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3 | 매일성경
●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1절)
오늘 본문 13편도 다윗의 시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시들처럼 다윗은 대적과 원수 때문에 고난 당하고, 심지어 죽음의 위기를 만나고 있습니다. 계속 묵상하다보니 비슷한 내용들이 이어집니다. 이런 시편들은 우리 인생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다윗의 모습을 통해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도 짧은 여섯 절 안에, 절망에서 찬양으로 나가는 신앙의 여정이 담겨 있습니다. 이 시는 탄식(1-2절), 간구(3-4절), 신뢰와 찬양(5-6절)이라는 선명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2절에는 “어느 때까지니이까”라는 질문이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지금 시인에게 가장 힘든 것은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고난과 문제, 죽을 것 같은 위기가 있어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마저 자신을 외면하신 듯한 이 상황이 그를 가장 힘들게 합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이러시면 안 되는데, 도대체 어느 때까지입니까”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1절 시인의 탄식 중에 마음에 감동이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 시인은 “하나님, 왜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십니까, 당장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하지 않고, “어느 때까지 주의 얼굴을 숨기시겠나이까”라고 기도합니다. 능력은 한 번 내려주시면 문제가 해결되지만, 시인이 더 사모하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 곧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시며 그 고난의 길을 같이 걸어 주시는 것입니다. 동행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하나님 그 자체로 사랑하기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무언가 때문에 하나님을 붙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언가를 주시면 좋아하고 주시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문제가 생기면 가까이 가고, 문제가 없으면 멀어집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보다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자체를 구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탄식은 원망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멀어지신 것 같은데, 시인은 “그럼 나도 멀어지겠다”며 등을 돌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멀어지신 듯한 하나님께 기도로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이것이 3절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이 간구에는 세 가지 요청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생각하시고(보시고), 응답하시고, 눈을 밝혀 달라는 것입니다. ‘눈을 밝혀 달라’는 것은, 죽음의 문턱에 이른 자신에게 활력을 주시고 소생시켜 달라는 간구입니다. 꺼져가는 생명의 빛을 다시 밝혀 달라는 것입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기도로 더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음 같은 고난을 겪어 본 사람은 그 자리에서 기도가 얼마나 어려운지 압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나를 일으킬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며,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신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분의 때에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4절에는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이 나옵니다.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이것은 자신이 패배해 조롱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만,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무시당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문제를 놓고 기도하면서도, 자기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나에게만 맞춰져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영광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5절)
그렇게 기도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자, 시인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5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여기서 ‘오직’이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나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은 것들이 많지만, 살아 보니 진짜 나를 도우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한다고 고백합니다.
여기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 시 전체의 핵심입니다. 원어로 ‘헤세드’인데, 하나님의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을 뜻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기 백성을 놓지 않으시고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비록 현실은 힘들고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 같아도, 그 헤세드는 여전히 나와 함께 있고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붙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언약적 사랑을 붙들고 다시 일어섭니다.
이 사랑을 의지하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것을 의지하게 됩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환경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내 기대대로 움직이지 않고, 환경은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서운함과 실망이 찾아옵니다. 사람과 환경을 의지하면 잠시 평안할 수는 있어도 참된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붙들 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인의 변화가 늘 그렇듯 시인의 상황은 여전히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고 하나님의 침묵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헤세드를 붙들자,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아직 응답받지 못했지만,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실 것을 확신하기에 이미 그 구원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라는 탄식이 “구원을 기뻐합니다”라는 고백으로 바뀐 것입니다.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하나님이 나를 너그럽고 풍성한 은혜로 대하셨음을 확신하며 찬송으로 시를 맺습니다. 숨겨진 듯했던 하나님의 얼굴빛이 여전히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기도 가운데 발견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멀어지신 듯한 하나님께 기도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는 탄식의 자리에서, 시인은 등을 돌리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듯할 때도, 나를 일으키실 분은 하나님 한 분뿐임을 알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환경을 의지하면 실망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헤세드를 붙들면 상황이 바뀌기 전에도 이미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교우들 가운데 질병과 문제로 시인처럼 부르짖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적인 사랑으로 붙들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길 기도합니다.
2026.07.10 | 매일성경
●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1절)
어제 9편은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라는 찬양으로 시작했는데, 10편은 “어찌하여”라는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두 시는 원래 하나로 알파벳 시로 지어진 짝입니다. 9편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감사하는 노래라면, 10편은 그 공의가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입니다. 감사와 탄식이 함께 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정직한 신앙입니다.
1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인은 지금 환난 가운데 있습니다. 대적도 많고 조롱하는 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가까이 오셔서 위로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야 할 하나님이, 오히려 멀리 서 계신 듯 느껴지는 것입니다. 문제만으로도 벅찬데 하나님마저 나를 외면하신 것 같은 절망입니다.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가 있습니다. 시편은 “힘들어도 표현하지 말고 늘 감사하며 살아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감사할 때는 감사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는 그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다 아시고 들으시며 합당하게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면서도 “하나님, 제 기도를 듣고 계십니까, 언제까지입니까” 하고 부르짖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시인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1절의 탄식을 뱉은 뒤, 시인은 2-11절까지 길게 악인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합니다. 첫 특징이 2절에 나옵니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악인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이 향하는 대상은 가련한 자, 가난한 자, 힘없는 자입니다. 8절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고”, 9절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절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교만한 자는 이처럼 연약한 자를 공격합니다.
여기에서 악인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고 긍휼이 없습니다.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갑질도 결국 같은 뿌리입니다. 직장에서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매장 직원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가, 이것은 신앙의 근본과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말합니다. 교회 안의 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악인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악인이 이렇게 거침없이 행동하는 이유를 4절에서 설명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악인은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없는 자의 것을 착취합니다. 그런데 그 탐욕의 밑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멸시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대놓고 “하나님은 없다”고 외치는 것은 아닙니다. 4절 마지막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으면서도 자기 삶의 모든 결정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말하자면 실천으로 드러나는 무신론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지만, 삶의 방식이 “하나님은 나와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12절)
5-11절은 그 악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길은 언제나 견고해 보이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에게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6절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큰소리칩니다. 그의 입은 저주와 거짓과 포악으로 가득하고, 어둡고 은밀한 곳에 숨어 무죄한 자를 노립니다. 성도가 보기에 안타까운 것은, 저렇게 악을 행하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듯 보입니다.
이런 악인들에 대한 결론이 11절입니다.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악인이 대담하게 악을 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잊으셨고, 얼굴을 가리셨고, 영원히 보지 않으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절에서 시인은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라며 하나님이 얼굴을 보이시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악인도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셨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슷한 두 고백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시인은 “어찌하여 숨으시나이까”라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고, 악인은 “하나님은 보지 않으신다”며 등을 돌리고 떠났습니다.
악인의 특징을 설명한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12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일어나소서’와 ‘손을 드소서’는 전쟁에 나서시기를 구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일어나 악인과 싸우시고, 손을 드셔서 심판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은 악인의 말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4절에서 악인은 “여호와께서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 11절에서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보고 계시며,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어지는 14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악인의 압제 아래 있던 가련한 자들이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벌써부터 고아와 연약한 자를 도우시는 분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실 뿐, 하나님은 언제나 낮은 자의 편이셨던 것입니다.
16절이 이 시의 정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악인들은 마치 자기가 왕인 양 하나님을 무시하며 활개를 칩니다. 그러나 참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일어나 손을 드시면, 천하가 자기 것인 양 살던 자들도 순식간에 그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17-18절이 마지막 위로입니다. 악인의 특징이 교만이었다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연약하고 힘들지만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소원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압제당하는 자를 위해 반드시 일어나사 심판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알고 그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어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어나시고 손을 드시는 분, 가난한 자를 잊지 않으시고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는 분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멀리 계신 듯 느껴져도, 주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이 소망을 품고 위축되지 말고 담대하게 하루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7.09 | 매일성경
●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4절)
다윗은 대적들의 조롱과 공격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했습니다. 오늘 본문도 대적에게 둘러싸인 상황이지만, 앞부분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어려움 한복판에서 어떻게 이런 찬양이 나올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오늘 본문이 보여줍니다. 이 시는 독특한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각 단락의 첫 글자를 맞춘 노래입니다. 우리로 치면 ‘가나다’ 순으로 지은 시와 같습니다. 그만큼 정성 들여 지었고, 외워 부르기 좋게 만든 것입니다.
1-2절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 주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전하리이다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존하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다윗은 전심으로, 곧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무엇을 감사하는가입니다. 다윗은 ‘주의 기이한 일들’, 곧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전하며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슨 일을 하셨는지를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감사입니다.
3-8절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노래합니다. 반복되는 단어가 ‘심판’입니다. 4절 “주께서 나의 의와 나의 송사를 변호하셨으며 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하셨나이다”, 7절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오늘 본문에 ‘심판하다, 판결하다’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원어로 ‘샤파트’인데, 재판장이 옳고 그름을 가려 판결을 내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재판장으로 보좌에 앉으셔서, 공의로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억울한 자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요. 다윗은 지금 대적들에게 모함과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변명할 길도, 억울함을 풀 길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의와 송사를 변호하시고, 공의로 판결하시는 분입니다. 세상 법정은 억울한 판결을 내리기도 하고, 힘 있는 자에게 유리하게 기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다릅니다. 사람의 마음과 양심까지 감찰하시고, 한 치의 어긋남 없이 공의로 판결하십니다.
5-6절은 그 심판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악인을 책망하시고 그 이름을 영원히 지우시니, 원수는 끝없이 멸망하고 그들이 세운 성읍조차 기억에서 사라집니다. 아무리 기세등등하던 악인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는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18절)
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억울한 자에게 어떤 분이 되어 주실까요. 9절 “여호와는 압제를 당하는 자의 요새이시요 환난 때의 요새이시로다” ‘요새’는 원어로 ‘미스갑’인데, 적이 도무지 닿을 수 없는 높고 견고한 산성을 뜻합니다. 세상의 공격이 아무리 거세도, 그 높은 요새 안에 있으면 안전합니다.
특히 10절이 중요합니다.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하나님을 요새로 삼아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의 이름을 아는 자’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저 명칭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인격적으로 깊이 아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고, 신실하시며, 자기를 찾는 자를 버리지 않으시는 분임을 아는 사람이라야, 환난 때에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어떻게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었는지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참된 지혜가 두 가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 자신을 아는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이 둘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수록 나의 연약함과 죄를 알게 되고, 나의 연약함을 알수록 그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알았기에 자신의 처지를 알았고, 그렇기에 요새이신 하나님께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통해 하나님 알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11-12절에서 다윗은 이 하나님을 함께 찬양하자고 회중을 초청합니다. 시온에 계신 여호와를 찬송하고, 그분이 행하신 일을 만민 중에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통받는 자의 부르짖음을 잊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억하시고 잊지 않으십니다. 18절도 그렇습니다. “궁핍한 자가 항상 잊어버림을 당하지 아니함이여 가난한 자들이 영원히 실망하지 아니하리로다” 세상은 힘없고 가난한 자를 쉽게 잊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낮고 약한 자, 억울하고 소외된 자를 기억하시고 반드시 그 소망을 이루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질서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13-14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아룁니다.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사망의 문에서 나를 일으키시는 주여” ‘사망의 문’이라는 표현을 통해 지금 다윗은 죽음의 문턱에 이를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14절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수 있게 하시며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라고 합니다. ‘사망의 문’이 ‘시온의 문’으로 이어집니다. 살려 주시면 그 생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인들은 어떻게 될까요? 악인은 남을 해하려고 웅덩이를 파고 그물을 놓지만, 결국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지고 자기가 놓은 그물에 걸립니다. 악은 반드시 그 악을 행한 자에게 돌아갑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시기보다, 악인이 스스로 행한 악이 그 자신에게 돌아가게 하심으로 공의를 이루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직접 갚으려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반드시 판단하시기 때문입니다.
19-20절에서 다윗은 마지막으로 기도합니다. 여기 ‘인생’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자기가 대단한 줄 아는 인생들이 실은 연약한 사람일 뿐임을 깨닫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힘을 부려도 결국 하나님 앞에서는 유한한 인생일 뿐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감사하고 찬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형편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기에 어려움 속에서도 전심으로 감사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 때, 상황에 흔들리지 않는 감사와 찬양을 회복하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요새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억울한 자를 변호하시고, 악인이 스스로 판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며, 가난한 자를 잊지 않으시는 공의의 재판장이십니다. 우리가 억울하고 힘든 일을 당할 때, 직접 갚으려 애쓰기보다 그 하나님을 요새 삼아 피하며, 반드시 판단하실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2026.07.08 | 매일성경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3절)
시편을 살펴보니, 시인이 대적으로 인한 고난 속에서 낙심으로 기도를 시작했다가 소망과 찬양으로 바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달라졌을까요? 오늘 시편 8편을 읽다 보면, 시인이 기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런 확신과 믿음이 생겼는지 알게 됩니다. 이 시는 앞선 탄원시들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그냥 읽으면 단순한 찬양 같지만, 이 찬양의 배경이 3절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라고 합니다.
이런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대적에게 쫓겨 광야 한 곳에 홀로 머물던 다윗이, 밤중에 자기 문제를 안고 기도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이 펼쳐지고 달과 별이 반짝입니다. 그때 시인은 깨닫습니다. 저것들이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으로 창조하여 저 자리에 두신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 권능이 온 세상 구석구석에 가득 퍼져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시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마디가 “대적이 많습니다”가 아니라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입니다. 이 시에도 2절에 대적과 원수와 보복자가 나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초점은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맞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그 영광이 땅을 넘어 하늘까지 가득하다고 고백합니다.
2절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와 왕 되심에 도전하는 대적들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시고 찬양을 받으십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곧 자기 연약함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왕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를 통해 원수와 보복자를 잠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 없이 못 할 말, 못 할 행동을 하며 시끄럽게 활개를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히 그분을 신뢰하는 자를 통해, 아무리 대적이 기승을 부려도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시인이 이렇게 찬양하게 된 계기가 3절에 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여기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밤하늘의 달과 별을 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것이 그냥 저절로 떠 있다고 여기며 ‘아름답다’ 하고 지나칩니다. 시인은 달랐습니다. 저 달과 별을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만들어 그 자리에 두셨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다고 하는데, 시인은 굳이 ‘손가락으로 만드셨다’고 표현합니다. 세심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한 만들어 두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달과 별은 늘 그 자리에 고정된 것 같지만 실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것들이 긴 세월 한 치의 오차 없이 운행되는 것을 생각할 때, 시인은 감동합니다. 달과 별에서 하나님의 창조 권능을 본 사람이라면, 지나가는 꽃 한 송이에서도 그 권능을 보게 됩니다. 왕 되신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절)
이 광대한 창조 앞에서 시인의 시선이 자신,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4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광대함에 비추어 보니, 인간은 한없이 연약하고 초라한 존재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데, 그 ‘흙’의 원어에는 먼지, 티끌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먼지 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5절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기 ‘하나님보다’로 옮긴 원어가 ‘엘로힘’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으로도, ‘천사(하늘의 존재)’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 번역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금 번역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번역이 타당합니다.
먼지 같은 인간을 하나님의 다음 자리, 곧 지극히 존귀한 자리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가 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왕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그 다스림에 참여하는 존재, 곧 왕과 같은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6절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하나님이 사람을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특권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히브리서는 이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합니다. 잠시 천사보다 낮아지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되신 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로 잃어버린 그 다스림을,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회복하십니다.
시인은 지금 대적에게 쫓겨 도망하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기도 가운데 이 진리를 깨닫습니다. 지금은 쫓기는 신세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영화롭고 존귀한 존재로, 다스리는 자로 지으셨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그 다스림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이런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미래는 하나님이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기도를 통해 시인의 마음이 확신과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시인은 1절의 고백을 그대로 반복하며 시를 맺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 시가 같은 찬양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것은, 시인의 시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고난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길이 된다는 겁니다. 시인은 대적에게 쫓기는 가운데 창조의 하나님을 묵상하다가 그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나, 그것이 마음 깊이 나를 위한 사건으로 와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그 하나님을 만날 때, 이론으로 알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옵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지 같은 우리를 하나님이 왕과 같은 존귀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복된 삶을 사는 것은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로 그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는 데서 옵니다. 오늘 하루도 자연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권능을 발견하며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2026.07.07 | 매일성경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1절)
다윗은 계속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에 주저앉거나 절망하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우리의 진짜 신앙은 어려움이 찾아올 때 드러납니다. 다윗이 만난 상황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힘든 자리에서 다른 도움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도움을 구합니다. 참으로 귀한 신앙입니다.
이 시에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 여기 ‘식가욘’은 구약에서 이곳과 하박국 3장에만 나오는 드문 단어로, 정확한 뜻은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격정적인 감정으로 울부짖듯 토해내는 노래로 봅니다. 실제로 오늘 다윗의 기도는 상당히 격정적입니다.
1-2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다윗은 자신을 쫓는 대적들을 ‘사자’로 표현합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만나면 마음이 위축되고, 그 앞에서 대적은 훨씬 더 커 보입니다. 다윗의 상황이 그러했습니다. 대적들은 언제든 찢어 삼킬 것 같고, 자신은 그 앞에서 떠는 처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나 사람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찾아야 할까요. 솔직히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환경을 먼저 의지하려 합니다. 평상시에는 기쁨으로 신앙 생활하다가도, 큰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은 생각나지 않고 “누가 나를 도와줄까”에 매달리곤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자 같은 대적이 금방이라도 삼킬 것 같은 그 자리에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라고 고백합니다. 피하고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신앙이 귀합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다윗이 어려움을 만나 갑자기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평상시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을 붙들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았기에, 이 위기에서도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새벽을 깨우고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깨어 있어야 문제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가 서로를 말씀으로 세워주는 일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누군가 위기를 만났을 때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피할 수 있도록, 서로를 말씀으로 세워가야 합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무죄를 아룁니다. 3-4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만일 자신이 정말 악을 행했다면, 언약을 맺은 자를 배신했다면, 까닭 없이 남의 것을 빼앗았다면, 이런 고난을 기꺼이 당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결백 주장이 아닙니다. 다윗이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왔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어려움을 만나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돌아보지 않고, 당장 이 문제만 해결해 달라고 매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먼저 자기 삶을 하나님 앞에 돌아봅니다. 조금이라도 악이 있었다면 이 과정을 기꺼이 당하겠다고,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새롭게 하시는 과정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11절)
무죄를 아뢴 다윗은 이제 하나님께서 일어나 대적을 상대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6-7절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일어나소서, 깨소서’는 하나님이 전쟁터에 나서시기를 구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의 통치자로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것을 심판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반복되는 핵심어가 있습니다. ‘의’입니다. 원어로 ‘체데크’인데, 오늘 본문에 거듭 등장합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십니다. 그래서 11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라” 이것이 억울한 자에게 얼마나 큰 위로인지 모릅니다. 지금 다윗이 바로 그런 억울함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적들이 누명을 씌우고 자기들이 옳다 하는데, 변명할 길도, 들어줄 이도 없습니다.
그때 다윗이 의지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 마음과 생각과 양심까지 감찰하시고 반드시 갚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10절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대적들은 다윗이 불리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마음을 감찰하시고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11절은 하나님이 “매일 분노하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분노하실까요. 악인들이 스스로와 남을 속이며 악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지 않고 날마다 분노하십니다. 또한 회개하지 않는 자를 향해 하나님은 이미 칼을 갈고 활을 당기고 계시며, 그 화살은 불화살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악을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14절에서 다윗은 기도 가운데 한 가지를 깨닫습니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왜 악인은 저토록 악을 행할까? 늘 마음에 악과 죄를 품고 그것을 잉태하여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끝은 15-16절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남을 해하려 판 웅덩이에 결국 자기가 빠지고, 자기가 꾸민 악이 그대로 자기에게 돌아옵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모든 것을 감찰하시고 갚으시기 때문입니다.
17절이 결론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어떤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해결하시리라는 믿음으로 감사하고 찬양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따라 감사합니다. 그의 확신은 자기 완전함이 아니라 의로우신 하나님께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평소에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기도하면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하나님 앞에 아뢰었습니다.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며 바른 관계를 맺어가는 것, 그리고 공동체가 서로를 말씀으로 세워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의로우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악인이 스스로 판 웅덩이에 빠지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아직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도 감사하며 찬양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2026.07.06 | 매일성경
●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 나를 고치소서”(2절)
오늘은 시편 6편을 묵상합니다.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2편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오만한 자들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3편부터 이어지는 다윗의 시들은 대부분 대적들에게 고통당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부르짖는 내용입니다. 오늘 6편도 그렇습니다. 대적도 있고, 심지어 하나님마저 자신에게 진노하시는 듯한 무거운 마음으로 다윗이 기도합니다.
이런 시편의 흐름을 통해 알게되는 것이 있습니다. 1편이 말한 ‘복 있는 사람’의 삶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악인의 길은 강하고 의인을 공격하는 자도 많습니다. 그런 세상에서 복 있는 사람의 길을 가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그 길을 걷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기도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임을, 다윗의 시들이 보여줍니다.
1절 “여호와여 주의 분노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오며 주의 진노로 나를 징계하지 마옵소서”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분노를 쏟으시고, 그 진노로 자기를 치시는 것 같은 느낌에 짓눌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본문 뒤로 가면 대적도 등장합니다. 7절 “내 모든 대적으로 말미암아”, 10절 “내 모든 원수들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대적의 공격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동시에 시인의 마음을 누르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을 만나면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잘못해서 이러시는 건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힘든데, 상황은 힘겹고 사람들의 공격까지 겹치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현재 다윗이 그런 상황입니다.
2-3절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도 매우 떨리나이다” 마음의 고통이 육체로 나타납니다. 뼈는 우리 몸을 지탱하는 근간인데, 그 뼈가 떨린다는 것은 온몸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 곧 마음까지 심히 떨린다고 합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 무너져,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 결과 ‘나를 고치소서’라는 표현에서 보듯 시인은 지금 병들어 누워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지, 5절에서는 죽음까지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께 구합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면 회복할 수 없다는 절박한 간구입니다.
3절 끝은 문장이 끊기듯 이어집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응답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떨리고, 하나님마저 진노하시는 듯한 상황에서 원망이 생길 법도 한데, 다윗은 기도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나를 회복시키고 고치실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라는 확신으로 그 하나님께 엎드립니다.
●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8절)
4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돌아오라’는 간구는 하나님이 자신을 멀리 떠나신 듯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떠나셨을 리는 없지만, 기도에 응답이 없는 듯하니 “돌아오셔서 내 영혼을 건져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주의 사랑으로’입니다. 원어로 ‘헤세드’인데,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 백성을 향해 변함없이 지키시는 사랑과 자비를 뜻합니다. 다윗이 구원을 구하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의로워서도, 무언가를 잘해서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변함없는 인자하심에 기대어 기도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위로를 줍니다. 우리는 무언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 앞에 나아갈 면목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하면, “잘못해서 기도할 수 없다”는 마음의 이면에는 “내가 잘하면 하나님께 무언가 주장할 수 있다”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다윗은 잘하든 못하든,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에만 기댑니다. 내 연약함을 그대로 끌어안고 “하나님, 저는 주의 인자하심과 긍휼밖에 기댈 것이 없습니다!”라고 나아갑니다. 우리가 부끄러운 자리에 있을 때에도 도리어 그 인자하심을 붙들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요.
5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아뢰며 기도합니다.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여기서 ‘스올’은 지옥이 아니라 죽은 자가 머무는 곳, 곧 무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구절의 뜻은 죽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살려 달라고 구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그저 편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살아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며 그 영광을 위해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생명을 주시면 그 생명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다는 간구입니다.
6절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눈물로 침상을 띄운다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만큼 밤마다 눈물로 기도하며 지새웠다는 것입니다. 기도해도 여전히 근심은 남아 있고, 하나님은 멀리 계신 듯합니다.
그런데 8절에서 시의 분위기가 완전히 뒤바뀝니다. 7절까지 그토록 힘들고 죽을 것 같고 밤마다 눈물짓던 시인이, 이제 이렇게 선포합니다.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기도의 시간을 통해 시인의 마음에 확신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으니 반드시 일하시리라는 확신입니다. 기도해 본 사람은 압니다. 기도한다고 문제가 즉시 해결되는 일은 드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게 되고,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반드시 응답하시리라는 확신이 마음에 자리 잡습니다. 그때 근심과 슬픔이 기쁨과 감사로 바뀝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입니다. 다윗은 밤새 눈물로 기도하다가 어느 순간 그 확신을 경험한 것입니다.
10절 “내 모든 원수들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심히 떪이여 갑자기 부끄러워 물러가리로다” 여기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2-3절에서 떨던 것은 다윗의 뼈와 영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떠는 것은 다윗이 아니라 원수들입니다. 기도를 통해 다윗의 떨림은 멈추고, 도리어 담대함이 자리 잡았습니다.
또 4절에서 다윗은 하나님께 ‘돌아오소서’라고 구했는데, 그 하나님이 돌아오시면 대적들은 도리어 ‘물러갑니다’ 문제가 우리를 떠나는 것은 우리가 문제와 싸워 밀어내서가 아닙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 기도를 들으실 때,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던 대적과 문제가 물러갑니다. 여전히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의 평강이 찾아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떨림 속에서 주저앉지 않고 기도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몸이 떨리고 마음이 떨리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때 나를 회복시키실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근거로 나아갑니다. 부끄러운 자리에 있을 때에도 그 인자하심을 붙들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돌아오셔서 우리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가 어찌할 수 없던 문제들을 물러가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