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2 | 매일성경
●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절)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은 좋은 포도가 아닌 들포도를 맺은 자기 백성에게 두 가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8,11절). 집에 집을 잇는 탐욕과, 향락에 빠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 없는 삶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어서 네 가지의 화가 선포되고, 그 결과 심판이 어떻게 임하는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길게 화를 선언하시는 것은, 그만큼 자기 백성이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8절이 세 번째 화입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수레 줄로 죄악을 끈다’는 표현은 죄를 어쩌다 짓는 것이 아니라, 밧줄로 수레를 끌듯 죄를 자기 쪽으로 힘껏 끌어당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죄를 짐스러워하기는커녕 애써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로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죄를 이끌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19절인데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그럼 어디 한번 속히 해 보시지. 그 계획을 어서 이루어 우리 눈으로 보게 해 보라” 하나님의 심판을 대놓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말을 믿지 않고, 도리어 빈정대며 비웃습니다. 이것은 앞서 시편에서 본 어리석은 자, 곧 하나님이 계심을 알면서도 없는 듯 사는 자의 뻔뻔한 모습입니다.
20절이 네 번째 화이자,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말씀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것은 가치가 뒤집히고 기준이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악을 악이라 하고 선을 선이라 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부릅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옳다고 말합니다. 같은 사안을 가지고도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심각한 죄인 것은 죄를 죄로 아는 사람은 돌이킬 수 있지만, 이들은 잘못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으니 회개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악이라 하는 것을 세상은 점점 선이라 부릅니다. 어둠을 빛이라 하고, 빛을 도리어 어둡고 답답한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뒤집힌 기준이 마치 시대의 상식인 것처럼 자리 잡아 갑니다. 이런 때일수록 성도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히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21절이 다섯 번째 화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앞서 악을 선이라 부르게 되는 뿌리가 여기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지 않고 자기 판단을 기준 삼으니, 하나님이 악이라 하신 것도 자기 눈에 좋으면 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22-23절이 여섯 번째 화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술 마시는 데는 영웅호걸이면서, 뇌물을 받고는 판결을 뒤집는 자들입니다. 뇌물을 받고 악인을 옳다 하고, 의인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정의를 돈 때문에 짓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바라신 정의와 공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24절)
그렇다면 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24절은 이 모든 화의 원인을 말합니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문제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멸시한 것입니다. 그 결과 뿌리가 썩고 꽃이 티끌처럼 날립니다. 겉으로 아무리 무성해 보여도, 말씀을 버린 삶은 뿌리부터 썩어 결국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25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느니라.” 여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느니라”는 말씀이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손을 드셨는데, 그 손이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앞부분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데,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 손이 돌이킬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손을 드신 것은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이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심판이 어떻게 임합니까. 26절 “그가 기치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자기에게로 오게 하실 것이라” 하나님이 먼 나라를 부르셔서 심판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여기서 ‘부르신다’는 말의 원어는 휘파람을 불어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목자가 휘파람 한 번으로 양 떼를 부르듯, 하나님이 휘파람 한 번 부시면 저 먼 나라의 군대가 순식간에 달려온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는, 강대국의 군대조차 휘파람 한 번에 움직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는 앗수르와 훗날의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27-30절은 그 군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설명합니다. 지친 자도 없고 넘어지는 자도 없으며, 조는 자도 자는 자도 없습니다. 화살은 날카롭고 활은 당겨져 있으며, 말굽은 부싯돌 같고 수레바퀴는 회오리바람 같습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준비된 군대입니다. 이 군대가 사자처럼 먹이를 움켜 가는데 건질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온 땅에 남는 것은 흑암과 고난, 빛조차 구름에 가려진 어둠입니다. 앞서 20절에서 이 백성은 흑암을 광명이라 부르며 어둠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온 땅을 덮은 것은 빛 하나 없는 흑암이었습니다. 어둠을 빛이라 부른 자들이 마침내 진짜 어둠에 삼켜집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선과 악의 기준을 말씀에 두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점점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세상이 뒤집어 부른다고 악이 선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내 판단이나 시대의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흑암을 광명이라 부르는 어리석음에 휩쓸리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펴져 있는 그 손 앞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손을 드셨지만 그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이는 아직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휘파람 한 번으로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말씀을 버리고 멸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돌이키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7.21 | 매일성경
●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1절)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전제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말이 “내가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조건없는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1절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심판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노래는 한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2절 “심히 기름진 산에” 포도원이 있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주인이 포도원에 쏟은 정성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장소는 ‘심히 기름진 산’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달리 남유다는 기름진 땅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을 파서 돌을 골라냈습니다. 그리고 아무 나무가 아니라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망대도 세우고 술틀도 만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것입니다. 좋은 땅, 돌을 골라낸 수고, 최고의 품종, 지키는 망대, 수확의 준비까지. 그러니 당연한 기대가 있습니다. 극상품 포도가 맺히리라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맺힌 열매는 2절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들포도는 작고 시고 쓸모없는, 먹을 수 없는 열매입니다. 원어는 ‘베우심’으로 ‘악취나는 포도’라는 의미입니다. 최고의 조건에서 최고의 품종을 심었는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이 포도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5-6절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주인이 하시는 일은, 지금껏 베푸신 것을 하나하나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걷으시니 짐승이 먹어 버리고, 담을 헐으시니 짓밟히며, 돌보던 손길을 거두시니 가시가 자랍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은혜로 이 포도원을 붙들고 계셨는지가 도리어 여기서 드러납니다. 특히 “구름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면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셔서 포도가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이 노래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지시고 광야에서 먹이시고 좋은 땅에 정착시키시고 말씀을 주시며 정성껏 가꾸신 그 나무가 바로 자기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맺은 것이 들포도였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신 좋은 열매는 무엇이었을까요. 7절 “그가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가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이 바라신 것은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정의는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아 각 사람에게 마땅한 몫을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억울하지 않도록 바르게 해결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관계 안에서 신실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 정의와 공의를 맺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맺힌 들포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정의 대신 ‘포학’이요 공의 대신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히브리어로 읽어야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바라신 정의는 ‘미쉬파트’인데 맺힌 것은 소리가 거의 같은 ‘미스파흐’, 곧 포학이었습니다. 바라신 공의는 ‘체다카’인데 맺힌 것은 역시 발음이 닮은 ‘체아카’, 곧 억눌린 자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소리는 비슷하나 뜻은 정반대인 단어를 나란히 놓아, 하나님이 기대하신 것과 정반대의 것이 나왔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정의처럼 보였으나 실은 포학이었고, 공의인 줄 알았으나 실은 약자의 눈물이었습니다.
●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16절)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정의과 공의를 버렸을까요? 8절부터 하나님은 ‘화 있을진저’를 거듭 선언하시며 그 실상을 하나씩 짚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가운데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 화가 8절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집에 집을 잇고 밭에 밭을 더해, 남은 자리가 없을 때까지 땅을 사들여 홀로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토록 심각한 죄일까요. 이스라엘에서 땅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각 지파와 가문에 나누어 주신 기업이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지켜 온, 하나님이 정하신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힘 있고 가진 자들이 그 이웃의 기업을 사들여 독차지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축재가 아니라, 힘없는 자를 그 땅에서 몰아내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앞서 본 ‘포학’과 ‘부르짖음’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심판이 9-10절입니다. 그토록 크고 아름다운 집을 그러모았지만 거기 살 사람이 없게 되고, 넓은 포도원과 밭에서 나오는 소출이 씨앗의 십분의 일 수준으로 쪼그라든다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모은 모든 것이 도리어 텅 비고 헛되게 됩니다.
두 번째 화는 11절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아침부터 밤까지 술과 잔치에 빠져 사는 삶입니다. 12절을 보면 그 잔치에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가 넘칩니다. 겉으로는 즐겁고 화려한 삶입니다.
그런데 12절 하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문제는 향락 자체보다, 그 향락에 빠져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행하시는지 보려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즐거움에만 눈이 팔려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사로잡힐 것이요” 여기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살다가, 결국 그 무지함 때문에 포로로 사로잡혀 간다는 것입니다.
14-17절은 그 심판의 모습을 그립니다. 스올이 목구멍을 넓히고 입을 크게 벌려, 그 화려하던 무리와 떠들며 즐기던 자들이 그리로 삼켜집니다. 그리고 16절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사랑했던 자기 백성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자,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세우십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쏟으신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쏟으셨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 삶에 맺히는 것이 좋은 포도인지 들포도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는 대단한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정의와 공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두 번째 화를 받은 이들은 자기 향락에 빠져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지 않았고, 그 무지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즐거움 때문에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어떻게 일하시는지 관심을 두고, 그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분 앞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7.20 | 매일성경
●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16절)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난 백성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저버렸다는 것이고, 그 결과 사회가 정의와 공의를 잃고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런 유다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까요?
13절 “여호와께서 변론하러 일어나시며 백성들을 심판하려고 서시도다” 하나님이 드디어 일어나 서시는데, 격려하고 복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을 심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첫 번째 심판 대상은 14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장로들과 고관들을 심문하시리니” 지도자들입니다. 백성을 바르게 인도해야 할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들이 관심을 둔 것은 자기 배를 채우는 일이었습니다. 포도원을 삼키고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아 자기 집에 쌓아 두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부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신앙생활하고 리더의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워가길 기대하십니다. 리더들이 어떤 삶을 사느냐가 공동체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교회는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앞선 이들이 바르게 걸으면 뒤따르는 이들도 그 길을 옳은 길로 여기고 따라옵니다.
가난한 자의 것을 탈취한 그것으로 무엇을 했을까요. 16절부터 시온의 딸들이 등장합니다. 이는 지도자들의 아내이자 부유층 여인들로 볼 수 있습니다. 백성이 가난에 허덕이는 동안, 이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시온의 딸들이 교만하여 늘인 목과 정을 통하는 눈으로 다니며 아기작거려 걸으며 발로는 쟁쟁한 소리를 내는도다”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남을 호리는 눈짓을 하며, 꼬리 치듯 걷고, 발찌 소리를 내며 다녔다는 것입니다. 온갖 것으로 자신을 꾸미고 유혹하는 데 온 마음을 쏟은 모습입니다.
18-23절까지 이 여인들이 몸에 두른 장신구 목록이 길게 나열됩니다. 발찌, 머리의 망사, 반달 장식, 귀고리, 팔찌, 화관, 발목 사슬, 반지, 코고리, 손거울에 이르기까지, 꾸밀 수 있는 모든 곳을 꾸민 것입니다. 자기 몸을 치장하고 가꾸는 일에 온통 집중한 삶입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단정히 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오직 거기에만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치장을 위해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고 탐하는 것입니다. 관심 기울여야 할 것에는 두지 않고 헛된 것에 삶을 다 쏟는 것, 하나님은 이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거두어 가십니다. 24절, “그때에 썩은 냄새가 향기를 대신하고 노끈이 띠를 대신하며 … 수치스러운 흔적이 아름다움을 대신할 것이며.” 향기 나던 몸에서 썩은 냄새가 나고, 화려한 옷 대신 굵은 베옷을 입게 됩니다. 특히 “노끈이 띠를 대신한다”는 말에는 노끈에 묶여 포로로 끌려가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그토록 화려하게 살던 이들이 나라가 무너지며 포로로 잡혀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장정은 칼에 쓰러지고 용사는 전란에 망하며, 성문은 슬퍼하고 시온은 황폐하여 땅에 앉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시온 땅에 성전이 있으니 그곳만은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는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대로 살지 않는 시온은 하나님이 반드시 무너뜨리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오래 신앙생활하고 이룬 일이 많다 해도, 지금 하나님 앞에 바로 살지 않으면 그 과거가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합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4:1절은 그 수치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전쟁으로 남자들이 다 죽어, 일곱 여자가 한 남자에게 매달려 결혼을 청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대겠으니 이름만 얹어 달라는 것입니다. 그토록 화려했던 시온이 불순종으로 맞은 처참한 결과입니다.
●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2절)
하나님은 여기까지만 말씀하셔도 됩니다. 말씀대로 살라 하셨는데 그러지 않았으니 심판으로 끝내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에는 늘 회복의 메시지가 뒤따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반드시 회복을 이루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2절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여기 ‘싹’이 중요합니다. 원어로 ‘체마흐’인데, 사11장의 “이새의 줄기에서 난 싹”, 예레미야와 스가랴서로 이어지는 메시아 예언의 핵심 단어입니다. 곧 이 싹은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메시아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아름답고 영화로우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앞서 시온의 딸들은 스스로를 꾸며 아름다움을 얻으려다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아름다움과 영화는 여호와의 싹, 곧 메시아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답고 영화로우신 메시아를 통해, 살아남은 이스라엘이 영화롭고 아름답게 변화됩니다.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낸 아름다움은 무너지지만, 메시아께서 입혀 주시는 아름다움은 영원합니다.
3절, “시온에 남아 있는 자 …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하나님이 거룩하지 않은 백성을 거룩하다 불러 주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지 못한 자기 백성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라도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4절이 그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셔서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닙니다. 다 아셨고, 심판이라는 힘든 과정을 통해 그 더러움을 씻어 내십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 모두 하나님의 매는 아닙니다. 때로는 신앙을 연단하고 성숙시키기 위한 과정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스라엘은 분명히 불순종 때문에 이 일을 겪고 있었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거룩하게 만들어 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하게 회복된 백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5절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은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하셨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그 출애굽의 임재를 다시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회복된 이스라엘과 반드시 함께하시고, 그 위에 영광의 덮개를 두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덮개는 결혼식의 차양을 떠올리게도 하는데, 하나님이 언약 관계 속에서 자기 백성을 책임지고 이끄시겠다는 뜻입니다.
6절 “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의 피난처와 보호가 되어 주시십니다. 심판의 목적이 여기 있습니다. 정결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여,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리로 이끄시는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할 수 없기에, 하나님이 그 사랑으로 자기 백성을 거룩하게 만드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 어디 있는지 아는 것입니다. 시온의 딸들은 외모를 치장함으로 아름다움을 얻으려 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생각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면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외적인 부분만 화려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무너뜨리시고, 참된 아름다움은 여호와의 싹이신 메시아 안에, 하나님을 섬기고 말씀에 순종하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흐름을 좇지 말고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앞선 자로서 바르게 걸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도자를 먼저 심판하실 만큼 앞선 자에게 더 기대하십니다. 오래 신앙생활하며 앞장서는 자리에 있다면, 뒤따르는 이들이 그 걸음을 따라옵니다. 그러니 그 발걸음이 뭇 성도가 따라올 만한 좋은 걸음이 되도록, 말씀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7.16 | 매일성경
●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2절)
시편을 마치고 오늘부터 이사야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는 선지서의 첫 책이자 66장으로 이루어진 긴 책인데, 그 구조가 특이합니다. 성경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되어 있듯, 이사야도 1장부터 39장까지는 심판을, 40장부터 66장까지는 회복과 메시아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작은 성경’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구약임에도 오실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옵니다.
선지서에는 선지자의 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할 백성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보며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안타까워하시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1절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여기 유다는 남유다입니다. 본래 한 나라였던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는데, 이사야는 남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특히 히스기야 시대가 중요합니다. 그때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들은 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참고 참으시다 앗수르를 들어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유다는 말씀대로 잘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유다 역시 멸망의 문턱에 서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식’이라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받은 자식이 아버지를 거역했습니다. 심지어 3절은 짐승도 주인을 아는데 자식이라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십니다. 자녀의 불순종 앞에 찢어지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4절부터 불순종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4절 중간입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 자들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묵상한 시편이 떠오릅니다. 다윗은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임재 안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 다윗의 후손들이 정반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데가 없는 만신창이입니다. 7절을 보면 이것이 비유만은 아닙니다. 이미 강대국에게 짓밟혀 예루살렘 성만 겨우 남고 주변은 다 유린당한 상태였습니다. 9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하나님이 붙들지 않으셨다면 죄악으로 불타 없어진 그 성읍들처럼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소돔 고모라처럼 되지는 않은 걸 보니 그들보다는 낫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상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10절에서 부르십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가 바로 소돔이고 고모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늘 본문에 ‘들으라, 귀를 기울이라’가 거듭 반복됩니다(2절, 10절). 우리 삶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누구에게 맡겨야, 어떤 방법을 찾아야 이 문제가 풀릴까”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다르게 말합니다. 힘들수록, 복잡할수록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18절)
그렇다면 유다의 죄악은 무엇일까요? 11절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놀랍게도 이 백성은 예배를 안 드린 것이 아닙니다. 헌물을 안 바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숫양의 번제와 기름을 넘치도록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에 배부르셨다 하시고, 12절에서 “누가 이것을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하십니다. 그 제물을 ‘헛된 제물’이라 하시고,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까지 견딜 수 없다 하십니다.
이유는 13절 하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밖으로는 제물을 넘치게 바치고 안식일과 절기를 성대하게 지키면서, 그 삶에는 악이 가득했습니다. 예배와 삶이 따로 놀았습니다. 그래서 15절이 무섭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눈을 가리시고 귀를 닫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하나님을 향해 기도로 펼친 그 손에 피가 묻어 있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를 억압하고 짓밟은 손, 그 손을 들고 기도한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교회를 부지런히 오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무너진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책망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16절에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여기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악을 ‘그치고’, 그다음 선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워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익히고 훈련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선행의 내용이 구체적입니다. 정의를 구하고, 학대받는 자를 돕고, 고아를 위해 신원하며, 과부를 위해 변호하는 것입니다. 여기 ‘정의’는 원어로 ‘미쉬파트’인데, 힘없는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도록 바로잡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더 많은 제물이 아니라, 힘없는 자를 위해 그 손을 쓰는 것입니다. 피가 가득했던 그 손으로 이제 약한 자를 붙들라는 것입니다.
18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변론하자’는 법정에서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고 이 백성은 명백한 유죄인데, 그 재판장이 먼저 ‘오라’고 부르십니다. 심판대에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주홍처럼 붉은 죄를 눈처럼 희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주홍과 진홍은 한번 물들면 결코 빠지지 않는 염색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죄를, 하나님이 친히 씻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압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 죄가 눈처럼 희어졌습니다.
19-20절이 결론입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순종하는 길과 거절하는 길입니다. 여기서 “즐겨 순종하면”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주홍 같은 죄가 눈처럼 희어지는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합당하게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즐겨 순종하는 삶이고,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을 세우고 격려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형식과 습관에 머문 신앙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남유다는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지만, 삶에는 악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이 견디지 못하신 것은 예배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배와 삶이 따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씻김받은 자로서 즐겨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대가 아니라 변론의 자리로 부르시고, 주홍 같은 죄를 눈처럼 희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우리가 이제 할 일은, 악을 그치고 선을 배우며, 그 손으로 힘없는 자를 붙드는 것입니다. 즐겨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아름다운 소산을 주십니다.
2026.07.15 | 매일성경
●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1절)
시편 15편도 다윗의 시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평생 사모했던 자리는 어디였으며, 그곳에 머물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묻습니다. 짧은 다섯 절이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압축해 보여줍니다.
1절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주의 장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만든 성막입니다. 성전 시대에는 성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산은 그 성막이 있는 거룩한 산을 가리킵니다.
이 질문에 다윗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그곳에서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는가. 이것이 다윗이 평생 품었던 소망이었습니다. 이런 형식의 시는 성전에 오르는 순례자들이 “누가 이곳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하고 묻고 답하던 형식입니다. 시24:3-6절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가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거룩한 질문입니다.
우리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예배하러, 기도하러 나올 때 어떤 마음으로 나옵니까. 다윗은 늘 그 자리를 사모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어떤 자리보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 임재 안에 머무는 자리가 그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자 영광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윗보다 놀라운 은혜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영광의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를 성전 삼아 함께하십니다. 그렇다면 기쁨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며 그 임재의 은혜를 날마다 누리는 것, 그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무나 그 자리에 머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시기에, 그 임재 안에 들어가는 데에는 합당한 삶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2-5절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2절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여기 ‘정직하게 행하며’의 원어는 ‘타밈’입니다. 이 단어는 “흠이 없다,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성막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반드시 흠 없는 것이어야 했는데, 바로 그 무흠함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 흠이 없어야 한다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타밈’은 죄 없는 완전무결함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욥을 이 단어로 부르는데, 그들도 다 허물이 있었습니다. 이 말의 본뜻은 온전함, 곧 안과 밖이 하나로 통합된 진실함입니다. 남에게 보이는 모습과 속마음이 다르지 않고, 숨겨 둔 이면이 없는 삶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완벽할 수 없지만, 하루하루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서 그런 삶을 살고자 힘쓰는 것, 그것이 정직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이어 공의를 실천하고 마음에 진실을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오늘 본문의 두 축이 드러납니다. 어떻게 ‘행하느냐’와 어떻게 ‘말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라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봉사와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일 듯한데, 본문이 말하는 것은 전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일상입니다. 작은 일 하나를 어떻게 행하고, 말 한마디를 어떻게 하느냐, 그것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5절)
3절은 2절의 ‘진실을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려줍니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허물하지 않는다’는 것은 함부로 헐뜯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 혀로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됩니다. 주먹으로 때려도 안 넘어질 사람이 말 한마디에 꺾이는 것을 봅니다. 그래서 말 한마디를 주의하고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웃을 비방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약점을 들추고, 있지도 않은 일을 지어내 부풀려 옮기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약점 이야기를 특별히 좋아합니다. 듣고 나면 거기에 살을 더 붙여 옮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이 아닐 경우, 당사자에게는 큰 상처가 됩니다. 어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것이 해야 할 말인지 아닌지, 사실인지 아닌지를 분별하여 입을 다물 줄 아는 것, 그것이 성숙한 신앙입니다.
3절에 ‘혀’를 말했다면, 4절은 눈을 다룹니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며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는 자를 멀리하고,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사람을 존대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알려면 그 친구를 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가까이하고 누구와 교제하는가는 우리를 자라게도 하고 끌어내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말씀대로 사는 사람을 가까이할 때 우리도 그 영향을 받아 성숙해집니다.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서원은 하나님과의 약속입니다. 사람과의 약속도 지키려 애쓰는데, 하물며 하나님과의 약속이라면 손해가 되고 어려움이 따르더라도 지켜 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5절은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것, 그리고 돈을 받고 판단을 굽혀 무고한 자를 해하는 것, 하나님은 이런 일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보면 다윗이 열거한 것은 특별하고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작은 일 하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고, 무엇보다 입술을 지켜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5절 마지막이 이 시의 결론입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삶을 원합니다. 우리를 흔드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이 어디서 옵니까.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두려워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보면,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 임재를 사모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계신 장막에 머물기를 그토록 사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성전 삼아 함께하시는 영광을 누리는 자들입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기억하며, 함께 모여 예배하고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그 자리를 기쁨으로 사모하기를 원합니다.
다른 하나는 일상의 삶과 말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안팎이 다르지 않게 정직히 행하고 혀를 지키며 작은 일 하나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함을 누립니다.
2026.07.14 | 매일성경
●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1절)
시편 14편은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로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여기 ‘어리석은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무신론자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일까요.
‘어리석은 자’는 원어로 ‘나발’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머리가 나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람, 삶이 뒤틀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삼상 25장에는 실제로 ‘나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나발은 큰 부자였으나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의 부모가 ‘어리석은 자’라는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을 겁니다. 본래 이름이 따로 있었을 텐데, 그의 삶이 어리석음의 표본이라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조차 그를 두고 “그의 이름과 같이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쫓겨 다니던 시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나발의 양 떼와 목자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이 양털을 깎는 잔칫날,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동안의 은혜를 언급하며 먹을 것을 청하자, 나발은 “다윗이 누구냐, 내가 왜 그에게 내 음식을 나눠 주느냐”며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삶에서는 결코 자기 것을 나누지 않고 오직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아닌, 하나님이 계심에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런데 내 삶을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과연 저럴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볍고 하찮은 분으로 여기면, 우리의 삶도 그만큼 가벼워집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 삶이 어떻게 됩니까. 1절 뒤에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다윗의 안타까움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3절 끝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은 다윗과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과 다른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핵심이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아름다운 나라를 세워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다르게 선을 행하는 백성의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1절과 2절은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1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 2절은 정반대를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어리석은 자가 인정하든 않든,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셔서 이 땅을 굽어살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살피실까요. 2절 뒤에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하나님은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한 사람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보시니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3절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여기 ‘다’, ‘함께’, ‘하나도 없다’는 표현은, 그 시대 전체가 하나님 없는 자들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3절을 신약의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인용하여,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논증합니다. 그만큼 이 구절은 인간의 실상을 꿰뚫는 무거운 진단입니다.
●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6절)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삼키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떡 먹듯이’라는 표현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하루 세 끼를 자동으로 먹듯, 이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자동으로 악을 행합니다. 이처럼 삶의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히 살수록 오히려 악을 쌓아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열심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남을 짓밟으며 악을 쌓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살던 이들도 결국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5절 “거기서 그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이 마지막 구절을 새번역은 “하나님이 의인의 편이시니”로 번역합니다. 악인들에게 고통당하던 의인들 편에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악인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 앞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이 벼락을 치시거나 불을 내리셔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삶과 말을 통해 생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말은 안 해도, 어느 순간 “하나님 믿는 사람은 진짜 다르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했던 말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며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하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곧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통로입니다.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 노리는 대상은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가난하고 억울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 때문에 무고하게 고난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그 가운데서도 선을 행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도하던 다윗이 7절에서 갑자기 시야를 활짝 넓힙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제 구원이 가난한 몇 사람에게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여기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라는 표현 때문에, 이 시를 포로기 이후의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로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어디에 끌려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억압과 고통에 얽매인 삶 자체가 포로된 삶입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억압과 고통 속에 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돌이키시고 회복시켜 그분의 백성으로 굳게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때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듯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삶은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그것이 곧 어리석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귀히 여기며, 어두운 세상에서도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셔서 이 땅을 굽어살피시고,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자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무고하게 고난당할 때,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이 이루실 구원을 소망하며 살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