위를 이렇게 붙잡은 데에는 넉 달 만에 찾아온 사위를 잘 대접해서 딸과 잘 지내게 하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극진한 대접은 뒤에 이들이 머물게 될 기브아 사람들의 냉대와 대조를 이룹니다.
그렇다면 사사기 저자가 이런 이야기를 길게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레위 사람은 이렇게 머물며 먹고 마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는 데 시간을 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9절의 장인의 말대로 그에게는 가야 할 그의 길이 있었고, 돌아가야 할 그의 집이 있었습니다.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어둔 시대 레위인의 사명은 막중합니다. 그는 일어나 떠나야 했는데 머뭇거리며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야 할 길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며 세상과 다른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명을 잊고 죄악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습니다. 세상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일어나 떠나야 하는데 계속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내 삶의 왕이 누구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사기의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한 사람과 한 가정의 문제였습니다. 이 아침에 내가 정말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 점검합시다.
또한 지금의 자리가 머물러야 할 자리인지, 일어나 떠나야 할 자리인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과 지켜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세상의 즐거움에 머뭇거리고 있다면 일어나 떠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의 집과 말씀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머뭇거림을 떨치고 과감하게 일어나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됩니다.
2026.10.06 | 매일성경
●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24절)
17, 18장의 중심에는 미가가 있습니다. 미가는 하나님을 섬긴다며 자기 집에 신상을 만들고 신당을 세웠습니다. 떠돌던 레위 청년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어제 본문에서는 단 지파가 자기 기업의 땅을 차지하지 못해 새 땅을 찾아 나섰습니다. 무기를 든 600명이 북쪽으로 가는 길에 미가의 집에 들러 신상들을 가져갔고, 한 집의 제사장보다 한 지파의 제사장이 낫지 않느냐는 말에 그 제사장도 기뻐하며 따라갔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뒤의 이야기입니다.
단 자손은 돌이켜서 어린아이들과 가축과 값진 물건들을 앞세우고 길을 떠납니다. 군사들은 뒤에 섰습니다. 미가가 사람들을 데리고 쫓아올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들이 미가의 집을 멀리 떠났을 때 미가의 이웃집 사람들이 모여 단 자손을 추격합니다. 600명이 무기를 들고 있을 때는 가만히 있던 미가가 그들이 떠나자 이웃을 모아 뒤쫓은 것입니다. 단 자손이 얼굴을 돌려 미가에게 말합니다. 23절 “네가 무슨 일로 이같이 모아 가지고 왔느냐”는 것입니다. 뻔뻔합니다. 남의 것을 가져가 놓고 사과는커녕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왜 왔는지 알면서 힘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미가가 대답합니다. 24절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신상과 제사장 내놓으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끼리 지금 우상을 두고 다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말씀을 가까이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을 빼앗고 되찾으려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가는 “내가 만든 신들”이라고 말합니다. 27절도 “미가가 만든 것”이라고 하고, 31절도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라고 합니다. 만들었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미가는 여호와를 위해 만든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 하나님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어떤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상은 내 필요와 내 유익을 위해 내가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상은 나를 지켜 주지 못하고 오히려 빼앗깁니다. 우상이 없었다면 단 지파가 미가의 집에 이런 일을 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우상 때문에 미가는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악한 본성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시고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을 내 뜻대로 움직이고 싶어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사는 것보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시기를 바랄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원하는 것이 강할수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잊어버립니다.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서 문제가 생기면 왜 안 해 주시느냐고 항변하는 것도 그런 모습입니다.
미가에게 단 자손이 말합니다. 25절 “네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리게 하지 말라, 노한 자들이 너희를 쳐서 네 생명과 네 가족의 생명을 잃게 할까 하노라” 입 다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백성에게 공의롭게 살고 약한 사람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서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26절에서 미가는 단 자손이 자기보다 강한 것을 보고 돌이켜 집으로 돌아갑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고 위협합니다. 세상과 다르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이렇게 됩니다.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이 되지 않으시면 우리 개인의 삶도, 가정도, 교회 공동체도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31절)
27절에서 단 자손은 미가가 만든 것과 그 제사장을 데리고 라이스에 이릅니다. 우상과 제사장이 함께 있으니 하나님도 우리 편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을 만나 칼날로 치고 그 성읍을 불살랐습니다. 라이스 사람들을 두고 염려 없이 거주하는 백성(7절), 평화로운 백성(10절), 한가하고 걱정 없이 사는 백성(27절)이라는 말이 되풀이됩니다. 서로 믿고 평화롭게 살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칼로 쳐서는 안 됩니다. 칼날로 치고 성읍을 불사르는 것은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의 죄악을 심판하실 때 하라고 하신 일이었습니다. 라이스는 그런 땅이 아니었습니다.
단 지파가 정말 싸워야 할 상대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하고 있던 아모리 족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싸우겠다고 약속하셨지만, 단 지파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고 강해 보이는 아모리 족속과 싸우기를 피했습니다. 대신 힘없고 평화로운 라이스를 쳤습니다. 싸워야 할 상대와는 싸우지 않고, 싸우지 말아야 할 상대와 싸웠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일은 싸울 대상을 잘못 찾는 것입니다. 약한 사람을 짓밟아서도 안 되고, 같은 하나님의 백성끼리 싸워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상대는 어둠의 세력입니다. 세상 정신입니다.
라이스는 구원할 자가 없었습니다. 시돈과 거리가 멀고 상종하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 자손은 그곳에 성읍을 세우고 거주합니다. 그들의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성읍 이름을 단이라 했습니다.
30절에서 단 자손은 자기들을 위하여 그 새긴 신상을 세웠습니다. 새 땅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신상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지금 함께 한 제사장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모세의 손자요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고 가나안 앞까지 인도한 모세,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 모세의 후손이 우상을 섬기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그만큼 무너졌습니다. 30절은 요나단과 그의 자손이 그 땅 백성이 사로잡히는 날까지 단 지파의 제사장이었다고 말합니다. 많은 학자들은 이것을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사로잡혀 간 때로 봅니다. 우상을 숭배하다 결국 멸망한 것입니다.
31절이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가 만든 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더라” 하나님의 집은 성막입니다. 가나안에 들어온 뒤 성막은 실로에 있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실로의 하나님의 집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런데 단 지파는 하나님의 집이 있는데도 사람이 만든 신상을 따로 세워 섬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무엇에 열심을 내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미가도 단 지파도 열심이 있었지만, 그 열심은 우상을 향한 열심이었습니다. 우리의 열심이 하나님과 말씀과 하나님 나라를 향하고 있는지, 헛된 것을 향하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얼마나 열심히 사느냐보다 무엇을 향해 열심히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답게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의 삶은 강한 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한 자 앞에서는 강한 약육강식의 삶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삽시다.
2026.10.05 | 매일성경
●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1절)
사사기는 삼손 이야기로 사사들의 이야기를 마치고, 17장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중심에 미가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가의 집에서 신상이 만들어지고 신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미가는 떠돌아다니던 레위 청년을 데려다 자기 집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해도 되나 싶은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가 한 사람이 아닌 한 지파의 문제로 이어집니다. 단 지파가 미가의 집을 찾아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고” 어제 본문 17:6절에서도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왕이 없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왕이신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일들도 그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1절은 단 지파가 거주할 기업의 땅을 구하는 중이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그때까지 기업을 분배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단 지파도 다른 지파들처럼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분배받지 못했다는 말은 받은 땅을 차지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삿1:34절은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셨으니 믿음으로 나가 그 땅을 차지해야 했는데, 단 지파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땅을 포기하고 살 만한 다른 땅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쉬운 길을 찾은 것입니다. 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단 자손은 용맹스러운 다섯 사람을 보내 땅을 정탐하게 합니다. 단 지파가 머물던 소라와 에스다올은 이스라엘의 남서쪽에 있었고, 그들이 찾아간 땅은 북쪽 끝이었습니다. 그 길 중간에 에브라임 산지가 있습니다. 다섯 사람은 에브라임 산지에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러 거기서 유숙합니다.
3절에서 그들은 미가의 집에 있을 때 그 레위 청년의 음성을 알아듣습니다. 에브라임 사람의 말투와 다른 말투를 알아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레위 청년에게 묻습니다. “누가 너를 이리로 인도하였으며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며 여기서 무엇을 얻었느냐” 4절에서 레위 청년은 미가가 자기를 고용하여 자기 제사장으로 삼았다고 대답합니다. 자기가 머물러야 할 곳을 떠나 떠돌다가 여기까지 온 사정은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합니다.
그러자 단 지파 정탐들이 부탁합니다. 5절 “청하건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가 가는 길이 형통할지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 레위 청년은 신상을 만들어 둔 집의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신상이 있는 곳에 가서 기도를 부탁한 것과 같습니다. 6절에서 그 제사장은 “평안히 가라, 너희가 가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 제대로 묻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기업을 차지하지 못해 떠도는 지파가 떠돌다 한 집의 제사장이 된 사람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그 사람은 듣기 좋은 말로 대답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신앙 형편이었습니다.
다섯 사람은 라이스에 이릅니다. 거기 있는 백성은 염려 없이 거주하며 시돈 사람들처럼 평온하고 안전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땅에는 부족한 것이 없었고, 시돈 사람들과 거리가 멀고 어떤 사람과도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평화롭고 풍요롭고, 주변에서 함부로 침입하지 않는 땅이었습니다. 정탐을 마치고 다섯 사람이 돌아가자 형제들이 어떠하더냐고 묻습니다. 9절에서 그들은 일어나 올라가자, 그 땅이 매우 좋더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0절에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하나님이 그 땅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땅을 단 지파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라 하신 데에는 그 땅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뜻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분배해주신 땅을 믿음으로 차지해야 했습니다. 라이스는 그런 땅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자기 눈에 좋게 보이니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욕망을 채우는 수단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배해야 할 분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야 할 분이십니다.
● “어느 것이 낫겠느냐”(19절)
단 지파의 가족 중 600명이 무기를 지니고 라이스를 점령하기 위해 소라와 에스다올에서 출발합니다. 북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13절에서 에브라임 산지의 미가의 집에 이릅니다. 정탐꾼들이 들렀던 바로 그 집입니다. 다섯 사람이 형제들에게 말합니다. 14절 “이 집에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있는 줄을 너희가 아느냐” 그리고 마땅히 행할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끝까지 이 우상들의 이름이 여러 번 되풀이됩니다(14,17,18,20). 정탐꾼들이 미가의 집에서 눈여겨본 것이 이것입니다. 관심이 있었다는 겁니다. 전쟁을 앞두고 이것을 가져가면 싸움에서 이기고, 새 땅에 자리 잡아 풍요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으리라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풍요와 안전은 누가 주십니까? 하나님이 주십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이 아니라 신상과 아무렇게나 세운 제사장이 자기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다섯 사람은 미가의 집에 이르러 문안하고, 600명은 무기를 지니고 문 입구에 섭니다. 다섯 사람이 들어가 새긴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가져갑니다. 그러자 미가의 집 제사장이 너희가 무엇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19절에서 그들이 대답합니다. 잠잠하라, 네 손을 입에 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고 하면서 묻습니다.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의 한 지파 한 족속의 제사장이 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낫겠느냐” 제사장의 자리는 조건이 더 좋은 쪽으로 옮겨 다니는 자리가 아닙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바르게 예배하도록 이끄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20절에서 그 제사장은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받아 가지고 그 백성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슬퍼하고 애통해야 할 일 앞에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혼돈과 어둠속으로 계속 들어갑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님이 주신 자리를 믿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단 지파는 받은 땅을 지키지 못하고 떠돌았고, 레위 청년은 자기 자리를 떠나 더 나은 조건을 따라 옮겨 다녔습니다.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필요합니다. 다른 것을 쫓아다니지 않고 하나님이 나를 두신 자리를 수고롭더라도 지켜 가는 것이 복된 인생의 출발점입니다.
또한 무엇을 의지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단 지파의 관심은 하나님과 말씀이 아니라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신상에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무엇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이라 여기며 붙들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그것들은 헛것입니다. 하나님과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고 시간이 갈수록 견고하게 세워 주십니다.
2026.10.02 | 매일성경
● “삼손이 가사에 가서”(1절)
어제 본문에서 삼손은 여우 300마리로 블레셋의 곡식 밭을 태웠고, 유다 사람 3,000명에게 결박되어 블레셋에 넘겨졌지만 여호와의 영이 임하자 밧줄을 끊고 나귀의 턱뼈로 천 명을 죽였습니다. 그리고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여호와께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샘을 터뜨려 그를 살리셨습니다. 그 샘이 엔학고레, 부르짖는 자의 샘입니다. 이만큼 은혜를 경험했다면 삼손이 달라지기를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삼손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1절에서 삼손은 가사에 갑니다. 가사는 블레셋의 중심 성읍 가운데 하나입니다. 삼손은 거기서 한 기생을 보고 그에게로 들어갔습니다. 14장에서 블레셋 딤나의 한 여자를 보고 좋아했던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번에도 삼손은 눈에 보이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사가 이스라엘 땅이 아니라 계속 블레셋 땅에 머물고 있습니다. 블레셋은 삼손이 즐길 곳이 아니라 맞서 싸워야 할 곳입니다. 나실인이요 사사인 삼손은 하나님과 말씀에 마음을 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의 관심은 세상의 즐거움과 쾌락에 있었습니다. 누가 삼손을 떠밀어서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이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에게 삼손은 눈엣가시였습니다. 2절에서 삼손이 왔다는 소식이 가사 사람들에게 알려집니다. 그들은 곧 그곳을 에워싸고 밤새도록 성문에 매복하고 밤새도록 조용히 기다립니다. 밤새도록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새벽이 되면 그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삼손의 힘을 알고 있으니 많은 사람이 숨죽이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서 삼손은 밤중까지 누워 있다가 그 밤중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성 문짝들과 두 문설주와 문빗장을 빼어 어깨에 메고 헤브론 앞산 꼭대기로 갑니다. 집 문이 아니라 성문입니다. 그것을 통째로 뽑아 메고 간 것입니다. 이런 힘을 가진 사람을 누가 당하겠습니까? 블레셋 사람들은 이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내지 못하면 계속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삼손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려는 작전으로 이어집니다.
●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4절)
4절에서 삼손은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합니다. 소렉 골짜기는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경계 지역입니다. 들릴라가 어느 민족인지 본문은 말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삼손이 사랑한 여인들을 보면 블레셋 여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기에 블레셋 방백들이 그녀에게 돈을 주고 삼손을 넘기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본문은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다고만 말할 뿐,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했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어제까지 한 여인 때문에 그 많은 일을 겪었으면 이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어야 할 텐데, 삼손은 또 다른 여인을 찾고 또 찾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 마음을 채우지 못하면 사람은 다른 것으로 자기를 채우려 합니다. 삼손은 여인으로, 어떤 사람은 돈으로, 어떤 사람은 권력이나 쾌락으로 채우려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으로도 마음은 채워지지 않고, 그럴수록 그것이 우리를 결박하여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말씀으로, 또한 기도로 채워져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5절에서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들릴라를 찾아옵니다. 블레셋은 다섯 성읍의 방백들이 다스렸습니다. 그들이 삼손을 꾀어서 그 큰 힘이 무엇으로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아내라고 합니다. 그러면 각각 은 천백 개씩을 주겠다고 합니다. 다섯 방백이면 은 5,500개, 엄청난 돈입니다. 블레셋은 그만한 돈을 들여서라도 삼손을 없애는 것이 이득이라고 보았습니다.
꾀어서라는 말은 14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의 아내에게 네 남편을 꾀어 수수께끼를 알아내라고 할 때 쓴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삼손을 바로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하려 합니다. 철저히 욕보이고 싶을 만큼 복수심에 불타 있었습니다.
들릴라는 돌려 말하지도 않고 바로 묻습니다. 6절 “청하건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블레셋 방백들이 한 말 그대로입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포상금을 타는 수단으로 이용할 뿐입니다. 삼손이 제정신이었다면 이 질문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차렸어야 합니다. 막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7절에서 삼손은 마르지 않은 새 활줄 일곱으로 결박하면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아질 것이라고 거짓으로 대답합니다. 8절에서 방백들이 활줄을 가져오고 들릴라가 삼손을 결박합니다. 9절에서 이미 사람들이 방 안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들이 들이닥쳤다고 외치자 삼손은 그 줄을 불탄 삼실 끊듯이 끊습니다. 그의 힘의 근원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가사에서는 성 밖에 숨은 매복을 뚫고 나간 삼손이, 이번에는 대적이 바로 방 안에 있는데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삼손의 눈이 멀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다음 본문에서 삼손이 붙잡혀 가장 먼저 당하는 일이 눈을 뽑히는 일입니다.
10절에서 들릴라는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거짓말을 했다며 다시 묻습니다. 삼손은 쓰지 않은 새 밧줄로 결박하면 약해질 것이라고 대답하고, 들릴라가 새 밧줄로 결박하지만 삼손은 팔 위의 줄을 실 끊듯이 끊습니다. 이때도 사람들이 방 안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들릴라가 자기를 블레셋에 넘기려 한다는 것을 두 번이나 겪고도 삼손은 그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들릴라도 포기하지 않고 묻자 삼손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13절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짜면 되리라” 처음으로 머리털 이야기가 나옵니다. 들릴라는 바디로 그 머리털을 단단히 짭니다. 바디는 베틀에서 씨실을 쳐서 천을 촘촘하게 짜는 도구입니다. 삼손은 잠을 깨어 베틀의 바디와 날실을 다 빼냅니다. 이번에도 힘은 그대로였지만, 삼손의 대답은 점점 말해서는 않되는 비밀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삼손은 그 질문을 처음부터 끊었어야 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무엇을 가까이하며 사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삼손은 하나님과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며 살아야 할 나실인이었지만, 세상과 쾌락과 여인을 가까이했습니다. 그 큰 힘을 가진 사람을 무너뜨린 것은 더 큰 힘이 아니라 한 여인이었습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라 가까이 둔 작은 유혹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힘입니다. 그 힘을 스스로 내려놓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습니다.
또한 영적인 눈을 떠야 합니다. 무엇인가에 눈이 멀면 사람은 스스로 죽음의 길로 걸어갑니다. 삼손은 여인에게 눈이 멀었고, 오늘 많은 사람은 돈과 권력과 욕심에 눈이 멀어 삽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면 말씀의 눈을 떠야 합니다. 말씀이 쉽지 않아도 붙잡고 묵상하며, 말씀으로 서로를 세워 갑시다.
2026.10.01 | 매일성경
●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3절)
어제 본문에서 삼손은 결혼 잔치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협박해 답을 알아냈고, 삼손은 아스글론에 내려가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여 그 옷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심히 노하여 아내를 두고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삼손의 친구였던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 일어난 일입니다.
1절에서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아내를 찾아갑니다. 아내를 두고 떠났던 일을 풀고 화해하려고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장인은 삼손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2절에서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네 친구에게 주었으니 대신 그의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삼손이 말합니다. 3절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삼손의 분노가 장인이 아닌 블레셋을 향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아내를 협박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보복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 보면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먼저 낸 사람은 삼손이었습니다. 삼손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남의 탓만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약속된 나실인이었지만, 삼손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삼손은 여우 300마리를 붙들어 꼬리와 꼬리를 매고 두 꼬리 사이에 홰를 하나씩 답니다. 홰는 횃불입니다. 5절에서 홰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넣습니다.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않은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가 다 탔습니다. 밀을 거두는 때였으니 한 해 농사가 다 사라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누가 이 일을 했느냐고 묻고,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 장인 때문에 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살랐습니다. 14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아내를 협박했습니다. 아내는 그 일을 피하려고 삼손 앞에서 울며 답을 알아냈지만, 결국 그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보복이 보복을 부르고 있습니다.
7절에서 삼손은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입니다. 많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 머뭅니다. 지금 삼손은 개인의 분노와 복수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치고 있는 대상은 블레셋입니다. 이상한 방식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한 사람의 분노지만, 그 밑에는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흐르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삼손은 눈엣가시입니다.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유다지파를 이용합니다. 11절에서 유다 사람 3000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 삼손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이 잡으러 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입니다.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상대는 자기들을 다스리는 블레셋인데, 유다는 자기 편을 잡으러 나섰습니다. 누가 적인지도 모르게 된 이스라엘의 형편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삼손에게 말합니다. 11절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오래 지배를 받다 보니 유다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죄의 영향 아래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래되면 다들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여기며 익숙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래 무엇인가에 매여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삼손은 동족인 유다 사람들에게 결박당합니다. 13절에서 그들은 결단코 죽이지 않겠다고 하고 새 밧줄 둘로 삼손을 결박해 바위 틈에서 끌어냅니다. 새 밧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튼튼한 줄이고, 그것도 두 겹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18절)
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마주 나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떨어졌습니다. 15절에서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입니다. 한 사람이 천 명을 죽이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16절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여호와의 영이 임해서 한 일인데 삼손은 내가 했다고 말합니다. 17절에서 턱뼈를 던지고 그곳을 ‘라맛레히’라 이름합니다. “턱뼈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이룬 일을 기념하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서 상황이 바뀝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13장부터 이스라엘이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삼손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방금 전까지 내가 천 명을 죽였다고 하던 삼손이, 목이 마르고 나서야 이 구원을 베푸신 분이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턱뼈로 언덕을 쌓을 만큼 강한 사람도 목마름 하나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물이 솟아납니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합니다. 그래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습니다.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17절의 라맛레히가 삼손이 자기 공을 기념한 이름이라면,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이름입니다. 20절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때에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사사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내용이 아니라 별다른 변화없이 계속해서 블레셋의 압제를 당했습니다. 삼손이 사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유다는 지배받는 것에 익숙해져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랐고, 삼손은 힘이 있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부르짖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주소를 바로 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우리 삶의 문제와 어려움과 연약함을 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터뜨려 주십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가 이렇게 산다는 것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아래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을 이어 가고 계셨습니다. 우리 인생과 가정과 공동체가 너무 어둡고 혼란해서 끝났다고 여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2026.09.30 | 매일성경
●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고”(1절)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지도 않았는데 마노아의 가정을 찾아오셔서 구원자를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약속대로 삼손이 태어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으며,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13:24-25절). 이제 이 어두운 시대에 삼손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구원할지 기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기대를 깨는 삼손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서 삼손은 딤나에 내려갑니다. 딤나는 본래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이었지만 아직 차지하지 못해 블레셋 사람들이 다스리던 곳입니다. 삼손이 할 일은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고 빼앗긴 땅을 되찾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손의 관심은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삼손은 거기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 한 여자를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본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1절에서 “한 여자를 보고”, 2절에서 부모에게 “한 여자를 보았다”고 말합니다. 3절에서 삼손은 “내가 그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는데, 원문으로 보면 “그 여자가 내 눈에 옳다”는 말입니다. 7절에서도 “그 여자가 삼손의 눈에 들었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사사기가 그 시대를 두고 되풀이하는 말, 곧 “사람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17:6,21:25절). 삼손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방 사람과 결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방 사람을 가까이하다 보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게 되고, 결국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보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런데 삼손에게 그 말씀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내 눈에 좋은 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가 말합니다. 3절 “네 형제들의 딸들 중에나 내 백성 중에 어찌 여자가 없어서 네가 할례 받지 아니한 블레셋 사람에게 가서 아내를 맞으려 하느냐” 부모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말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잉태되어 태어났으며, 무엇을 해야 할 사람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듣지 않고, 나를 위하여 그 여자를 데려오라고 부모에게 명령하듯 말합니다. 한 여자에게 눈이 멀어 하나님이 주신 사명도, 부모의 말도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절이 뜻밖의 말을 합니다.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까닭에 블레셋 사람을 치려 함이었으나 그의 부모는 이 일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 줄은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블레셋을 치려고 이 여자를 택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삼손은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자기 좋은 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삼손을 통해서도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관심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일을 멈추시지 않습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순종하며 그 뜻을 이루어야 할 백성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부모와 함께 딤나에 내려가 포도원에 이릅니다. 포도원은 포도주와 관련이 있는 곳입니다. 나실인은 포도주를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그 근처를 서성입니다. 거기서 젊은 사자가 삼손을 보고 소리를 지릅니다. 6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강하게 임하니 그가 손에 아무것도 없이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는 것 같이 찢었습니다. 지금까지 여호와의 영이 사사에게 임하면 사사는 대적과 싸워 이스라엘을 구원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사자를 찢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그 여자를 맞이하려고 다시 가다가 돌이켜 사자의 주검을 보니 벌 떼와 꿀이 있었습니다. 나실인은 시체를 가까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9절에서 삼손은 손으로 그 꿀을 떠서 걸어가며 먹고, 부모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그 꿀을 사자의 몸에서 떠왔다고는 알리지 않았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유혹일수록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삼손은 거기에 아무 거리낌 없이 넘어갔고, 부모까지 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19절)
10절에서 삼손의 아버지가 여자에게로 내려가고, 삼손은 거기서 잔치를 베풉니다. 그 시대 잔치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나실인으로 구별되었지만 삼손은 그렇게 살 생각이 없었습니다. 11절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삼십 명을 데려와 삼손의 친구로 삼아 함께하게 합니다.
삼손은 그들에게 수수께끼를 냅니다. 잔치하는 이레 동안 풀면 베옷 30벌과 겉옷 30벌을 주고, 풀지 못하면 그들이 같은 것을 내놓으라는 것입니다. 상당한 액수를 걸었습니다. 수수께끼는 이것입니다. 14절 “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 자기가 사자의 주검에서 꿀을 먹은 일입니다. 자기만 본 일을 두고 낸 수수께끼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맞히겠습니까? 그들은 사흘이 되도록 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협박합니다. 남편을 꾀어 답을 알아내지 않으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합니다. 16절에서 아내는 삼손 앞에서 울며 당신이 나를 미워할 뿐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17절에서 아내가 잔치하는 칠 일 동안 울며 강요하자, 삼손은 결국 일곱째 날에 답을 알려 주고 아내는 그것을 자기 백성에게 알려 줍니다.
18절에서 성읍 사람들이 답을 말합니다.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어쨌든 수수께끼의 정답을 말한 것입니다. 약속대로 옷을 주어야 합니다. 19절에서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삼손은 블레셋 땅 아스글론에 내려가 그곳 사람 30명을 쳐 죽이고 그 옷을 빼앗아 수수께끼 푼 자들에게 줍니다. 그리고 심히 노하여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갑니다. 혼자서 30명을 죽일 만큼 큰 능력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영이 주신 그 능력을 삼손은 자기 분노를 푸는 데 썼습니다. 6절도, 19절도 그렇습니다.
20절에서 삼손의 아내는 삼손의 친구였던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이 일은 뒤에 더 큰 문제로 이어집니다. 삼손의 모습은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별된 백성으로 선택받았고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셨지만, 그 은혜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욕망과 이익을 위해 썼습니다. 사사기는 삼손을 통해 그 시대 이스라엘의 영적인 형편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이 시대 우리를 돌아보게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내 눈에 좋은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삼손은 구별된 사람으로 태어나 여호와의 영이 함께했지만,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이었고,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면서 세상 사람들처럼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봅시다.
또한 성숙한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삼손도, 그 여인의 집도, 블레셋 사람들도 성숙하지 못하니 문제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성숙하지 못하면 일어나지 않아도 될 문제 속에서 살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성숙한 신앙이 내 삶에 안정감을 주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복되게 하며,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아름답게 이루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