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11 | 매일성경
●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4절)
요셉의 삶은 계속 아래로 내려갑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자리에서 노예로 팔렸고, 노예로 인정받기 시작했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끝으로 가는 것 같은 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1절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이 두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성경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는 중요합니다.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는 단순히 왕의 식탁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고대 왕국에서는 왕을 독살하려는 음모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마시는 술과 먹는 음식을 관리하는 사람은 왕이 가장 신뢰하는 최측근이어야 했습니다. 이들은 왕의 일상을 가장 가까이서 돕고, 중요한 일을 왕과 함께 의논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3절에서 요셉이 갇힌 그 감옥으로 들어왔습니다. 요셉이 평소에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을 요셉 곁으로 보내셨습니다. 요셉이 갇혀 있는 그 자리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가장 필요한 만남의 장소가 된 것입니다.
4절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 들게 하니라” 보디발이 요셉에게 이 왕의 신하들을 섬기는 일을 맡겼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으면서도, 요셉은 여전히 신임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집에 있을 때도, 보디발의 종으로 있을 때도,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한결같이 성실했습니다. 좋은 자리에서 성실한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낮아진 자리,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도 성실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요셉은 그 자리에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고 모든 일이 잘되면 그때 열심히 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반대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성실하게 감당할 때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요셉의 삶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여러 날이 지났습니다. 어느 날 아침 요셉이 보니 두 관원장의 얼굴에 근심 빛이 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 나는 내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묻습니다. 7절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빛이 있나이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자기 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요셉은 자기와 함께 갇힌 사람들을 돌아보았고, 그들의 근심 이유를 묻습니다. 그런데 이 한마디가 하나님의 큰 계획을 이루는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이 묻지 않았다면 두 관원장은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종종 이렇게 작은 관심 한 마디를 통해 시작됩니다.
두 관원장이 대답했습니다. 8절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그때 요셉이 말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이 한마디가 요셉의 신앙을 말해줍니다. 현재 요셉의 나이는 28세입니다. 17세에 노예로 팔려와 11년의 고난을 거치며 요셉의 신앙이 어디까지 왔는지가 이 말 한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자신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이 해석도 해주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 셋이 있고, 포도가 열려 즙을 짜서 바로의 잔에 드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요셉이 해석했습니다. 13절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의 전직을 회복시키리니” 3일 안에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좋은 소식이었습니다. 요셉이 해석을 좋게하는 것을 보고 떡 굽는 관원장도 자기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머리에 광주리 셋이 있고, 그 안의 음식을 새들이 와서 먹는 꿈이었습니다. 요셉의 해석은 달랐습니다. 19절 “지금부터 사흘 안에 바로가 당신의 머리를 들고 당신을 나무에 달리니 새들이 당신의 고기를 뜯어먹으리이다” 같은 사흘이었지만 결말이 정반대였습니다. 죽게 된다는 겁니다.
사흘째 되는 날은 바로의 생일이었습니다. 바로가 신하들을 불렀고, 요셉의 해석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전직을 회복했고, 떡 굽는 관원장은 나무에 달렸습니다. 22절 하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더라”
꿈을 해석해주며 요셉은 술 맡은 관원장에게 부탁했습니다. 14절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감옥에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술맡은 관원장이 자신을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23절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더라” 2년 동안 잊었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내가 도움을 준 사람이 나를 잊습니다. 내가 걸었던 희망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잊었지만,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술 맡은 관원장이 그때 요셉을 기억해 감옥에서 꺼내 주었다면, 요셉은 거기서 끝이었을 것입니다. 자유는 얻지만 애굽의 통치자인 바로 왕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2년 뒤, 바로 왕이 꿈을 꾸었고 아무도 해석하지 못했을 때,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떠올렸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바로 왕 앞으로 곧장 나아가게 됩니다. 사람이 잊은 그 2년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가장 정확한 때를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의 성실함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억울한 자리에서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도 성실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자리를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곳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이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걸었던 희망이 사라진 것 같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완전한 방식으로 이루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그 하나님을 신뢰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6.05.08 | 매일성경
●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20절)
요셉이 아버지의 요청을 따라 형들을 만나러 갑니다. 세겜까지 갔지만 만날 수 없었고, 다시 도단으로 가서 드디어 형들과 만납니다. 형들이 보였을 때 요셉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하지만 형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채색옷을 입은 요셉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이때 형들은 말합니다. 19절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형들이 가장 싫어했던 것이 바로 요셉의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들이 요셉에게 절한다는 그 꿈, 어쩌면 정말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분노와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20절 끝에 형들이 말합니다.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볼 것이니라” 요셉을 죽이면 그 꿈도 끝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형들의 착각입니다. 요셉의 꿈은 요셉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계획에 맞서도,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형들은 이미 작전을 세워 두었던 것 같습니다. 멀리서 요셉을 보자마자 죽일 계획이 나왔고, 아버지를 어떻게 속일지까지 구체적으로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사람이 제동을 겁니다. 장자 르우벤입니다. 21절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을 해치지 말자” 왜 르우벤이 이런 제안을 했을까요? 그 당시 장자에게는 동생들의 생명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르우벤에게는 또 다른 사정이 있었습니다. 앞서 그는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이미 아버지 눈 밖에 난 자신이, 이번에 장자로서 역할을 다함으로써 그 잘못을 만회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르우벤의 제안은 이것이었습니다. 죽이지 말고 그냥 구덩이에 던지자. 그는 나중에 몰래 돌아와 요셉을 구해낼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이 장면 속에서, 하나님은 르우벤의 마음을 움직여 요셉의 생명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오자마자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이 구덩이는 빗물을 모아두기 위해 판 저수조로, 깊이가 6-8미터에 달하고 입구는 좁고 안은 넓어서 한 번 들어가면 혼자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당한 일이 얼마나 당황스럽게 무서웠을까요? 분명 요셉이 구덩이 안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형들이 애굽에서 요셉에게 이 사실을 실토할 때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우리가 듣지 아니하였다”(창 42:21)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형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앉아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이 이런 일을 만들어냅니다. 형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시기와 분노가 쌓이면 사람은 이런 일을 저지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36절)
음식을 먹다가 유다가 상단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마엘 사람들이 낙타에 짐을 싣고 애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유다가 말합니다. 26절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 죽이는 것보다 팔아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형들이 유다의 말에 따랐습니다. 27절 끝에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이 장면에서 유다가 서서히 형제들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이 보입니다.
요셉은 은 이십에 팔렸습니다. 이 장면은 훗날 예수님이 은 삼십에 팔리시는 것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와 겹쳐 보이는 지점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세상으로 나왔고, 자기 사람들에게 배신당했고, 종이 되셨습니다.
형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완전범죄로 만들기 위해 채색옷을 사용합니다. 31절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리고 아버지에게 가져가 물었습니다. 32절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여기서 성경은 중요한 단어 하나를 사용합니다. ‘숫염소’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일 때도 ‘염소 새끼’를 사용했습니다(27:9절). 어머니 리브가가 염소 요리를 만들었고, 야곱은 그 가죽을 몸에 붙이고 형 에서처럼 위장해서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때도 염소였고, 지금도 염소입니다. 야곱이 염소로 아버지를 속였듯이, 이제 야곱의 아들들이 숫염소로 야곱을 속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연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원칙이 이렇게 세대를 넘어 반복됩니다.
야곱은 옷을 알아보고 악한 짐승에게 공격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충격이 어떠했을까요? 34절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아들들이 위로해도 위로받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태연하게 아버지를 위로하는 형제들의 모습이 이 본문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도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36절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요셉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것도 바로의 친위대장 집에 팔렸습니다. 그리고 이 집에서부터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의 시기와 분노와 거래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혼란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습니다. 르우벤의 마음을 움직여 요셉의 죽음을 막으셨고, 상단이 지나가는 타이밍을 맞추셨고, 요셉을 국무총리로 가는 길의 첫 번째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끝난 것 같을 때, 하나님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십니다. 야곱도 몰랐고, 형들도 몰랐고, 요셉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고,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은 멈추지 않습니다.
2026.05.07 | 매일성경
●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3절)
창세기 36장에서 에서의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37장이 시작되면서 무대가 바뀝니다. 에서의 후손은 왕을 세우고 강력한 나라를 이루었지만, 이제 성경은 다시 야곱의 가정으로 돌아옵니다. 초라해 보이고 문제 많은 그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은 화려한 에서의 나라가 아니라, 바로 이 가정이었습니다.
2절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이 특이합니다. 야곱이 누구를 낳고 누구를 낳았다는 계보가 아니라, 갑자기 요셉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야곱의 가정이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어 가는 이야기에서, 그 결정적인 역할을 요셉이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그때 열일곱 살이었습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열한 번째,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첫아들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을 형들과 함께 양을 치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형들을 감독하고 살피는 역할을 맡겼던 것 같습니다. 요셉은 형들이 잘못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을 단순한 고자질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시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12절을 보면 형들이 세겜으로 양을 치러 갔다고 나옵니다.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가 성폭행당했던 땅이고, 야곱의 아들들이 살인을 저질렀던 바로 그곳입니다.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것도 세겜에서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형들이 다시 세겜으로 갔습니다. 요셉의 눈에 형들은 세상을 동경하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에게 형들의 잘못을 고한 것에는,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에 대한 요셉의 순수함이 담겨 있었을 수 있습니다.
3절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 옷을 지었더니” 채색 옷은 단순히 예쁜 옷이 아닙니다. 소매가 길고 화려한, 특별히 귀한 신분을 나타내는 옷이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다른 형제들에게는 입혀주지 않는 옷을 입혔습니다. 야곱은 왜 이랬을까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낳은 노년의 아들이었고, 요셉이 상당히 총명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야곱 자신이 편애받는 가정에서 자라 상처를 겪었음에도, 야곱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는 겁니다.
4절 끝에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형들이 요셉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게 된 것입니다. 고자질하는 동생, 아버지에게 특별 대우를 받는 동생, 채색 옷을 입은 동생. 형들 마음속에 미움이 쌓여가고 있었습니다.
●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9절)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요셉이 꿈을 꿉니다. 5절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꿈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7절 “우리가 밭에서 곡식 단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형들의 반응이 당연합니다. 8절 “그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형이 동생에게 절한다는 것은 당시 상식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꿈을 꾸고 또 이야기합니다. 9절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해와 달은 아버지와 어머니, 열한 별은 열한 형제를 가리킵니다. 온 가족이 요셉에게 절한다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은 요셉이 꾸고 싶어서 꾼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이루실 일을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같은 내용의 꿈을 두 번 꾸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강조입니다. 반드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훗날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내려와 요셉 앞에 엎드리는 날이 옵니다.
11절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 야곱도 꿈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경험이 있었습니다. 벧엘에서 사닥다리를 보았고, 하나님이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의 꿈을 함부로 흘려듣지 않고 마음에 새겨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꿈의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말도 안 되어 보입니다. 상식으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말도 안 되는 꿈을 이루십니다. 우리 삶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열망과 소망이 있습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다 보면 교회를 향해, 가정을 향해, 일터를 향해 가슴에서 올라오는 그 꿈들이 있습니다. 현실이 너무 어두워 불가능해 보여도,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시는 분임을 오늘 요셉의 꿈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양을 치는 형제들에게 요셉을 보냅니다.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약 80km입니다, 사흘에서 나흘을 걸어야 하는 거리입니다. 열일곱 살 소년이 혼자 그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것도 형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요. 그런데 요셉은 “내가 그리하겠나이다”라고 순종했습니다. 세겜에 도착했지만 형들은 이미 없었습니다. 들에서 방황하다 한 사람을 만났는데, 형들이 도단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또 걸었습니다.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다시 약 20km. 요셉은 도단까지 찾아갔고, 17절 끝에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
요셉은 자신이 지금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습니다. 형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길을 나선 그 발걸음이, 결국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는 하나님의 큰 계획으로 이어집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자신을 죽이려는 세상으로 걸어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겹쳐 보게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죄악된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모습이 요셉의 걸음 안에 담겨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세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편애의 위험입니다. 야곱은 편애의 상처를 알면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가정에서든 공동체에서든, 특정한 사람만 편애하는 것은 균열을 만듭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입니다. 말도 안 되어 보이는 꿈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현실이 어두울수록 하나님이 주시는 그 꿈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순종의 발걸음입니다. 요셉은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지만 아버지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큰 계획은 때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오늘 그 길을 믿음으로 걸어가는 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2026.05.06 | 매일성경
●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15절)
오늘 본문은 이름들의 행렬입니다. 에서의 아들들, 손자들, 족장들, 왕들의 이름이 줄줄이 이어집니다. 낯선 이름들이 많아 읽기가 쉽지 않지만, 이 긴 목록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백성만이 아니라, 약속 밖에 있는 에서의 후손들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끌어 가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25:23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에서와 야곱이 아직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나님은 야곱뿐 아니라 에서도 한 민족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36장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면입니다. 에서의 아들들이 족장이 되고, 그 족장들이 곳곳에서 에돔 땅을 다스립니다. 9-19절까지 에서의 자손과 족장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43절에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에돔 족속의 조상은 에서더라” 에서를 통해 하나의 민족이 완성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에게만 신실하신 분이 아닙니다. 에서처럼 약속의 계보 밖에 있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도 그대로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얼마나 더 신실하게 약속을 이루어 가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이 이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간에 호리 족속 이야기가 20절부터 등장합니다. 호리 족속은 에서의 후손들이 이동해 오기 전부터 세일 지역에 살던 원주민들입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원주민들과 함께 섞여 살게 되었고, 그 과정이 여기에 기록됩니다. 그리고 24절에는 특이한 내용도 나옵니다. “시브온의 자녀는 아야와 아나며 이 아나는 그 아버지 시브온의 나귀를 칠 때에 광야에서 온천을 발견하였고” 당시에 온천을 발견한다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유전이나 금광을 발견한 것과 같은 대단한 일이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이 세상의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31절)
그리고 31절에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다스리는 왕이 있기 전에 에돔 땅을 다스리던 왕들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에 왕이 생기기도 전에 에돔에는 이미 왕이 있었습니다. 32-39절까지 에돔의 왕들이 줄줄이 기록됩니다. 벨라, 요밥, 후삼, 하닷, 삼라, 사울, 바알하난, 하달까지 여덟 명의 왕이 차례로 에돔을 다스렸습니다.
야곱의 가족과 에서의 가족을 지금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야곱의 가족은 아직 떠돌고 있습니다. 문제가 끊이지 않고 혼란스럽습니다. 반면 에서의 후손은 왕을 중심으로 이미 강력한 나라를 이루고 있습니다. 세상 눈으로 보면 에서 쪽이 훨씬 더 잘 나가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처음부터 읽어오면 이 패턴이 반복됩니다. 가인의 후손들이 더 화려한 세상 문화를 만들어갔습니다. 노아 시대에도 불신앙의 사람들이 세상을 지배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는 에서의 후손들이 세상적으로 더 강하고 더 화려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빠르게 성공하고, 더 강한 힘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흔들립니다. 저쪽이 더 좋아 보이고, 저쪽을 닮아가고 싶고, 저쪽으로 들어가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에서의 후손이 세상적으로 강해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의 후손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은 세상의 화려함과 다른 방향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번성해도 우리가 흔들리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은 세상의 번성함으로 판단되지 않습니다. 에서의 후손이 먼저 왕을 세우고 더 강한 나라를 이루었지만, 하나님은 오직 야곱의 후손을 통해 다윗을 세우시고 그 계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십니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일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붙잡아야 할 핵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서에게 하신 약속도 이루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 직접 언약을 맺은 우리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훨씬 더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부족해도, 우리 가정이 혼란스러워도, 우리 삶에 문제가 끊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야곱의 가족이 에서의 나라보다 약해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야곱을 통해 흘렀습니다. 우리의 삶이 세상보다 초라해 보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세상이 더 화려하고 강해 보여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세상의 번성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2026.05.05 | 매일성경
●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26절)
야곱의 가정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문제의 연속’입니다.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했고, 아들들이 살인자가 됐고,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났고, 장자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과 동침하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세상 눈으로 보면 완전히 망조가 든 가정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모든 혼란 뒤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22절 하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시각입니다.
23-26절까지 야곱의 열두 아들 이름이 기록됩니다. 레아에게서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 여섯 명. 라헬에게서 요셉과 베냐민 두 명. 라헬의 여종 빌하에게서 단과 납달리 두 명. 레아의 여종 실바에게서 갓과 아셀 두 명. 도합 열두 명입니다. 이 열두 명이 태어난 과정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두 자매의 경쟁, 여종들을 동원한 자녀 낳기 대결, 합환채 하나를 두고 벌인 흥정. 어디 하나 정상적인 과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혼란스러운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열두 아들을 완성하셨습니다.
완전한 가정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운 가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오히려 그 과정을 통해 사람들을 빚어가십니다. 야곱의 변화를 위해 하나님이 이런 과정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 삶에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먼저 문제를 바라보고, 또한 누가 문제인지를 따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이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문제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은 지금 일하고 계십니다.
27절에 야곱이 아버지 이삭에게 이릅니다. 28-29절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여기서 잠깐 나이를 계산해보면, 이삭이 60세에 야곱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고향으로 돌아와 아버지는 만난 나이는 야곱 107세, 이삭은 167세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돌아와서 아버지와 함께한 시간이 10여 년 됩니다. 그리고 이삭이 눈을 감을 때 옆에 누가 있었겠습니까?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들입니다.
아브라함 한 사람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약속이 이삭으로 이어지고 이삭이 세상을 떠날 때는 야곱과 열두 손자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를 보면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그리고 점점 더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또 주목할 것은 29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는 기록입니다. 원수처럼 갈라섰던 두 형제가 아버지의 장례에서 함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었을 때도 이삭과 이스마엘이 함께 장례를 치렀습니다. 하나님은 죽음 앞에서 이렇게 형제를 모으십니다.
●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6절)
36장이 시작되면서 갑자기 에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왜 갑자기 에서의 족보가 이렇게 길게 등장할까요? 창세기는 약속의 사람과 약속 밖의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합니다. 36장은 에서가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사람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장입니다. 이것을 몇 가지 방식으로 드러냅니다.
첫째로 아내들의 출신입니다. 2절에 에서의 아내들 앞에 “가나안 여인 중”이라는 표현이 반복해서 붙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지만 동시에 죄악이 가득한 땅입니다. 야곱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이 땅 여인이 아닌 외삼촌의 딸들과 결혼했습니다. 에서는 그 경계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또 에서의 아내 중 한 명은 이스마엘의 딸입니다. 이스마엘은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서 제외된 아브라함의 아들이었습니다.
둘째로 자녀들이 태어난 땅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26절에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라고 기록됩니다. 반면 36:5에 에서의 아들들은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라고 기록됩니다.
셋째로 거주지입니다. 6절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그리고 8절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산에 거주하니라” 지도를 보면 세일산 에돔은 가나안 땅의 동쪽에 위치합니다. 창세기에서 ‘동쪽’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이 동쪽으로 갔고, 가인도 동쪽으로 갔고, 아브라함과 헤어졌던 롯도 동쪽 요단 평지를 선택했습니다. 에서도 동쪽으로 갔습니다.
본문에서 좀 혼란스러운 것은 야곱에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는 이미 에돔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에서가 야곱과 헤어져 에돔 세일 산에 거주했다고합니다. 이미 분리되어 살고 있었지만 오늘 본문은 공식적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는 야곱이 머물고 있고, 에서는 약속의 땅 밖으로 나갔다는 겁니다. 이를 통해 저자는 에서의 이야기를 완결 짓습니다. 이제부터는 야곱, 곧 이스라엘의 이야기만 남았다는 선언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야곱의 후손입니까, 에서의 후손입니까? 혈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신약의 성도들을 새로운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온 언약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요. 에서처럼 약속 밖에 있었다면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언약 백성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에서는 계속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 문제를 바라보는 대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것,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가정이 그렇게 혼란스러웠어도 하나님은 열두 아들을 완성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이 아무리 뒤엉켜 있어도, 하나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붙잡는 것, 그것이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힘입니다.
2026.05.04 | 매일성경
●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3절)
야곱의 인생에서 가장 험난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딸 디나가 성폭행을 당했고, 그 일을 갚겠다고 나선 아들들이 이방 족장의 남자들을 모두 죽이는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주변 족속들이 야곱의 가정을 가만두지 않으려 합니다. 위기의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 같은 그 순간,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1절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 거주하며 내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내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야곱은 원래 벧엘로 돌아오겠다고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창세기 28장에서 고향을 떠나며 하나님을 만났던 그 자리에서, 야곱은 이렇게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키시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이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겠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세겜에 머물렀습니다. 가나안 땅 세겜 근처 밭을 사고,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멈추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뒤로하고, 편한 자리에 머문 것입니다.
세겜은 세상과 하나님 사이의 경계 같은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세상도 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안정감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경계에서 머물던 야곱의 가정에 가장 충격적인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아, 네가 있어야 할 자리는 거기가 아니다. 내가 너와 약속했던 벧엘로 올라가라.”
우리도 이런 경계에 머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싶고 세상도 놓고 싶지 않은 그 자리.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 경계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이 가족들을 모아 놓고 명령합니다. 2절,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라” 야곱의 가정에 이방 신상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인데, 동시에 우상도 품고 있었습니다. 귀고리는 그 당시 부적처럼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야곱 가족들은 하나님도 믿고, 눈에 보이는 다른 것들도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가정이 겪은 문제의 뿌리였습니다.
야곱은 이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습니다. 묻는다는 것은 단절입니다. 이전의 삶, 이방 신상과 함께하던 삶과 완전히 끊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일어나 벧엘을 향해 걸음을 옮깁니다.
그러자 5절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살인을 저지른 야곱의 아들들을 주변 족속들이 추격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께로 돌아서자, 하나님이 야곱의 가정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10절)
드디어 벧엘에 도착합니다. 약 30년 전, 혼자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며 돌을 베개 삼아 누웠던 그 자리.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셨던 그 자리. 야곱에게 이 땅은 특별한 곳입니다. 7절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엘벧엘은 ‘벧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벧엘에 오자 하나님이 다시 나타나셔서 복을 주시며 말씀하십니다. 10절 “내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이미 주셨던 이름인데 왜 다시 바꿔주실까요? 야곱이 실패하고 흔들리고 상처받은 뒤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야곱의 마음속에 이런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나와 우리 가정이 이렇게 엉망인데, 내가 정말 이스라엘이 맞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너는 여전히 이스라엘이다”
실패한 뒤에도, 흔들린 뒤에도,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11절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한 백성과 백성들의 총회가 네게서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이, 이삭에게 이어졌고, 이제 야곱에게 더욱 구체화됩니다. 처음으로 왕에 대한 약속이 포함됩니다. 이것은 나중에 다윗으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약속입니다.
벧엘을 떠나는 길에 라헬이 산고 끝에 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납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였습니다. 라헬은 숨이 끊어지면서 아이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습니다. ‘슬픔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엄마 입장에서 자기는 죽어가고, 이 아이의 앞날이 막막하게 느껴져서 지은 이름입니다. 그런데 18절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베냐민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이 아이의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야곱은 지금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딸은 성폭행당했고, 아들들은 살인자가 됐고, 가장 사랑하는 아내는 눈앞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이의 이름을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손’으로 짓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야곱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이 아이도 슬픔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이 아이를 붙들 것이다.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현실이 너무 절망스러워서 ‘슬픔의 아들’이라는 이름밖에 붙일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이름을 바꿉니다.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손에 붙잡힌 것이라고.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말씀의 자리. 그 자리를 벗어나 경계에 머물고 있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라!”
다른 하나는 정체성입니다. 실패하고 흔들려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여전히 이스라엘이다!” 현실이 절망스러워도, 하나님의 약속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 약속을 붙잡고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