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9 | 매일성경
●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18절)
어제 본문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나 나실인 아들을 약속하셨습니다. 마노아가 그 사람을 다시 보내 달라고 기도하자 하나님은 들으셨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이번에도 아내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마노아에게 여인에게 한 말을 다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뒤에 여호와의 사자와 마노아 부부 사이에 오간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려면 먼저 한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처럼 몸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마노아의 집에 찾아온 분은 여호와의 사자였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마노아는 그분을 말씀을 전하는 사람 정도로 여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의 사자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16절 끝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을 마노아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15절에서 마노아가 말합니다. “구하옵나니 당신은 우리에게 머물러서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염소 새끼 하나를 준비하게 하소서” 그 시대에는 찾아온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자녀가 없던 집에 아들을 약속하고 그 아들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이라고 말한 사람입니다. 마노아는 그를 잘 대접하고 싶었고, 곁에 머물게 하여 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가 대답합니다. 네가 비록 나를 머물게 하나 네 음식을 먹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6절 “번제를 준비하려거든 마땅히 여호와께 드릴지니라” 나를 대접하려 하지 말고 여호와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붙잡아 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켜야 할 말씀은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 말씀대로 살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어두워진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잊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회복의 출발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설 때 다른 모든 부분의 회복이 시작됩니다.
마노아가 다시 묻습니다. 17절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니이까 당신의 말씀이 이루어질 때에 우리가 당신을 존귀히 여기리이다” 약속이 이루어지면 그 이름을 기억하고 높이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영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마노아는 여전히 사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노아만의 모습이 아니라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사람을 바라볼 때가 많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대답합니다. 18절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기묘자는 놀랍고 기이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마노아에게 이름을 알려 준 것이 아니라, 네가 알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노아는 이름을 알아 두고 사람을 높이려 했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사람이 붙잡아 둘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마음대로 통제하고 조종하려는 시도를 멈추어야 합니다.
● “그 여인이 아들을 낳으매 … 삼손이라 하니라”(24절)
마노아는 염소 새끼와 소제물을 가져다가 바위 위에서 여호와께 드립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번제를 여호와께 드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적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이적이 일어났다는 말은 원문으로 보면 기이한 일을 행하셨다는 뜻이고, 18절의 기묘자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입니다. 기묘자라는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다음 절에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20절에서 불꽃이 제단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제단 불꽃에 휩싸여 올라갑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본 마노아와 그의 아내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제물을 받으시는 분이 누구시며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분명해졌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고, 마노아는 그제야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았습니다. 마노아가 아내에게 말합니다. 22절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분이 여호와의 사자였다면 자기들은 하나님을 본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람으로만 알았을 때는 대접하려 했는데, 누구신지 알고 나니 두려워 떨고 있습니다.
아내가 대답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죽이려 하셨다면 우리 손에서 번제와 소제를 받지 않으셨을 것이요, 이 모든 일을 보이지 않으셨을 것이며, 이런 말씀도 우리에게 하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고 그 아들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죽으면 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아내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과 하신 말씀으로 판단했습니다. 아내가 참 지혜롭습니다.
24절에서 그 여인이 아들을 낳고 이름을 삼손이라 합니다. 삼손은 태양이라는 말에서 온 이름으로, 작은 태양이라는 뜻으로 풀기도 합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25절에서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 마하네단에서 여호와의 영이 그를 움직이기 시작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사사들과 함께하셨던 여호와의 영이 삼손과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대로 이루셨습니다.
13장에서 이 모든 일을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부르짖지도 않았는데 찾아오셔서 구원자를 약속하셨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 어머니에게 한 번, 아버지에게 또 한 번 알려 주셨습니다. 약속대로 삼손이 태어났고, 하나님은 그에게 복을 주시고 여호와의 영으로 함께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삼손이 나실인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라 삼손의 책임입니다. 받은 은혜와 사명을 잊고 사는 삼손의 모습은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가장 어두운 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장 어두울 때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도 의지할 사람이 없고 형편이 너무 힘들고 누구도 내 사정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그때 찾아오셔서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사람을 붙잡지 말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다. 마노아는 여호와의 사자를 곁에 붙잡아 두려 했지만,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께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2026.09.28 | 매일성경
●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나서”(3절)
사사기에는 열두 명의 사사가 등장합니다. 어제 본문까지 우리는 열한 명의 사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마지막 한 사람이 남았습니다. 유명한 삼손입니다. 13장부터 삼손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집니다. 삼손 하면 들릴라가 먼저 떠오르지만,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 전체의 흐름 안에서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사사기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같은 악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점점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1절 하반절에서 드러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40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셨습니다. 사사기에서 이방 민족의 손에 넘겨진 기간 가운데 가장 긴 시간입니다. 그만큼 죄악이 컸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고통을 당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13장에는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습니다. 40년 동안 블레셋의 지배를 받으며 그 삶에 익숙해져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그만큼 멀어져 있었습니다.
이어서 소라 땅 단 지파의 가족 중 마노아라는 사람이 소개됩니다. 삼손의 아버지입니다. 마노아라는 이름은 안식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마노아는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나라는 블레셋의 압제 아래 있었고, 집안에도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했습니다. 그 시대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큰 아픔이었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마노아와 그의 아내가 자녀를 위해 기도했다는 말도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부르짖지 않고, 한 가정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입니다.
3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그 여인에게 나타납니다. 아무도 부르짖지 않는데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지 않는 백성을 위해서도 먼저 한 가정을 찾아가시고, 그 가정을 통해 구원자를 보내십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신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난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아내였습니다. 본문에 남편의 이름은 마노아로 나오지만 아내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남성 중심의 그 시대라면 하나님의 사자가 남편에게 나타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아내에게 먼저 말씀하십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담겨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말합니다. 네가 본래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4절에서 조심할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므로 너는 삼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지니라” 태 안에 주실 새 생명을 위해 술을 마시지 말고, 율법이 부정하다고 정한 것을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그의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머리를 깎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실인은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보통 나실인은 스스로 서원하고 정한 기간 동안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않고, 머리를 깎지 않으며, 시체를 만지지 않아야 합니다(민6장). 그런데 삼손은 태에서부터 하나님이 구별하셨고, 평생 나실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이 보통 나실인과 다른 점입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그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왜 이런 방식으로 구원자를 보내실까요? 한 사람을 세워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시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태어나기 전부터 구별된 사람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은 삼손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별된 백성이었습니다. 이방인과 다르게 살아야 할 백성이었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고 살았습니다. 뒤에 나실인 삼손이 부정한 일을 가리지 않고 이방 여인을 가까이하는 모습은 바로 그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 백성에게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깨닫게 하십니다.
여호와의 사자를 만난 여인은 남편에게 가서 내용을 전합니다. 그의 모습이 하나님의 사자의 용모 같아서 심히 두려웠다고 말합니다. 7절에서 여인은 들은 말을 전하는데, 여호와의 사자가 한 말과 비교하면 빠진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머리에 삭도를 대지 말라는 말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시작하리라는 말입니다. 왜 빠뜨렸는지는 성경이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집에서 태어날 아이가 이 형편에서 구원자가 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14절)
8절에서는 마노아가 여호와께 기도합니다. 주께서 보내셨던 하나님의 사람을 다시 오게 하셔서 그 낳을 아이에게 어떻게 행할지를 가르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말을 믿지 못했다기보다 자기가 직접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마노아에게는 이 일을 자기가 이끌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9절에서 하나님이 마노아의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어두운 시대에도 하나님은 한 사람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자가 다시 임한 곳은 이번에도 여인이 밭에 앉아 있을 때였고, 남편 마노아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번에도 아내를 중심에 세우고 일하십니다. 10절에서 여인이 급히 달려가 남편에게 알리고, 11절에서 마노아가 아내를 따라가 그 사람에게 이릅니다.
12절에서 마노아가 묻습니다.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 그런데 13절과 14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새로운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고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고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며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키라고 하십니다. 마노아는 새로운 것을 듣고 싶었지만, 필요한 말씀은 이미 주어져 있었습니다. 이미 주신 말씀을 지키는 것이 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우리가 구별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도록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의 영적인 나실인입니다. 이스라엘처럼 그것을 잊고 세상에 익숙해지지 말고, 세상과 다르게 말씀 중심으로 살아갑시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에게 한 말은 그 시대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내가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두운 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 길은 새로운 무엇을 찾는 데 있지 않고, 이미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합시다.
2026.09.23 | 매일성경
● “여호와를 버리고 섬기지 아니하므로”(6절)
9장에서 아비멜렉은 망대 위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에 맞아 죽었고, 하나님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악행을 그대로 갚으셨습니다. 10장부터는 아비멜렉 이후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11-12장에는 입다라는 사사가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은 입다가 등장하기 전 이스라엘이 어떤 형편에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1절에서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 잇사갈 사람 돌라가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합니다. 그는 에브라임 산지 사밀에 거주하며 23년 동안 사사로 있다가 죽어 사밀에 장사되었습니다. 사사기에는 기드온이나 입다나 삼손처럼 이야기가 길게 기록된 사사가 있고(대사사), 짧은 몇 절 안에 잠깐 나왔다가 사라지는 사사가 있습니다(소사사). 오늘 1-5절이 소사사인 돌라와 야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1절과 3절에 특이한 것은, 두 사람 모두 “일어나서”라고 기록합니다. 보통 사사는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기드온과 아비멜렉을 거치며 사사의 자리가 왕처럼 누리는 자리가 되자, 그 자리를 탐내어 스스로 일어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자리가 사람이 올라가려는 자리로 변한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도 그렇습니다. 직분은 내 지위가 높아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교회를 섬기도록 하나님이 세워 주시는 자리입니다. 내가 일어나서 앉으려하고 섬김 대신 누리려하면 문제가 됩니다.
3절에서 길르앗 사람 야일이 일어나 22년 동안 사사가 됩니다. 그런데 야일에게는 아들 30명이 있었고, 그들이 어린 나귀 30을 탔으며 성읍 30을 가졌습니다. 기드온에게 아들 70명이 있었던 것처럼, 아들이 많다는 것은 아내가 많았다는 뜻이고 왕처럼 살았다는 뜻입니다. 어린 나귀는 그 시대 지도자와 귀족들이 타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최고급 승용차를 탄 셈입니다. 아들마다 성읍을 하나씩 나눠 주었고, 그 성읍들을 ‘하봇야일’이라 불렀습니다. 야일의 마을들이라는 뜻입니다. 야일은 사사였지만 왕처럼 살았고 아들들은 왕자처럼 살았습니다. 기드온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이스라엘이 점점 더 깊은 어둠으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저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6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문제는 ‘또’ 악을 행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악을 행하면 고통을 당했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 구원하셨습니다. 이쯤이면 멈출 만도 한데 다시 악을 행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죄가 더 깊어졌습니다. 6절에 이스라엘이 섬긴 우상이 7가지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알들과 아스다롯과 아람의 신들과 시돈의 신들과 모압의 신들과 암몬 자손의 신들과 블레셋 사람들의 신들입니다. 신 하나가 아니라 ‘신들’이라고 합니다. 주변 모든 나라의 신들을 다 가져다 섬긴 것입니다. 혹시 더 잘 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섬긴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버리고 섬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블레셋 사람들과 암몬 자손의 손에 이스라엘을 파십니다. 바로 앞에서 이스라엘이 섬긴 것이 “블레셋과 암몬의 신들”이었습니다. 그 신들을 섬기는 나라들이 쳐들어와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열심히 섬긴 우상이 이스라엘을 지켜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우상 때문에 고통을 당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말고 붙들고 사는 것이 있으면 결국 그것 때문에 힘들어집니다. 하나님이 우선되어야 하고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대적들은 요단 강 저쪽 길르앗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을 18년 동안 억압합니다. 10장의 배경인 길르앗은 요단 동쪽입니다. 암몬 자손은 요단을 건너 서쪽의 유다와 베냐민과 에브라임 족속과도 싸웁니다. 요단 동쪽과 서쪽이 모두 공격을 받았고, 이스라엘의 곤고가 심했습니다.
●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11절)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10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평안할 때는 하나님을 잊고 우상을 섬기다가 힘들어지자 하나님을 찾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사사를 세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이 사사를 바로 세우지 않으십니다.
11-12절에서 하나님이 먼저 물으십니다.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않았느냐고 하십니다. 여기 나오는 민족을 세어 보면 7이고, 6절에서 이스라엘이 섬긴 우상도 7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일곱 가지 우상에 빠져 있었지만, 하나님은 일곱 민족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하나님을 버린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13절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다시는 구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구원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부르짖을 때마다 구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만큼 아프시고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면 아무 느낌 없이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누구보다 아파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시되 오늘 우리를 건져 달라고 구합니다. 16절에서 그들은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거하고 여호와를 섬깁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셨습니다. 고통당하는 백성을 더 이상 두고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이들이 다시 배반하고 돌아설 것도 아십니다. 그래도 버리지 못하시는 부모의 마음처럼, 하나님의 근심 속에는 사랑과 아픔이 함께 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시작됩니다. 암몬 자손이 길르앗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자손은 미스바에 진을 칩니다. 18절에서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말합니다.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익숙한 질문입니다. 1:1절에서 이스라엘은 누가 먼저 올라가 싸워야 하는지를 여호와께 물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기들끼리 의논합니다. 그리고 먼저 싸우는 사람이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될 것이라고 상까지 내겁니다. 우상을 버렸다고 했지만 여전히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님께 바로 선 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점점 어둠으로 내려간 것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 한 사람이 없어 모두가 잘못된 모습을 따라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주변이 모두 어둠 속을 걸으면 그것이 옳은 줄 압니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나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섭시다. 하나님은 그런 한 사람을 통해 가정과 공동체를 회복하십니다.
또한 습관처럼 되풀이하는 죄를 끊어야 합니다. 반복되는 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근심하게 합니다. 우리 안에 그런 모습이 있다면 끊을 것은 끊고 돌이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돌아갑시다. 하나님만 섬길 때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복된 인생으로 세워 주십니다.
2026.09.22 | 매일성경
● “나와 같이 행하라”(48절)
사사기 9장 전체는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좋은 내용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사사도 아닌 아비멜렉 이야기를 길게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점점 더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왕이 될 자격이 없는 아비멜렉이 왕이 되고자 세겜 사람들을 선동했고, 세겜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세운 것도 그들 역시 욕망이 눈을 가렸기 때문입니다. 그 관계가 3년 만에 깨졌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아비멜렉은 자기를 배반한 세겜을 점령하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다음에 그가 세겜 사람들을 어떻게 죽였는지를 자세히 기록합니다.
46절에서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갑니다. 엘브릿은 언약의 신이라는 뜻입니다. 8:33절에서 기드온이 죽자 이스라엘이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엘브릿은 바알브릿과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맺어야 할 언약을 바알과 맺은 것입니다. 위기가 오자 이들은 그 신전으로 들어갔습니다. 보루는 신전 안의 은밀한 방, 지하실 같은 곳으로 보입니다. 자기들이 섬기는 신이 지켜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집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은 백성과 함께 살몬 산에 올라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자기 어깨에 멥니다. 그리고 함께 있는 백성에게 말합니다. 48절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나를 보고 나를 따라 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익숙합니다. 7:17절에서 기드온이 선발된 군사 300명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그때 기드온의 손에는 항아리 속에 감춘 횃불이 있었습니다. 불로 미디안을 물리쳤습니다. 이제 그 아들이 같은 말을 하며 불을 듭니다. 그런데 그 불은 적군이 아닌 자기 동족 세겜 사람들을 태웁니다. 아비멜렉은 스스로 높아지려 했던 기드온을 닮았습니다.
모든 백성이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얹고 불을 놓습니다. 세겜 망대에 있던 남녀가 약 1000명이 죽었습니다. 참담한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지 않겠다고 하면서 왕처럼 살았고, 그 모습을 본 아들은 왕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사람이 왕이 되어 다스리는 세상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50절에서 그는 데베스에 가서 진을 치고 그 성을 점령합니다. 데베스 사람들은 성읍 안의 견고한 망대로 도망하여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갑니다. 세겜 망대의 사람들이 불에 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이들도 살기 위해 가장 높은 곳으로 피한 것입니다.
52절에서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 불사르려 합니다. 세겜 망대에서처럼 이번에도 불로 사람들을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런데 위에서 사람들이 무엇이든 던질 수 있는 망대 밑으로 다가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입니다. 싸움을 많이 해 본 아비멜렉이 이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 복수와 권력에 눈이 멀면 다른 사람은 다 보는 것을 자기만 보지 못합니다. 스스로 위험의 길, 죽음의 길로 걸어 들어갑니다.
이야기의 흐름 상 데베스 백성들도 세겜처럼 불에 타서 죽었다는 이야기로 이어질 것 같은데 53절에서 갑자기 흐름이 달라집니다.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립니다. 망대 위에서 떨어진 돌 하나가 정확히 그의 머리에 맞았습니다. 당시 맷돌은 지금 우리 맷돌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납작한 아래 판에 곡식을 놓고 방망이처럼 생긴 맷돌 위짝을 굴려서 빻았다고 합니다. 그 맷돌위짝이 아비멜렉의 머리로 정확하게 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비멜렉은 바로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칼을 빼어 자기를 죽이라고 합니다. 이유가 이렇습니다. 54절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그 시대에 싸우는 사람에게 여자의 손에 죽는 것은 큰 수치였습니다. 청년이 그를 찔러 아비멜렉은 죽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치명상을 입힌 사람은 이름 없는 한 여인입니다. 55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흩어졌습니다. 왕처럼 굴던 사람이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도 그렇게 흩어졌습니다.
●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56절)
겉으로 보면 이 모든 일은 한 사람의 권력욕에서 시작되었고, 그가 눈이 멀어 망대 밑으로 갔다가 우연히 떨어진 돌에 맞아 죽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56절이 결론을 말합니다.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형제 70명을 한꺼번에 죽인 일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셨고, 그대로 갚으신 것입니다.
57절은 세겜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습니다. 56절과 57절이 똑같이 반복하는 말이 “악행을 하나님께서 갚으심”입니다. 아비멜렉의 악행을 하나님이 갚으셨고, 세겜 사람들의 악행도 하나님이 갚으셨습니다.
9장을 읽는 동안 하나님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은 좋을 때는 서로 가까웠다가 누군가 이간질하면 갈라서고, 서로 배신하고 물고 뜯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보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 같은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모든 악행을 보고 계셨고 그대로 갚으셨습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지 않는 사람은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처럼 살게 되고, 그런 공동체는 서로 물고 뜯다가 함께 무너집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나와 가정과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57절은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고 끝이 납니다. 9:20절에서 70명 가운데 홀로 살아남은 요담은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들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에게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비멜렉은 불로 세겜 사람들을 죽였고, 그 자신은 망대 위에서 던져진 맷돌 위짝에 맞아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요담의 입술로 하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셨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우리가 누구를 닮아 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아비멜렉은 아버지 기드온의 잘못된 모습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우리도 주변 사람의 좋지 않은 모습을 나도 모르게 닮아 갈 때가 있습니다. 악한 사람과 부딪히며 살다 보면 그 모습과 비슷해집니다. 오늘 내가 누구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는지 돌아봅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삶을 삽시다.
또한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하나님이 갚으실 악을 행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혹시 누군가의 악행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내가 해결하고 처리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깁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반드시 간섭하시고 해결하십니다.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오늘 하루도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삽시다.
2026.09.21 | 매일성경
● “하나님이 … 악한 영을 보내시매”(23절)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세겜 사람들을 앞세워 형제 70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홀로 살아남은 요담은 나무들의 비유를 말하고 저주를 남긴 채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22절은 아비멜렉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3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본문 전체를 보면 그가 다스린 곳은 세겜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3년 만에 문제가 터집니다.
23절이 그 문제의 출발점을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였으니” 지금까지 사사기는 위기 때마다 하나님이 사사에게 여호와의 영을 부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이 악한 영을 보내십니다. 아비멜렉이 한 일과 세겜 사람들이 거기에 동조해서 한 일이 하나님 앞에 옳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심판의 이유는 여룹바알의 아들 70명에게 저지른 포학한 일을 갚되, 그 피 흘린 죄를 아비멜렉과 그의 손을 도운 세겜 사람들에게 돌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고 3년이 지났습니다. 바로 갚지 않으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잊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갚으시는 분이시고, 갚으시는 때도 하나님의 주권에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25절에서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세겜 사람들이 산꼭대기에 사람을 매복시켜 아비멜렉을 엿보게 하고 그 길로 지나는 모든 자를 강탈합니다. 아비멜렉과 오가는 사람들을 털어 손해를 입힌 것입니다. 한때 그를 왕으로 세운 사람들이 이제 그를 배반합니다.
여기에 한 사람이 등장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듭니다. 26절에서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의 형제와 더불어 세겜에 이르렀고,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그대로 풀면, 에벳은 종이라는 뜻이고, 가알은 역겨움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이름을 읽으면서 역겨운 종의 아들이라는 말로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들어와 세겜과 아비멜렉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세겜 사람들이 신뢰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얼마 전까지 이들이 따르던 사람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눈이 멀어 형제 70명을 죽인 아비멜렉입니다. 이제 이들이 신뢰하는 사람은 가알입니다. 둘 다 따라서는 안 될 형편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따라갑니다. 하나님을 떠나니 분별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붙들 때 하나님이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 누구를 가까이하고 누구를 멀리해야 할지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 분별이 나를 지키고 내 가정을 지키며 미래를 지킵니다.
가알을 따르는 세겜 사람들은 포도를 거두어 짜서 연회를 베풀고 그들의 신당에 들어가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합니다. 왕으로 세운 사람을 신당에서 저주하고 있습니다. 28절에서 가알이 말합니다.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러면서 차라리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후손을 섬기라고 합니다. 아비멜렉이 세겜 사람들을 선동할 때 쓴 것이 바로 혈통이었습니다. 내가 너희 어머니 쪽 형제가 아니냐고 했습니다. 이제 가알이 자기가 더 가까운 혈통이라고 말합니다. 혈통과 지역 감정으로 세운 자리는 똑같은 방식으로 무너집니다.
●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45절)
30절에서 그 성읍의 방백 스불이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합니다. 스불은 아비멜렉의 신복입니다. 스불은 사자들을 아비멜렉에게 가만히 보내어 세겜의 형편을 알립니다. 그런데 소식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32절과 33절에서 밤에 일어나 밭에 매복했다가 아침 해 뜰 때에 성읍을 엄습하라고 작전까지 세워 줍니다.
34절에서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밤에 일어나 네 무리로 나누어 세겜에 맞서 매복합니다. 35절에서 가알이 나와서 성읍 문 입구에 섭니다. 그 시대에 성문 입구는 재판이 열리고 성읍의 일이 결정되는 자리였습니다. 가알이 거기 서 있다는 것은 이미 세겜의 통치자처럼 행세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비멜렉의 작전이 시작되어 군대가 움직입니다. 가알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고 스불에게 말합니다. 그런데 스불이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다고 둘러댑니다. 37절에서 가알이 다시 말하자 이번에는 스불이 이렇게 외칩니다.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멜렉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하던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그러고는 나가서 싸우라고 합니다. 가알이 세겜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나가 아비멜렉과 싸웁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이 추격하니 가알은 도망하고 부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습니다. 스불은 가알과 그의 형제들을 쫓아내어 세겜에 거주하지 못하게 합니다. 세겜 사람들이 신뢰하던 사람은 한 번의 싸움으로 끝났습니다. 가알의 패배요 아비멜렉의 승리입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42절에서 이튿날 백성이 밭으로 나오자 그는 자기 백성을 세 무리로 나누어 매복시켰다가 그들을 칩니다. 한 무리는 성문 입구를 막고 두 무리는 밭에 있는 자들을 죽입니다. 45절에서 아비멜렉은 그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땅에 소금을 뿌리면 아무것도 자라지 못합니다. 다시는 이 성읍이 일어서지 못하게 하겠다는 저주의 표시입니다. 자기를 왕으로 세워 준 사람들에게 아비멜렉이 한 일입니다.
어제 본문 20절에서 요담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을 사를 것이요, 세겜 사람들과 밀로의 집에서도 불이 나와 아비멜렉을 사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대로입니다. 세겜 사람들이 먼저 아비멜렉을 배반했고, 아비멜렉이 불처럼 세겜을 태웠습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자리까지 왔습니다.
사사기가 이런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계속 내려갑니다. 기드온은 왕이 되기는 거부하였지만 왕처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기드온의 모습을 보고 성장한 아비멜렉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자신을 왕으로 세워준 세겜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했고, 아비멜렉은 세겜을 완전히 멸망시켜버립니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하고 스스로 왕이되려하고, 인간 왕의 다스림을 원하는 결과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분별하는 신앙으로 살아야 합니다.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세웠다가 가알을 신뢰했고, 두 번 다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우리도 한 번의 잘못된 선택이 발목을 잡는 것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붙들 때 하나님이 바른 선택을 하게 하시고 어떤 사람을 가까이해야 할지 알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이 없는 삶의 결과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이스라엘에는 평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서로 이용하고 서로 공격하다가 함께 무너졌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람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빠진 열심의 끝은 배신과 멸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사는 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2026.09.18 | 매일성경
●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23절)
기드온은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까지 사로잡고 전쟁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승리 이후 원한을 갚고 왕처럼 행세하는 모습이 드러났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드온의 속마음이 무엇이었는지를 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22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드온에게 이렇게 청합니다.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한 절 안에 ‘당신’이라는 말이 3번이나 반복됩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하나님이 구원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기드온이 구원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가장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기드온입니다. 두려워하던 그를 하나님이 부르셨고, 의심할 때마다 표적을 보여 주셨고, 300명으로 13만 5000명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기드온이 앞장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기드온의 말과 행동을 보고 이 전쟁은 하나님이 아니라 기드온이 한 것이라고 여기게 된 것입니다. 신앙이 무너지고 말씀에서 멀어지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사람을 의지하게 됩니다.
기드온은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옳은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여기까지만 기록되었다면 기드온의 마무리가 참 좋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24절부터 성경은 그가 겉으로 한 말과 속마음이 달랐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24절에서 기드온이 백성들에게 요청을 하나 합니다.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25절에서 무리가 즐거이 드리겠다고 대답하고 겉옷을 펴서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 던집니다. 지도자가 요구하고 백성이 그대로 바치는 모습입니다. 왕이 되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이 왕처럼 요구하고 있고 백성들은 그대로 바치고 있습니다.
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1700세겔이었습니다. 오늘날 무게로 약 20kg입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받은 것이 금만이 아닙니다. 26절은 그 외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자색 옷은 왕이 입는 옷입니다. 초승달 장식과 사슬은 왕이 타던 낙타를 꾸미던 것입니다. 어제 본문 21절에서 기드온은 두 왕을 죽이고 그 낙타 목의 초승달 장식을 떼어 가졌습니다. 왕의 물건이 전부 기드온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27절이 진짜 문제입니다. 기드온은 백성들이 바친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에봇은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섬길 때 입는 옷입니다. 본래 여러 색실로 짜서 몸에 걸치는 옷인데 기드온은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입고 활동하기 위한 옷이 아니라 세워 두고 바라보며 섬기기 위한 상징을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섬겼고,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기드온은 왜 하필 에봇을 만들었을까요? 에봇은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뜻을 묻는 자리에서 입던 옷입니다. 기드온은 왕의 자리는 사양했지만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전하는 자리, 곧 신앙 공동체의 주도권은 자기 손에 두려고 한 것입니다. 에봇은 사람이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기드온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표적을 한두 번 본 사람이 아닙니다. 양털 표적을 두 번이나 보았고, 적진에서 꿈 이야기를 들었고, 300명으로 이기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의 믿음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어야 합니다. 그런데 기드온은 보이지 않아도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로 나아가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표적이 우리 믿음을 자라게 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28절)
28절에서 미디안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했고, 기드온이 사는 40년 동안 그 땅이 평온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평온입니다. 29절에서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은 돌아가 자기 집에 거주합니다.
그런데 30절이 그의 집을 이렇게 전합니다. 기드온은 아내가 많았고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70명이었습니다. 아들만 70명이니 아내가 스무 명이 넘었을 것입니다. 많은 아내를 두는 것은 그 시대 왕들의 모습입니다. 31절에는 세겜에 있는 첩이 낳은 아들이 나옵니다. 기드온은 그 아들의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지었는데, “나의 아버지는 왕이다”라는 뜻입니다. 왕이 되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이 아들의 이름으로 자기가 왕임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이 아들 때문에 뒤에 큰 문제가 생깁니다. 32절에서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고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됩니다. 사사기에서 사사의 죽음을 전하며 묘실에 장사되었다고 기록한 것은 기드온이 처음입니다. 기드온은 왕이 아니었지만 왕처럼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33절에서 기드온이 죽자마자 이스라엘 자손이 돌이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고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았습니다. 브릿은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언약의 바알, 곧 언약을 지켜 주는 신으로 바알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언약의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과 언약을 맺은 것입니다. 사실 기드온이 살아 있을 때에도 이들이 섬긴 것은 에봇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자기들이 만든 것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기드온이 죽자 순식간에 바알에게로 돌아섰습니다.
34절이 이스라엘의 근본 문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왔을 때에도 하나님이 먼저 하신 말씀이 애굽에서 건져 내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니 사사기의 악순환이 계속 되풀이됩니다. 35절은 한 가지를 더합니다. 이스라엘은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기드온이 잘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압제받던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서 건져 낸 사람인데 그 은혜조차 잊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잊고 사람의 은혜도 잊었습니다. 그래서 이 백성은 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우리가 왕이 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드온은 입으로는 하나님이 다스리신다고 말하면서 손으로는 왕의 물건을 모으고 왕처럼 살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나의 왕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내가 왕인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말과 삶이 다르면 그것이 우리와 우리 집에 올무가 됩니다. 입술의 고백대로 하나님만 왕으로 섬깁시다.
또한 받은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구원의 은혜를 잊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을 붙들었고 같은 잘못을 되풀이했습니다. 우리도 구원받은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길 때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기억하면 오늘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이 나옵니다. 그 은혜를 날마다 기억하고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