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1:1-16절 / 여호와를 경외하는 즐거움(26.07.30)

●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1절)

지금까지 이사야는 앗수르의 심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남유다도 끝내 돌아오지 않아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다 멸망했다면, 하나님의 역사도 다 끝나 버린 것이 아닌가? 바로 그 자리에서 오늘 11장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하시는지를 보여줍니다.

1절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이니, ‘이새의 줄기’는 다윗 왕조를 가리킵니다. 다윗 시대에 이스라엘은 크고 부강한 나라, 나무로 치면 거대한 나무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끝에 와서 완전히 잘려, 이제 밑동만 남은 그루터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다 끝났다고 여길 그때, 하나님은 그 그루터기에서 연한 싹 하나가 돋는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 싹을 통해 다윗 왕조보다 더 완전하고 위대한 나라, 진정한 통치를 이루시겠다고 하십니다. 모두가 끝났다고 할 때 하나님은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시작하십니다. 이 싹은 앞서 이사야가 예고해 온 그분, 곧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생활을 하고 삶을 살다 보면 “이제 끝이구나, 절망이다”라는 마음이 들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는 끝이 없고 절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새롭게 일으키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그런 자리에서 하나님 안에 머물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하나님이 새 일을 행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싹, 곧 새로운 통치자는 무엇으로 나라를 이끄실까요. 2절 “그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세상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으로 통치합니다. 여기 여러 영이 나열되는데, 지혜와 총명과 모략, 그리고 거기에 ‘지식’이 더해집니다. 이것은 인생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본문은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무너진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니 바르게 섬기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것이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어떻게 됩니까. 2절 끝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지, 그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를 향한 계획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안다면, 경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바로 그 경외가 3절에서 이렇게 표현됩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하나님을 섬기는데 어쩔 수 없어서, 매 맞을까 봐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니까 그 하나님이 너무 귀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워서,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견딜 수 없는 마음으로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래 신앙생활한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예배하러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나옵니까.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나옵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나옵니까. 만약 예배가, 신앙이 부담으로 느껴진다면 문제가 어디 있는 것일까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즐거움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지식으로만 아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안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할 때, 신앙은 자칫 무거운 짐이 됩니다. 누군가에게는 시간이 갈수록 하나님 섬김이 기쁨과 감격이 되는데, 누군가에게는 갈수록 무거운 짐이 됩니다. 그런 자리에 있다면, 무엇보다 먼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을 다시 알아가는 것, 그 회복을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경외하는 사람에게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3절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말하게 됩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고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어떻게 판단합니까. 4절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단합니다. 특히 4절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이 사람의 입에 막대기가 있다는 것은, 그 입술에서 하나님의 바른 기준이 나온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잘못된 기준을 바르게 짚어 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이 서로 하나님의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말하고 그렇게 살아간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겠습니까. 오늘 내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세상의 기준입니까, 하나님의 기준입니까.

●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9절)

6절부터는 이 메시아가 다스리시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가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이끌립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해도 해를 입지 않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은 본래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함께 삽니다. 함께할 수 없는 존재들이 함께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셨을 때의 본래 모습입니다.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오자 세상이 약육강식의 자리가 되어 버렸습니다.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은 이 깨어진 세상을 본래의 화평으로 회복시키십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집니까. 세상은 정치를 잘하면, 경제가 발전하면 억울한 사람 없고 모두가 행복한 세상이 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치가 그런 세상을 만든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공약과 계획을 세워도, 모든 문제의 뿌리인 인간의 죄성을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9절이 답합니다.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아름다운 세상은 정치와 경제가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해질 때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인정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나와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적당히 알아서는 안 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충만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지 않습니다. 문제는 적당히 안는데 있습니다. 적당히 알고 적당히 삽니다. 그런데 적당히 알고 적당히 살면, 결정적인 순간이 왔을 때 하나님의 기준이 아니라 세상의 기준을 택하게 됩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것도 ‘적당함’때문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아는 지식은 지금 어느 깊이에 있습니까.

10절부터 이 회복이 한 나라를 넘어섭니다. 이새의 뿌리에서 난 싹이 만민의 기치로 서고,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옵니다. ‘기치’는 깃발입니다. 하나님이 메시아를 깃발로 높이 세우셔서 온 열방이 그리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땅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일어나면 13절 “에브라임의 질투는 없어지고 유다를 괴롭게 하던 자들은 끊어지며”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유다는 남유다를 대표합니다. 본래 한 동족인 두 나라가 갈라진 뒤 서로 질투하고 잡아먹을 듯 다투었는데, 메시아의 통치가 이루어지면 그 질투와 다툼이 끊어지고 하나 되어 화평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통치를 인정하는 백성에게 맺히는 열매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시라면, 우리 안에 맺혀야 할 열매도 이것입니다. 질투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서로 괴롭히고 다투고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즐거움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면, 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의무가 아니라 견딜 수 없는 기쁨이 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회복된 세상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충만해질 때 이루어집니다. 적당히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생각하면 감사와 감격이 넘치도록 그 지식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합니다.

이사야 10:20-34절 /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26.07.29)

●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21절)

지금까지 이사야는 하나님의 징계의 도구였던 앗수르가 교만하여 심판받는다고 했습니다.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멸망시켰고 이제 남유다까지 삼키려 진격해 오는데, 하나님은 그 앗수르를 반드시 꺾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 거기에 소망이 있다”입니다.

20절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실하게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의지하리니” 본문에 ‘남은 자’가 반복됩니다. 심판을 통과하고 살아남은 자들이, 이제는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진실하게 의지하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특히 22절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을 바다의 모래같이, 하늘의 별같이 많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자녀가 없던 아브라함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루셨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백성 가운데 정작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남은 자’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숫자의 많음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바다의 모래처럼 많아도,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 때 하나님은 그들을 징계하시고, 도리어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드는 소수의 남은 자를 통해 그 뜻을 이루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많은 무리가 아니라, 다른 것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24절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남유다를 향하여 ‘내 백성아’라고 부르십니다. 비록 죄악 가운데 있지만 포기하지 않으시고 깨닫게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앗수르가 아무리 강하게 공격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가 앗수르에게로 옮겨져 그들이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옛날 출애굽과 사사기 시대의 사건을 통해 확증하십니다. 하나님이 미디안을 치셨던 것처럼, 그리고 애굽에서 홍해를 가르셨던 것처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그 구원이, 지금 이 백성에게도 그대로 일어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27절 “그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 앗수르의 공격은 남유다에게 무거운 짐이자 목을 짓누르는 멍에였습니다. 왕과 백성이 그 앞에서 얼마나 두렵고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짐을 어깨에서 벗기시고 멍에를 목에서 부러뜨리십니다. 그 이유가 ‘기름진 까닭’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기에, 그 풍성함으로 멍에가 부러진다는 의미입니다.

이 ‘기름짐’이라는 말에 이사야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기름지고 풍요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앗수르가,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힘이 더 든든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도리어 목에 멍에를 진 삭막하고 메마른 삶이었습니다. 기름진 삶을 좇아 하나님을 버렸는데, 얻은 것은 빼빼 마른 삶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더 나은 삶, 더 풍요로운 삶을 위해 하나님을 뒷전에 두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다른 것을 붙드는 편이 더 안전하고 더 기름져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기름지고 복된 삶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삶이 참된 풍요입니다.

●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33절)

28-32절까지는 여러 지명이 이어집니다. 이 지명들은, 앗수르 군대가 북쪽에서부터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해 오는 경로입니다. 한 성읍 한 성읍 무너뜨리며 점점 가까이 다가와 예루살렘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32절 “그날에 그가 놉에 서서 딸 시온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놉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곳입니다. 앗수르가 거기까지 진격해 와, 예루살렘을 눈앞에 두고 공격하려 손을 흔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곧 수도가 함락될 것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하나님이 이 장면을 이토록 생생하게 설명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으면 바로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것이니, 남유다 백성은 정신 차리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위기가 이르기 전에 돌이키라는 간절한 경고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향해 위협하며 손을 흔들던 그 앗수르는 어떻게 됩니까. 33-34절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

예루살렘을 두렵게 하던 앗수르를 하나님이 혁혁한 위력으로 꺾으십니다. 울창한 삼림 같던 앗수르의 군대가 도끼에 찍히듯 쓰러지고, 그 높은 것이 낮아집니다. 실제로 히스기야 왕 시대에 앗수르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때, 히스기야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하룻밤 사이에 앗수르 군대를 치셨습니다. 아무도 무너지리라 상상하지 못한 그 최강대국이, 하나님의 손에서는 한순간에 베이는 나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앗수르는 결국 남유다를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과정을 통해 남유다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내가 예언한 대로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쳤고, 또 내가 예언한 대로 그 앗수르가 멸망한다. 그러니 내 말은 반드시 이루어지니, 남유다야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남유다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하나입니다. “돌아오라, 거기에 소망이 있다!”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남은 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무리를 기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 많은 백성이 형식적인 신앙에 머물 때 하나님은 징계하시고, 신실하게 하나님을 붙드는 남은 자를 통해 뜻을 이루십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다른 것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며, 하루를 살아도 하나님 중심으로 그분께 영광 돌리는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바로 그 한 사람으로 서 있는지, 오늘 우리 자신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다른 하나는 혁혁한 위력의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문턱까지 이른 최강대국조차 한순간에 꺾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고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혁혁한 위력으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 어깨의 짐을 벗기시며, 대신 싸우시는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원합니다.

이사야 10:5-19절 /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26.07.28)

●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5절)

어제 본문에서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심판받는지를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남유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니 겸손히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죄는 하나님께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듣지 않고 제 길을 간 것입니다(9:9절).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를 들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앗수르에 대한 심판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도구가 된 앗수르가 마치 자기 힘으로 이룬 것처럼 교만해지자, 하나님이 앗수르마저 심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5절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앗수르는 그 시대 최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앗수르를 ‘내 진노의 막대기’, ‘내 분노의 몽둥이’라 부르십니다. 앗수르가 강한 것은 스스로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쓰시려고 그렇게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않은 나라를 치게 하시고, 노하신 백성을 쳐서 탈취하고 노략하며 짓밟게 하십니다. 곧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친 것은 앗수르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자기가 정복하는 줄 알았지만, 실은 하나님 손에 들린 막대기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내용을 읽으면 “앗수르가 하나님께 멸망당하나 보다”하고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앗수르의 멸망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로 치면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를 향해 “저 나라가 곧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눈에는 그렇게 크고 강한 것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압도하고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까? 아무리 거대하고 견고해 보이는 나라도, 사람도, 문제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 튕기시면, 또한 하나님의 콧김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쓰러진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나를 압도하는 거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앗수르의 속마음입니다. 7절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쓰셨는데, 정작 앗수르는 그 사실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더 많은 나라를 파괴하고 멸절하려는 정복욕만 가득했습니다.

8-11절에서 그 교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앗수르 왕은 자기 고관들이 다 왕과 같다고 뽐내며, 정복한 성읍들을 하나하나 늘어놓습니다. 그러고는 무서운 말을 합니다. 자기가 우상을 섬기는 여러 나라를 쳤는데 그 나라들의 우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더 대단했다며, 그렇다면 예루살렘과 그 우상에게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앗수르의 근본 문제입니다. 앗수르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섬기다 버린 여느 우상들과 똑같은 급으로 여겼습니다. 다른 나라 우상을 짓밟았듯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짓밟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한낱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과 동급으로 여기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교만의 절정입니다.

또한 앗수르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섬기는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결국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신앙의 실패였습니다.

●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15절)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교만한 마음과 거만한 눈을 벌하시겠다고 하십니다. 13절에는 앗수르 왕의 자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모든 것을 ‘내 힘, 내 지혜’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자기가 새의 둥지에서 알을 줍듯 열국의 재물을 손쉽게 거두었고, 아무도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려 저항하지 못했다고 뽐냅니다.

이 교만에 하나님이 던지시는 물음이 15절입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도끼가 나무를 찍습니다. 그런데 그 도끼가 “이 나무는 내가 찍었다”라고 자랑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도끼는 사람 손에 들려 움직였을 뿐입니다. 톱도, 막대기도, 몽둥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구가 그것을 쓰는 사람에게 큰소리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앗수르가 바로 그 도끼였습니다. 하나님 손에 들려 쓰임받았을 뿐인데,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자랑한 것입니다.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해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교만한 자의 말의 특징은 ‘나’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도, 재능도, 시간도, 기회도, 심지어 오늘 하루 숨 쉬는 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더 중요한 것은 그 은혜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교만한 앗수르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그토록 살지고 강성하던 앗수르가 여위어 쇠약해지고, 그 영화가 불에 타 버립니다. 17절이 인상적입니다.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빛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교만한 앗수르에게는 태워 버리는 불이 됩니다. 같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는 따뜻한 빛이 되시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에게는 소멸하는 불꽃이 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울창한 삼림 같던 군대와 영화가 다 타 버려, 마치 병든 자가 쇠약해지듯 스러지고, 남은 나무가 어린아이라도 셀 수 있을 만큼 몇 그루 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정복 이후 점점 쇠퇴해서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가 도끼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이루면 그것을 내 공로로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 자로 살아가는 하루 됩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그 시대에 아무도 무너지리라 상상하지 못한 나라였지만, 하나님의 손안에서는 곧 소멸할 삼림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우리를 압도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이사야 9:8-10:4절 /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26.07.27)

●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들을 일으켜”(11절)

7장에서 하나님은 남유다 왕인 아하스에게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그러면 반드시 회복시키고 책임져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앗수르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을 의지한 결과가 어떠한지를 북이스라엘의 예를 들어 보여주십니다. 남유다에서 예언하던 이사야가, 북이스라엘이 장차 겪을 일을 통해 남유다에게 경고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다 보면 같은 말이 네 번 반복됩니다.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9:12, 17, 21, 10:4). 이 네 번의 반복은 하나님이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와 복을 주시겠다는 것도 아니고 어떤 경우에도 심판하시겠다니,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나 심판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같은 말이 네 번 반복된다는 것은, 네 가지 부분에서 이 백성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하나하나 지적하고 계십니다

첫 번째는, 8절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에 앞서 반드시 말씀을 보내십니다.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9-10절.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합니다. 마음과 귀를 닫고 듣지 않습니다. 대신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경고로 벽돌이 무너지고 나무가 찍히는 일을 겪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너졌으면 더 좋은 것으로 쌓으면 되지”하며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다듬은 돌과 백향목은 벽돌과 뽕나무보다 훨씬 값진 것입니다. 심판을 겪고도 회개하기는커녕 자기 힘으로 더 크게 일어서겠다고 장담하는 교만입니다.

그 결과가 11-12절입니다. 하나님이 대적들을 일으켜 그들을 치게 하시는데,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킵니다. 앞뒤로 협공을 당하는 것입니다. 특히 북이스라엘과 연합했던 아람이 집어 삼키려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것 의지하면 그것이 우리를 삼키려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13절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그리하여도’라고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치시는데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매를 맞으면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돌아보아야 하는데, 여전히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고난이 왔을 때 그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는 사람이 있고, 도리어 하나님에게서 더 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판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14-16절에서 하나님은 머리와 꼬리,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하루 사이에 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머리는 존귀한 자, 곧 장로와 지도자이고, 꼬리는 거짓을 가르치는 선지자입니다. 특히 16절은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고 합니다. 백성을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할 지도자가 도리어 미혹하니, 그를 따르는 백성이 함께 멸망합니다. 지도자의 타락은 그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의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10:3절)

세 번째, 18-19절은 그 악이 어떻게 퍼지는지를 불에 비유합니다. 악행이 불타오르는 것 같아서 찔레와 가시를 삼키고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치솟게 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작은 불씨가 온 숲을 태우듯, 죄악이 온 사회로 번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불탈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해하고, 형제가 형제를 공격하는 일들이 발생합니다. 20-21절.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먹어도 배고프고 왼쪽으로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여, 마침내 “각기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지경에 이릅니다. 심지어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치고, 둘이 합하여 유다를 칩니다.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본래 형제 지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회는 결국 서로를 뜯어먹고 형제가 형제를 치는 데까지 이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면 사람 사이의 관계도 이렇게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10:1-2절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내 백성의 궁핍한 자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번에는 법과 제도를 가진 자들의 죄입니다. 법을 만들고 판결하는 권한을 가진 자들이, 그 힘을 약자를 보호하는 데 쓰지 않고 도리어 약자를 짓밟는 데 씁니다. 불의한 법령을 만들어 가난한 자의 권리를 빼앗고, 과부의 것을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합니다. 1장에서 하나님이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고 하신 요구가, 정반대로 짓밟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마음 아파하시는 죄가 바로 힘없는 자를 억누르는 것입니다.

3-4절에서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디에 두려느냐” 심판의 날이 오면 그 많던 재물과 권세를 어디에 두고 누구에게 도망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약자에게서 빼앗은 그 모든 것이 심판의 날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결국 포로들 아래 구푸리고 죽임당한 자들 아래 엎드러질 뿐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네 번이나 반복되는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는 돌아오길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죄악이 가득합니다. 당장 심판하셔서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기회가 남아 있다는 것을 여전히 말씀하십니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회복시켜주시겠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끝까지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는 심판을 받으면서도 그 매를 드신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돌아가는 사람이 있고 도리어 멀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겸손히 하나님께 돌아가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불의와 죄악이 일상이 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그런 시대 속에서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삶,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말씀의 기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사야 7:1-25절 / 굳게 믿으라(26.07.24)

●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1절)

어제 우리는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받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시대가 바뀌어 아하스 왕 때의 일입니다. 나라가 흔들리는 위기 앞에서 왕이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가를 알게 합니다. 안타깝게도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순종하지 않는 이 유다를 여전히 사랑하시며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임마누엘’이 오늘 본문에서 나옵니다.

아하스는 히스기야의 아버지인데, 남유다 왕 가운데 상당히 악한 왕으로 꼽힙니다. 우상숭배를 일삼았고, 심지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제사까지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일을 행한 왕입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앗수르가 급격히 강성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북쪽의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손을 잡고 앗수르에 맞서려 했는데, 남유다가 여기에 동참하지 않자 두 나라가 연합하여 남유다를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그 소식에 2절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두 강대국이 연합해 쳐들어오니 왕도 백성도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1절 끝에 이미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그들이 아무리 강해도 절대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전히 남유다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도록 이사야를 보내십니다. 3절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왕궁이 아니라 물길이 있는 곳으로 가라 하십니다. 아하스가 거기 있었는데, 아마 전쟁을 준비하며 성의 수원을 점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의 계획으로 위기를 넘겨 보려는 곳으로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 혼자 가라 하지 않으시고 아들인 스알야숩을 데려가라 하십니다. ‘스알야숩’은 “남은 자가 돌아오리라”는 뜻이고, 이사야라는 이름은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두 이름이 두 갈래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구원을 얻지만, 끝까지 불순종하면 나라가 무너지고 다만 남은 자만 돌아오게 되리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 통해 아하스에게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삼가며 조용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하스가 두려워하는 두 나라를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라고 부르십니다. 이미 다 타 버려 연기만 나는 나뭇가지 토막이라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눈에는 온 세상을 뒤흔들 것 같던 세력이, 하나님의 눈에는 곧 꺼질 부지깽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두려움에 호들갑 떨지 말라는 겁니다.

어제 본문에서 우리는 세상의 왕이 죽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하나님이 세상의 강대국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봅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나면 그 문제만 커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그 문제는 연기 나는 부지깽이일 뿐입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 두 나라는 유다를 쳐서 무너뜨리고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계획합니다(6절). 이는 다윗 왕조를 끊어 버리고 자기들 뜻대로 조종할 왕을 앉히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다윗에게 그 왕위가 끊어지지 않으리라 언약하셨습니다. 그래서 7절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사람이 아무리 힘이 있어도 하나님의 언약을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이 구절은 히브리어로 읽으면 의미가 선명해집니다. ‘굳게 믿다’와 ‘굳게 서다’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가 기도 끝에 말하는 ‘아멘’이 그 어근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 말씀은 “굳게 붙들지 않으면 굳게 서지 못한다”, “아멘 하지 않으면 아멘 되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오직 믿음이 하나님 백성의 존재 기초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굳건하지 않으면 견고하게 설 수 없습니다.

●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절)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합니다. 확실하게 이루어주시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하스는 12절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얼핏 들으면 신실한 말로 들리지만, 그의 속마음은 정반대입니다. 징조가 주어지면 하나님 말씀대로 해야 하는데, 그것이 싫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해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를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는 경건한 말을 하면서 속으로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평소에는 잘 믿는 것 같은데 결정적인 순간에는 내 고집대로 하면서, 그것을 그럴듯한 신앙의 언어로 포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남유다를 무너뜨린 뿌리였습니다.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아하스에게 하나님이 친히 징조를 주십니다. 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기 ‘처녀’는 원어로 ‘알마’인데, 혼기에 이른 젊은 여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아하스 당시에 일차적으로 성취되었습니다. 한 아이가 태어나고, 그 아이가 선악을 분별할 나이가 되기 전에 아하스가 두려워하던 두 나라가 황폐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16절). 곧 이 아이의 자라남이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시간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그대로 기록됩니다. 곧 아하스 시대의 한 아이를 통해 주어진 이 징조가, 궁극적으로는 동정녀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핵심입니다.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지금 아하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두 나라를 막아 낼 군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그 확신을 한 아이의 이름에 담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그 약속은, 하나님이 친히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심으로 완전히 이루어졌습니다.

18-25절은 그러나 아하스가 하나님 대신 앗수르를 의지할 때 벌어질 일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애굽의 파리와 앗수르의 벌을 부르시겠다는 것입니다. 의지하려던 그 앗수르가 도리어 벌이 되어 쏘게 되고, 포도원이 있던 자리마다 찔레와 가시가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의지한 결과가 이렇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굳게 믿는 것입니다. 아하스의 눈에 두 나라는 온 나라를 삼킬 세력이었지만, 하나님께는 연기 나는 부지깽이였습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문제만 커 보입니다. 그때 붙들어야 할 말씀이 이것입니다.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

다른 하나는 경건한 말 뒤에 불순종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결정적인 순간에 내 고집을 신앙의 언어로 포장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임마누엘의 약속을 주십니다. 그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고, 말씀에 정직하게 순종하며 살아갑시다.

이사야 6:1-13절 / 높이 들린 보좌(26.07.23)

●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3절)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왜 이 소명 이야기가 1장이 아니라 6장에 놓여 있는지 궁금합니다. 1-5장까지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식처럼 기르셨는데 짐승만도 못하다 하셨고, 정의와 공의 대신 포학과 부르짖음이 가득하다 하셨으며, 여섯 번이나 화 있을진저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뒤에 6장이 이어져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하지 못한 백성이 대조됩니다. 그리고 그 대조 속에서 선지자가 부름을 받습니다.

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은 처음에는 신실했으나, 나라가 강성해지자 교만해졌습니다.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분향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다 나병에 걸렸고, 부정한 자로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생을 마쳤습니다. 52년을 통치한 웃시야 왕의 죽음은 백성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가 본 것은 이 땅의 왕은 죽었지만,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여전히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참 왕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늘 변합니다. 영원할 것 같던 왕들도 때가 되면 다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보좌에서 통치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옷자락 한 자락만으로도 성전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2절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스랍은 ‘불타는 자’라는 뜻을 지닌 천상의 존재입니다. 여섯 날개 중 둘로만 날고, 넷은 자기 얼굴과 발을 가리는 데 씁니다. 왜 그럴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감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존재조차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스랍들이 찬양합니다. 3절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거룩하다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단순히 ‘매우 거룩하다’가 아니라, 비교할 수 없고 견줄 데 없이 거룩하시다는 뜻입니다.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세 번 반복해 강조한 곳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셔서,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마다 진동합니다.

우리는 5장에서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비웃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어디 한번 일해 보시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6장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셔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합니다. 그런 하나님 향한 백성들의 조롱은 큰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진정한 왕으로 통치하시며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광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이사야의 첫마디는 5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좋기만 할 것 같은데, 실제로 그 앞에 서니 “내가 죽게 되었구나”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5장에서 하나님이 여섯 번 ‘화 있을진저’ 하고 선언하셨는데, 이제 이사야가 자기 자신을 향해 ‘화로다’라고 부르짖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을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과 비교할 수 없이 신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보니, 하나님의 일을 하던 그 입술조차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 죄와 부정함을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하십니다. 스랍을 통해 제단의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해주십니다. 7절 하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숯이 ‘제단’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제단은 희생 제물을 잡아 바치고 그 피가 뿌려지는 곳, 곧 희생을 통해 죄가 사해지는 곳입니다. 그 제단의 숯불이 이사야의 입술에 닿자 그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곧 이사야의 정결함은 자기 노력이 아니라 제단의 희생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부정함이 정결하게 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그 자리에서 이사야는 한 음성을 듣습니다. 8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하나님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죄악으로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회복을 위한 말씀을 전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서에 나오는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 이면에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8절 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핍박할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이어지는 9-10절에서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자신을 드립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가 갈꼬, 누가 할꼬”라며 찾으실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제가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다”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자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대답입니다.

이사야가 묻습니다. 11절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언제까지 이 말씀을 전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답은 성읍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고 가옥에 사람이 없으며 토지가 황폐하게 될 때까지라고 하십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신다는 것은 포로로 끌려가 나라가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때까지도 이 백성이 돌이키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3절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여기 ‘그루터기’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나무를 베어 밑동만 남으면 다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면 뿌리가 살아 있고, 거기서 새싹이 돋아납니다. 하나님이 심판으로 나무를 베셨지만 그루터기를 남기셨다는 것,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라 불린다는 점입니다. 이사야에서 ‘씨’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실제로 이 그루터기 이미지는 11장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로 이어집니다. 잘린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그 새싹이 메시아이십니다. 곧 이스라엘의 회복은 남은 자들의 힘이 아니라, 거룩한 씨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무섭게 심판하시지만, 그 심판의 메시지 끝에는 회복의 약속이 놓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목적이 멸망이 아니라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견줄 데 없이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은 우리 노력이 아니라 제단의 숯불, 곧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옵니다.

다른 하나는 부르심 앞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이사야가 들은 것은 “누가 갈꼬”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렇게 물으십니다. 그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고백하며, 힘들고 어려워도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