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4:1-17절 /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26.05.19)

●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2절)

요셉이 베푼 기쁨의 잔치가 끝났습니다. 형제들은 양식을 가득 싣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붙잡혀 있던 시므온도 살아서 만났고, 베냐민도 무사히 함께 갑니다. 걱정했던 모든 문제들이 쉽게 해결되었습니다. 돌아가 당당하게 아버지를 만나면 됩니다. 그런데 성읍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요셉의 청지기가 그들을 쫓아왔습니다. 4절 “너희가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라고 호통을 칩니다.

요셉은 형제들이 떠나기 전 청지기에게 명령했습니다. 양식을 각자의 자루에 가득 채우고, 그들이 가져온 돈을 다시 자루에 넣어라. 그리고 2절 “또 내 잔 곧 은잔을 그 청년의 자루 아귀에 넣고”라고 했습니다. 왜 요셉은 이런 일을 꾸몄을까요? 복수가 아닙니다. 요셉은 이미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라헬의 자녀 요셉 한 명과 다른 어머니의 자녀 열 명. 그 열 명이 한 명을 시기해서 노예로 팔았습니다. 지금도 구조가 같습니다. 라헬의 자녀 베냐민 한 명과 다른 어머니의 자녀 열 명. 만약 형들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면, 베냐민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요셉은 과거 자신이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상황을 만들어 형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려 했습니다. 미래 이룰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은잔 사건이 일어난 이유입니다.

청지기가 형들을 붙잡았습니다. 누가 주인의 은잔을 훔쳐갔는지를 묻자, 형들은 당연히 부인합니다. 그러면서 확신있게 말했습니다. 9절 “당신의 종들 중 누구에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우리는 내 주의 종들이 되리이다”

그러자 청지기는 조건을 조금 낮춰 제시합니다. 10절 “그것이 누구에게서든지 발견되면 그는 내게 종이 될 것이요 너희는 죄가 없으리라” 그리고 자루를 하나씩 열기 시작했습니다. 큰 형부터 차례로 열어보았는데 마지막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베냐민이 가장 놀랐을 것입니다. 자기는 하지 않았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것입니다. 형들도 당황했을 것입니다. 어찌 됐든 상황은 분명해졌습니다. 베냐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왔습니다.

이 상황이 형들에게 선택의 순간입니다. 청지기가 말했습니다. 발견된 그 사람만 종이 되면 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돌아가도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베냐민만 남기고 열 명은 그냥 가도 됩니다.

22년 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요셉도 구덩이에 던지고 팔아버렸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지금도 베냐민을 남기고 가면서 아버지에게 사실대로 말하면 됩니다. 베냐민이 도둑질을 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면 됩니다. 그런데 13절 “그들이 옷을 찢고” 형들이 옷을 찢었습니다. 슬픔과 비통함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데리고 요셉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막내를 홀로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형들이 달라져 있습니다. 함께 요셉 앞에 엎드립니다.

●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16절)

14절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유다가 앞장 섭니다. 과거에 요셉을 노예로 팔자고 제안했던 사람이 유다였습니다. 그 유다가 이제 베냐민을 위해 위험을 무릅씁니다.

16절 “유다가 말하되 우리가 내 주께 무슨 말을 하오리이까 무슨 설명을 하오리이까” 변명할 말이 없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이어서 한 말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찾아내셨으니” 이것은 과거 요셉에게 저질렀던 그 죄를 하나님이 지금 드러내고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유다는 지금 자신들이 겪고 있는 이 상황이 그때 요셉에게 했던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죄는 묻어둔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드러내십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 중 하나는 죄의 무게입니다. 형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일은 오랜 과거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는 사라지지 않고 형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42장에서 형들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이미 형들의 양심이 그 죄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죄를 저지르는 것은 순간이지만, 그 무게는 긴 시간 동안 사람을 누릅니다. 형들이 오늘 하지 않아도 될 두려움을 가지고 살았던 것처럼, 해결되지 않은 죄는 삶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죄를 두려워하며 멀리해야 할 이유입니다.

유다가 계속 말합니다.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 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 베냐민 혼자 종이 되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함께 책임을 지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들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유다와 형들이 보여준 모습이 있습니다. 베냐민만 남기고 도망갈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돌아왔고, 함께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숙함입니다.

나만 살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은 미성숙함입니다. 함께 짐을 지고, 문제 앞에서 도망가지 않고, 내가 수고스럽더라도 약한 사람 곁에 서는 것, 이것이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유다가 그렇게 했습니다. 요셉을 판 유다가 이제 베냐민 곁에 섰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죄를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저지른 죄가 오늘까지 그들을 무겁게 했습니다. 죄는 잊혀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때가 되면 드러내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함께 짐을 지는 성숙함입니다. 혼자 살기 위해 누군가를 희생시키지 않고, 약한 사람 곁에 함께 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습이고, 성숙한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43:16-34절 /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26.05.18)

●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16절)

베냐민이 왔습니다. 요셉이 조건으로 내걸었던 그 막내가 우여곡절 끝에 형들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요셉은 베냐민을 보면서 형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베냐민은 살아 있었고, 아버지도 생존해 계셨습니다. 요셉은 청지기에게 명령합니다. 16절 “이 사람들을 집으로 인도해 들이고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이 사람들이 정오에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니라”

총리의 집으로 초대받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형제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기쁨 대신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18절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자신들이 모르는 곳으로 끌려간다는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전번에 우리 자루에 들어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는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로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노예로 삼고 빼앗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요셉을 노예로 팔았던 형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노예로 팔릴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런 왜곡이 어디서 왔을까요? 죄책감에서 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형들은 과거에 요셉을 팔았고, 그 일이 마음속에서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애굽에 왔었습니다. 처음 왔을 때 삼일을 갇혀있으면서 그 잘못이 떠올랐고 후회하였습니다. 어떤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이 그 죄와 연결되어 보이고, 하지 않아도 될 두려움이 쌓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들은 청지기에게 달려가 이전에 자루에 돈이 들어 있던 일을 고백합니다. 사실은 요셉이 호의로 넣어준 것이었습니다. 오해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죄의 짐을 지고 있으면 선의도 의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관계에서 신뢰가 깨지면 없는 문제도 생기고, 좋은 것도 나쁜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진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정직함이 하지 않아도 될 두려움과 오해에서 우리를 지킵니다.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의 청지기가 말합니다. 23절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요셉의 청지기가 하나님을 언급하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는 요셉을 곁에서 보면서 요셉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당당하게 하나님을 선포하던 요셉, 어떤 자리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요셉. 그 요셉 곁에서 이 청지기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과거 요셉도 보디발의 집 청지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청지기였는데 지금 요셉 옆에 신실한 청지기가 함께 합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역할입니다. 불안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해주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전하는 청지기 역할을 감당하는 것,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30절)

요셉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형제들이 예물을 드리고 26절 하 “땅에 엎드려 절하니” 베냐민을 포함한 열한 명이 절을 했습니다. 요셉이 17살에 꾸었던 꿈, 열한 볏단이 자기 볏단을 향해 절하는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입니다.

요셉이 먼저 아버지 안부를 물었습니다. 가장 궁금한 것이었습니다. 형들이 대답했습니다. 28절 “아버지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하였나이다” 아버지가 살아계시다는 것을 확인한 요셉의 시선이 베냐민을 향합니다. 29절 “요셉이 눈을 들어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을 보고” ‘자기 어머니의 아들, 자기 동생 베냐민’이라는 표현이 애틋합니다. 어머니 라헬의 자녀는 요셉과 베냐민, 두 명뿐입니다. 가장 사랑했고 가장 생사가 궁금했던 동생이었습니다. 요셉이 축복합니다. “소자여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노라”

오늘 본문에서 베냐민의 나이는 20대 중후반쯤이었고 이미 결혼해 자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눈에는 여전히 어린 동생이었습니다. 얼마나 그리워했는지가 이 한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30절 “요셉이 아우를 사랑하는 마음이 복받쳐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자신이 경험한 일을 생각하면서 그런 형들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노심초사했는데 자신의 눈 앞에 서 있습니다. 안심됩니다. 눈물이 쏟아집니다. 얼굴을 씻고 다시 나와 음식을 차리라고 명령합니다.

잔치가 차려졌는데 신기한 장면이 펼쳐집니다. 32절 “그들이 요셉에게 따로 차리고 그 형제들에게 따로 차리고 그와 함께 먹는 애굽 사람에게도 따로 차리니” 세 번이나 반복되는 말이 “따로 차리고”입니다. 함께 모여 먹는 잔치인데 밥상이 세 개로 나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애굽 사람은 히브리 사람과 같이 먹으면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애굽 사람들에게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부정한 일이었습니다. 애굽은 다른 민족에 대한 강한 우월감이 있었고, 섞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지금 야곱이 머물고 있는 가나안땅은 이스라엘과 섞이기를 원합니다. 디나 사건 때 세겜 사람들의 요구가 그랬습니다. 서로 자녀들을 결혼시키고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자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애굽은 다릅니다. 애굽 사람들이 히브리인들과 섞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센 땅에 따로 살면서, 애굽 안에 있지만 애굽에 동화되지 않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시기 위해 애굽을 선택하신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정직함이 두려움을 막는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이 하지 않아도 될 두려움으로 고통받은 이유는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들 앞에서도 정직하게 사는 것이 우리를 불필요한 두려움과 오해에서 지켜줍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요셉의 청지기가 두려워하는 형제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했듯, 우리도 불안한 사람들 곁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전하는 청지기가 됩시다.

창세기 42:1-17절 / 꿈을 생각하고(26.05.15)

●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양식 사러 간 자 중에 있으니”(5절)

본문의 무대가 바뀝니다. 지금까지 애굽에서 요셉이 총리가 되는 이야기를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가나안 땅 야곱의 가정으로 시선이 이동합니다. 두 곳은 약 400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모릅니다. 요셉이 살아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먼 곳에서 야곱의 가족을 위한 일, 즉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일을 이미 완성해 놓고 계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내가 볼 수 있는 곳에서만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느끼지 못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보여줍니다.

가나안 땅도 기근이 심했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위기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나섭니다. 1절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바라보기만 하느냐” 야곱의 답답함이 담긴 말입니다. 여전히 가정이 온전하지 않습니다.

이 형제들이 과거에는 동생 요셉을 제거하는 일에는 하나가 되어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위기 앞에서는 누구 하나 나서지 않습니다. 그 사이 13년이 흘렀습니다. 요셉은 17살 소년에서 30세 장년이 되었고, 고난의 시간 동안 신앙이 깊어지고 사람이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형들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은 사람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위기 앞에서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서로 눈치만 봅니다. 야곱이 말합니다. 2절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사오라. 그러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아버지의 말에 아들들이 애굽으로 갑니다.

그런데 요셉의 형 열 사람만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막내 베냐민은 보내지 않았습니다. 4절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을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야곱은 왜 베냐민을 붙잡았을까요? 지금 베냐민의 나이는 20대 중반 정도 됩니다. 본문은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않았다”와 “재난” 이야기를 연결해서 합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야곱의 마음속에 하나의 불안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요셉의 죽음에 혹시 형들이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심입니다. 형들을 만나러갔던 요셉이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지만 야곱의 마음에 남아있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형들과 함께 보내면 베냐민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여전히 편애하고 있습니다. 전에는 요셉을 편애해서 채색 옷을 입혔습니다. 이제는 라헬의 마지막 아들 베냐민에 대한 집착이 커졌습니다. 야곱이 이 가정에서 겪어온 상처와 편애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17절)

형 열 명이 애굽에 도착해서 총리 앞에 섰습니다. 6절 하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17살에 꾸었던 꿈, 형들의 볏단이 자기 단을 둘러서서 절하는 꿈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형들은 자신들이 절하고 있는 상대가 요셉인 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알았습니다. 9절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 꿈을 기억했습니다. 아직 아버지도 없고 막내 베냐민도 없으니 완전히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방향은 분명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형들이 구덩이에 요셉을 던지면서 했던 말이 있습니다. 37:20절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나님이 주신 꿈을 사람이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그 꿈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알아보았지만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3년의 시간이 흘렀고, 채색 옷을 입고 아버지 집에 있던 소년이 애굽의 총리 복장을 하고 있으니 상상조차 못 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엄하게 말했습니다. 7절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리고 정탐꾼이라고 몰아붙였습니다. 형들이 당황하며 자신들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13절에 이 말이 나옵니다. “막내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하나는 없어졌다”고 하는데 자신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얼마나 마음이 찔렸을까요?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은 12명의 형제들이 완전체를 이루는 나라입니다. 형제들이 형제를 제거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을 본문은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말하고 행동하는 이유는 복수심 때문이 아닙니다. 요셉은 이미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고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숨기고 엄하게 대한 것은 이 가정의 더 깊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형제가 형제를 제거했던 그 상처와 죄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지 못한 채로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요셉은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라 영적인 회복을 위해 형들을 이끌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요셉은 하나의 조건을 제시합니다. 막내를 데려오면 정탐꾼이 아님을 믿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7절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마치 이 장면은 요셉을 감옥과 같은 구덩이에 던진 상황과 연결이 됩니다. 요셉을 구덩이에 던졌던 형들이 이제 자신들이 구덩이에 갇혔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이 3일 동안 형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13년 전 구덩이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요셉의 목소리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이 3일의 시간은 형들이 자신들이 한 일의 무게를 직접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회복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족이 전혀 모르는 애굽에서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도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다른 하나는 육신의 양식보다 영적인 회복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형들은 먹을 것을 구하러 왔지만, 요셉은 그들에게 더 중요한 것을 주려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구하는 것 너머의 더 깊은 필요를 알고 채우십니다.

창세기 41:37-57절 / 총리가 된 요셉(26.05.14)

●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39절)

요셉이 말을 마쳤습니다. 꿈 해석부터 대책까지, 죄수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습니다. 37절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가 이 일을 좋게 여긴지라” 처음에는 의심의 눈초리였겠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 요셉이 당당하게 말을 이어갈수록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해결되지 않았던 불안과 혼란이 한 번에 정리되었습니다.

바로가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38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오” 바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요셉을 보면서 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셉이 가진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신분도 없고 배경도 없고 재물도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최고 권력자의 입에서 이 고백이 나오도록 했습니다.

39절에 바로가 말합니다.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요셉이 바로에게 명철하고 지혜 있는 한 사람을 세우라고 했는데, 바로가 보니 요셉이 그 사람입니다. 애굽 모든 현인이 해석하지 못한 꿈을 해석하고 대책까지 내놓은 사람, 이 나라에서 가장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은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이 청년이었습니다.

40-42절, 바로가 요셉에게 자기 집을 다스리게 하고, 인장 반지를 빼어 요셉의 손에 끼우고, 세마포 옷을 입히고, 금 사슬을 목에 걸어줍니다. 41절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로 세우노라” 인장 반지는 왕의 권위를 대행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왕의 명령이 각 지역으로 전달될 때 이 반지로 도장을 찍어야 효력이 생겼습니다. 바로가 자기 인장 반지를 요셉에게 준 것은 전적인 신임의 표시였습니다.

요셉의 세마포 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그의 인생을 옷으로 돌아보면 이렇습니다. 아버지에게 채색 옷을 받았고, 형들에게 그 옷이 벗겨졌습니다. 이후 노예의 옷을 입었고, 죄수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세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하나님이 요셉을 이끌어 오신 여정입니다. 요셉이 노력해서 총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노예 출신 이방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한 나라의 총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어 요셉은 버금 수레에 탔고 무리가 앞에서 소리 지릅니다. 43절 “엎드리라!” 요셉의 꿈이 생각납니다. 볏단들이 자기를 향해 절하는 꿈,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절하는 꿈. 그 꿈 때문에 형들에게 미움받고 노예로 팔렸던 요셉에게, 이제 애굽의 온 백성이 엎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머지 않아 형들도 엎드릴 것입니다.

45절에 바로가 요셉에게 애굽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사브낫바네아’ 학자들 사이에 번역이 다양하지만, 그 의미는 대체로 “하나님이 말씀하셨고 그는 살아계신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이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왕이, 요셉의 삶을 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고백을 이름으로 새긴 것입니다.

또 바로는 온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요셉의 아내로 주었습니다. ‘온’은 애굽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 도시 중 하나였고, 그곳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준다는 것은 요셉을 애굽 사회에서 최고 신분으로 인정한다는 표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그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모든 환경까지 갖추어 주셨습니다.

●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 잊어버리게 하셨다”(51절)

요셉이 총리가 되므로 많은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45절 하 “요셉이 나가 애굽 온 땅을 순찰하니라” 46절 끝에도 같은 표현이 반복됩니다. 총리가 되자마자 권력을 누리는데 집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바로에게 제안한 대책을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7년 풍년 동안 곡식을 거두고, 각 성읍에 저장했습니다. 49절 “쌓아둔 곡식이 바다 모래같이 심히 많아 세기를 그쳤으니 그 수가 한이 없음이었더라” 요셉이 얼마나 철저하게 이 일을 감당했는지를 보여주는 묘사입니다. 낮은 자리에서도 성실했던 요셉은, 높은 자리에서도 성실했습니다.

풍년이 지나는 동안 요셉에게 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요셉은 아들의 이름에 자신의 신앙 고백을 담았습니다. 첫째 아들 이름은 므낫세입니다. 51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형들에게 팔린 상처, 노예의 고통, 억울한 감옥 생활.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치유하셨다는 고백입니다. 요셉은 상처를 억지로 잊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총리가 되어 돌아보니 하나님이 이 모든 과정을 이끌어 오셨다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그 상처가 자연스럽게 치유된 것입니다.

둘째 아들 이름은 에브라임입니다. 52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고난의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는 고백입니다. 바로 왕이 요셉을 총리로 세웠지만, 요셉은 그 위에서 하나님이 이루셨다고 고백합니다. 이 두 이름 속에 요셉의 신앙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높인 것은 바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나의 고난을 치유하신 것도 하나님이시다.

53-57절, 7년 풍년이 끝나고 흉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상대로 극심한 기근이 온 땅을 덮었습니다. 사람들이 바로에게 부르짖었고, 바로는 요셉에게 가라고 했습니다. 요셉이 창고를 열었고, 애굽 사람들이 곡식을 샀습니다. 57절 “각국 백성도 양식을 사려고 애굽으로 들어와 요셉에게 이르렀으니 기근이 온 세상에 심함이었더라”

요셉 한 사람의 지혜와 성실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애굽 백성들만 아니라 각국 백성들을 살립니다. 이 과정이 야곱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오는 길을 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세우심으로 이스라엘 민족 형성이라는 더 큰 계획을 진행하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첫째, 하나님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꿈을 이루십니다. 요셉에게는 혼돈의 시간이었지만 하나님은 완전하신 계획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요셉의 인생을 이끄셨습니다. 나와 우리 가정, 그리고 공동체 역시 이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있음을 신뢰합시다.

두 번째는 명철하고 지혜있는 하나님의 한 사람이 필요합니다. 내가 머문 자리에서 생명이 흐르게 하고, 평화를 이루며, 문제를 해결해가는 하나님의 한 사람으로 오늘 하루도 살아갑시다.

창세기 41:25-36절 / 정하시고 행하시는 하나님(26.05.13)

●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이다”(25절)

감옥에서 끌려 나온 요셉이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고 바로 앞에 섰습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최고 권력자 앞에 선 것입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해석하지 못했던 꿈을 요셉이 해석합니다.

요셉의 첫마디가 이렇습니다. 25절 “바로의 꿈은 하나라” 바로는 두 가지 꿈을 꾸었습니다. 살찐 암소와 파리한 암소, 충실한 이삭과 마른 이삭. 내용이 달랐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두 꿈이 하나라고 선언합니다. 26절 끝에서도 “그 꿈은 하나라”고 반복합니다. 애굽의 점술가들과 현인들이 해석에 실패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두 꿈을 따로따로 설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두 꿈이 하나의 의미를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보이기시 위함입니다. 바로가 이 첫마디에 아마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납득되지 않았던 그 혼란이 풀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셉의 해석은 명확합니다. 살찐 일곱 암소는 7년 풍년, 파리한 일곱 암소는 7년 흉년을 의미합니다. 충실한 일곱 이삭도 7년 풍년, 마른 일곱 이삭도 7년 흉년입니다. 두 꿈이 같은 미래를 두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고 32절 요셉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께서 꿈을 두 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이다” 같은 꿈을 두 번 꾸게 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하나님의 강조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25절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니라”, 28절 “하나님이 그가 하실 일을 바로에게 보이심이라”, 32절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으니 하나님이 속히 행하시리이다”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요셉이 바로 앞에서 계속 하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애굽 왕, 바로는 태양신 라(Ra)의 아들을 자처하는 존재였습니다. 자신이 신과 같은 권위를 가졌다고 믿었습니다. 그런 바로 앞에서 요셉은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이 정하시고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통치자이심을 선포합니다.

이처럼 요셉의 하나님 중심 신앙이 아름답습니다. 13년, 그가 겪은 고난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더 놀랍습니다. 채색옷을 입던 신분에서 형들의 미움을 받아 이방 땅에 혈혈단신 노예로 팔렸습니다. 한 가정 총무로 인정을 받는가 싶었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풀려날 절호의 기회가 있었지만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분노와 상처를 품고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이방 땅 한 가운데, 그것도 가장 밑바닥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형통의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 정신을 배우고, 죄를 배우는 삶이 아닌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신뢰하고 확신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의 모습과 결과가 오늘 본문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환경과 문제가 우리를 만들어가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 역시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원지 않지만 밑바닥으로 내려갈 때도 있습니다. 환경이 어려울 때도 많습니다. 이때 분노와 원망을 안고 살아가지 않고, 언제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인내하는 가운데 하나님 백성의 삶을 배우고 성숙하는 과정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이제 바로께서는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33절)

꿈 해석을 마친 요셉이 멈추지 않고 33절부터 바로에게 대책까지 제시합니다. 바로는 꿈 해석만 요청했는데, 요셉이 해결책까지 내놓은 것입니다. 요셉은 애굽과 바로를 향한 긍휼의 마음으로 이 말을 했습니다. 대책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세워 애굽 땅을 다스리게 하십시오(33절). 둘째, 나라 곳곳에 감독관들을 두어 7년 풍년 동안 곡식의 5분의 1을 거두어들이십시오(34절). 여기서 5분의 1이라는 수치가 눈에 띕니다. 너무 적으면 흉년을 버틸 수 없고, 너무 많으면 사람들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요셉이 계산한 5분의 1은 풍년의 풍요를 누리면서도 흉년을 대비하는 균형 잡힌 수치였습니다. 셋째, 그 곡물을 왕의 손에 돌려 각 성읍에 쌓아두십시오(35절). 개인이 아닌 왕의 권위 아래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36절 “이와 같이 그 곡물을 이 땅에 저장하여 애굽 땅에 임할 7년 흉년에 이 땅이 이 흉년으로 말미암아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이 대책을 듣는 바로는 놀랐을 것입니다. 꿈을 해석하러 온 죄수 청년이 국가 운영 대책까지 술술 내놓고 있습니다. 요셉이 단순한 꿈 해석자가 아닌, 탁월한 지혜와 통찰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요셉이 이런 탁월한 대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 역할을 하며 한 가정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배웠고, 감옥에서 왕의 신하들을 섬기며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익혔습니다. 고난의 자리 하나하나가 사실은 하나님이 요셉을 훈련시키시는 현장이었습니다. 요셉은 그 고난의 시간을 원망과 불평으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붙잡고, 그 자리에서 깨어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을 때 준비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풍년과 흉년이 있습니다. 풍년의 때에 교만해지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흉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흉년의 때에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이 과정을 통해서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 이것이 요셉에게서 배워야 할 지혜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행하신다”는 확신입니다. 32절의 고백처럼, 하나님이 작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세상이 아무리 거대해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일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고난의 자리에서 준비하는 삶입니다. 요셉은 고난 속에서 세상을 닮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붙잡으며 준비했습니다. 우리의 고난도 하나님이 우리를 빚어가시는 과정입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붙잡고, 깨어 준비하는 사람이 마침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됩니다.

창세기 41:1-24절 /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26.05.12)

● “만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1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은 지 2년이 지났습니다. 감옥에서 그 2년은 요셉에게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요? 유일한 희망이 끊어진 채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2년 동안 쉬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정확한 때에 정확한 방식으로 일하고 계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절 “만 2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꾼즉” 하나님이 움직이신 대상은 바로 왕이었습니다. 그 당시 애굽은 온 세상을 지배하는 강대국이었고, 바로는 그 나라의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반면 요셉은 히브리 출신의 노예요 죄수였습니다. 이 둘의 거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바로에게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요셉 한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장차 이루실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최고 권력자를 움직이신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를 만나고 싶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가 요셉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하나님이 만들어 가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위해 어떤 사람도 움직이실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일, 어느 문도 열리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상황도 만드시고 사람도 움직이십니다. 단, 우리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는 같은 날 밤 두 가지 꿈을 꿉니다. 첫 번째 꿈은 나일 강가에서 시작됩니다. 살지고 아름다운 일곱 암소가 강에서 올라와 갈밭에서 뜯어먹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흉하고 파리한 일곱 암소가 올라오더니 살찐 일곱 암소를 삼켜버렸습니다. 너무 놀란 바로가 잠에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더니 두 번째 꿈을 꾸었습니다. 이번에는 한 줄기에서 무성하고 충실한 일곱 이삭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가늘고 동풍에 말라버린 일곱 이삭이 나오더니, 그 가는 이삭이 충실한 일곱 이삭을 삼켜버렸습니다.

여기서 ‘소’와 ‘이삭’은 그 당시 애굽 사람들의 주요 양식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나일강은 애굽 사람들이 신으로 섬길 만큼 생명과 풍요의 근원으로 여기던 강이었습니다. 바로는 이 꿈이 나라의 미래와 연결된 꿈이라고 직감했습니다. 같은 내용의 꿈을 두 번 꾸게 하신 것도 중요합니다. 앞서 요셉도 같은 내용의 꿈을 두 번 꾸었습니다. 하나님이 한 꿈을 반복하실 때는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라는 뜻입니다.

8절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하여 사람을 보내어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꿈을 말하였으나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었더라” 바로 곁에는 그 나라 최고의 지혜자들이 있었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사람들, 왕의 최측근에 있는 가장 뛰어난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아무도 바로의 꿈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해석은 내놓았겠지만 바로가 이해할만한 해석을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꿈 속에 담긴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시 최강대국의 최고 지혜자들도 하나님이 주신 꿈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의 해석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지혜가 세상 최고의 지혜를 넘어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요셉이 이 자리에 서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16절)

아무도 해석하지 못한 상황에서 술 맡은 관원장이 바로에게 나아왔습니다. 9절 “내가 오늘 내 죄를 기억하나이다” 여기서 ‘죄’는 2년 전 바로의 진노를 사서 감옥에 갇혔던 불미스러운 일과 동시에 요셉이 간곡히 부탁했음에도 잊고 지낸 잘못을 기억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2년 전 감옥에서 있었던 일을 꺼냅니다. 자기 꿈을 해석해 준 히브리 청년, 그리고 그 해석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를 바로에게 했습니다.

바로 입장에서는 히브리 노예 출신 죄수를 부르는 것이 내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14절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니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놓은지라”

여기서 ‘옥’은 히브리어로 ‘구덩이’를 뜻하는 단어와 연결됩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채색 옷이 벗겨지고 던져졌던 그 구덩이, 그리고 그 후 갇혀 있었던 이 구덩이에서 요셉이 나온 것입니다. 수염을 깎고 옷을 갈아입은 요셉, 구덩이에서 나와 새 옷을 입는 과정은 요셉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장면입니다.

바로가 요셉에게 말했습니다. 15절 “내가 꿈을 꾸었으나 그것을 해석하는 자가 없더니, 들은즉 너는 꿈을 들으면 능히 푼다 하더라” 이 말 속에는 의심도 있고 기대도 있습니다. 히브리 죄수 청년을 믿어야 하는지 확신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대답이 놀랍습니다. 16절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억울하게 갇혀 있다가 왕 앞에 나왔으면 먼저 자기 억울함을 토로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 능력을 드러내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이것이 13년의 연단이 만들어 낸 요셉의 신앙이었습니다. 17살에 꿈을 꾸던 소년이 고난의 시간을 거치며,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을 높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는 요셉에게 다시 꿈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1-7절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19절 “그같이 흉한 것들은 애굽 땅에서 내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이라”와 21절 “먹었으나 먹은 듯 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흉하더라”는 앞부분에 없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바로의 불안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정확한 때에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2년이라는 시간이 요셉에게는 절망의 시간처럼 느껴졌겠지만, 하나님은 그 시간 내내 정확한 때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사람이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요셉을 위해 최고 권력자를 움직이십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요셉이 왕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높였을 때, 하나님이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내가 앞서가려 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을 신뢰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