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01 | 매일성경
●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4절)
에서라는 인생의 문제를 앞두고 야곱은 하나님과 씨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름을 바꿔주셨습니다. 발꿈치를 붙잡는 자가 되지 말고, 하나님을 이긴 자의 정체성, 즉 ‘이스라엘’로 살아가라 하셨습니다. 야곱의 겉모습은 허벅지 관절이 부러져 나빠졌지만 야곱의 내면에는 소망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렇게 맞이한 아침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안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아졌다고 에서가 자신을 선의로 대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에서를 보는 순간 야곱 과거의 모습이 나옵니다.
야곱은 아내들과 자녀들을 단계별로 배치합니다. 여종과 그 자녀들을 맨 앞에, 레아와 그 자녀들을 중간에, 가장 사랑하는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세웁니다. 맨 앞에 세워진 자녀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요셉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장면이 나중에 요셉이 형들에게 미움을 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이 바뀐 야곱도, 여전히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3절“”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야곱이 앞장서 나갑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야곱의 마음속에는 위험이 닥치면 자신이라도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에 맨 뒤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야곱이 먼저 나섭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이 야곱을 조금씩 바꿔놓고 있었습니다.
야곱이 에서를 향해 걸어갑니다. 어젯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야곱은 지금 절뚝이며 걷고 있습니다. 그 몸으로 형 앞에 나아가면서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혔습니다. 완전히 자기를 낮춘 것입니다. 절뚝이는 동생이 땅에 엎드려 일곱 번 절하는 모습. 20년 전 자기를 속이고 축복을 빼앗아갔던 그 야곱이 이렇게 나타났을 때, 에서의 마음속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성경은 4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울었더라”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복수하러 왔던 에서가 달려와 동생을 껴안고 울었습니다.
극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과정에 하나님의 간섭하심이 있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라반이 야곱을 해하려고 달려왔을 때 하나님이 밤에 나타나 31:24절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고 하셨던 것처럼, 에서의 마음도 하나님이 움직이셨습니다. 약속의 사람을 하나님이 어떤 상황에서도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 오늘 본문이 다시 한 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10절)
에서가 눈을 들어 아내들과 자녀들을 보며 묻습니다.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5절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11절에서도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라고 합니다. 이제 야곱은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은혜’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5절과 11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8절,10절 15절은 ‘에서의 은혜’를 구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하기 시작했을 때, 에서에게도 은혜를 구하고 에서에게도 은혜를 베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은혜를 흘려보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가장 인상적인 문장이 10절에 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20년 동안 야곱에게 에서의 얼굴은 두려움과 공포의 얼굴이었습니다. 어젯 저녁은 더 그랬습니다. 그런데 오늘 야곱은 그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요? 야곱이 하나님을 대면했기 때문입니다. 32장과 33장은 ‘하나님의 얼굴’로 연결이 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대면한 야곱이, 이제 원수 같았던 형의 얼굴에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된 것입니다.
관계의 문제는 관계 자체를 붙잡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원수처럼 보이던 사람의 얼굴도 달라 보입니다. 인간관계에 갈등이 생길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을 향해 집중합니다. 그 사람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공격합니다. 그 사람이 사라지면 해결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상황은 항상 일어납니다.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내 마음의 시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먼저 엎드리고,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바라볼 때 사람이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본문에는 야곱의 부족한 모습도 있습니다. 17절에서 야곱은 숙곳에 머물며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가축을 위하여 우리도 만듭니다. 28장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28:21-22절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약속했는데 벧엘까지 아직 거리가 많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 전에 자기 집을 먼저 지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신앙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받아도, 우리의 변화는 한순간에 완전해지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고 충만한 은혜를 받아도 교회 문을 나서면 이전과 비슷해집니다. 그렇다고 변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변화는 더디지만,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증거가 20절입니다.. 야곱이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제는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만난, 내가 체험한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마무리합니다. 풀리지 않는 관계, 두려운 만남이 있다면 그 사람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두려웠던 사람의 얼굴이 달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변화가 더디게 느껴져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야곱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2026.04.30 | 매일성경
●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24절)
형 에서를 만나기 전 야곱은 예물도 보냈습니다.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마음은 여전히 불안했습니다. 22절 “밤에 일어나”라는 표현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에서가 갑자기 기습해 올까 두려워 밤중에 일어나 아내들과 자녀들을 깨우고 얍복 나루를 건너게 합니다. 소유도 모두 건너가게 하고 나서,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라고 합니다.
홀로 남은 야곱. 이 장면이 야곱의 인생 전체를 상징합니다. 아내도, 자녀도, 재물도 다 보냈습니다. 그 무엇도 이 큰 문제 앞에서 자신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이제 야곱에게 남은 것은 자기 자신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야곱은 평생 가장 중요한 만남을 갖게 됩니다.
24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이 홀로 남아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 씨름을 겁니다. 나중에 야곱은 이 사람이 하나님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30절에 야곱이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신학자 칼빈은 이 장면을 두고, 야곱과 씨름하신 분이 성자 예수님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훗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그 시대에도 하나님이 야곱을 직접 찾아오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가 만날 수 있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인 것처럼, 야곱도 이 씨름을 통해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씨름은 밤새 이어졌습니다. 야곱은 지는 법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발꿈치를 붙잡고 나왔고,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고, 외삼촌 라반과 20년을 씨름하며 버텨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이 이번에도 놓지 않았습니다. 25절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하나님이 야곱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야곱의 그 집요함, 그 아집과 의지를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만큼 야곱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한 가지를 하셨습니다. 25절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났더라” 허벅지 관절, 환도뼈는 인간 몸의 중심입니다. 이것이 골절되면 혼자 서 있을 수도 없습니다. 씨름은커녕 걷는 것도 어렵게 됩니다. 31절은 말합니다.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을까요? 야곱은 자기 힘으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아집과 고집, 자기 지혜와 의지, 이것들이 야곱 인생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중심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야곱아! 너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는데 그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내가 너에게 주려는 하나님의 약속, 그 땅의 약속과 자손의 약속은 절대 너의 방식으로는 이룰 수 없다.” 이것을 하나님이 야곱의 몸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한 “에서의 문제는 네가 도망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해결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28절)
뼈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도 야곱은 놓지 않습니다. 26절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난 채로 매달립니다. 야곱의 평생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이 한 문장이 드러냅니다. 축복이었습니다. 팥죽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던 것도,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것도, 20년 동안 라반 아래서 버텨온 것도 다 축복을 향한 집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의 야곱이 원했던 축복과 지금 야곱이 붙잡고 구하는 축복은 다릅니다. 이전에는 자기 방법으로 축복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꺾인 상태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야곱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름을 물으십니다. 27절 “네 이름이 무엇이냐” 갑자기 씨름하다 말고 이름을 물으시는 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이름은 정체성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붙잡는 자, 속이는 자’입니다.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야곱의 대답 “야곱이니이다”는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이 동시에 자기 인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속이며 살아왔습니다. 경쟁하며 씨름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28절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이스라엘’,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세상에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 있을 리 없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 이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야곱아, 너는 이제 하나님이 함께하는 존재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시니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다. 에서 앞에 두려워하지 마라. 이렇게 하나님이 새로운 정체성을 주신 것입니다. 이름이 바뀐 것은 인생이 바뀐 것입니다. 속이는 자 야곱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30절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야곱은 이 하룻밤의 만남을 자기 인생 전체에서 가장 소중한 장면으로 기억한 것입니다. 그리고 31절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더라” 밤에 시작된 이 씨름이 새벽 해가 뜨면서 끝났습니다. 22절에서 두려움과 불안으로 시작된 밤이, 하나님을 만나고 이름이 바뀐 뒤 찬란한 새벽으로 바뀐 것입니다. 야곱의 마음속에 가득하던 불안과 두려움이 하나님의 은혜와 소망의 빛으로 대체되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절고 있었습니다. 더 건강해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몸의 중심이 꺾인 채로 새벽을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 절름거리는 걸음으로 해를 향해 걸어갑니다. 자기 힘이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며 걸어가는 새로운 야곱, 이스라엘의 걸음이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말합니다. 칠흑 같은 밤을 만날 때, 내 힘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 그 자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할 자리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가장 두려웠던 에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내가 붙잡고 있는 것들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씨름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이름을 바꿔주시고, 아침 해를 보게 하십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 이것이 오늘 야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앙의 길입니다.
2026.04.29 | 매일성경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1절)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라반의 위협을 겨우 넘겼습니다. 하나님이 라반에게 나타나 막아주셨고, 두 사람은 돌무더기를 쌓아 평화 조약을 맺고 헤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야곱은 라반과 대등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야곱은 고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20년 만의 귀향입니다. 한 고비를 넘겼으니 이제는 좀 평안이 찾아올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생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한 문제가 해결되면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야곱 앞에 라반보다 훨씬 두려운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20년 전 장자의 명분을 팥죽으로 사고, 아버지의 축복을 속임수로 가로챘던 그 일. 에서는 그때 야곱을 죽이겠다고 했습니다. 20년이 흘렀지만 야곱의 마음속에 에서는 여전히 가장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에서를 만나기 전, 먼저 만난 것이 있었습니다. 1절 “야곱이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지라” 야곱이 구한 것도 아니었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야곱은 그들을 보자마자 이렇게 외칩니다. 2절 “이는 하나님의 군대라” 그리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이라 불렀는데, 마하나임은 ‘두 개의 진지’라는 뜻입니다. 야곱의 눈에 하나님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6절에 보면,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그 당시 400명의 무장한 군사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야곱을 향해 에서의 군대가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의 군대를 만나기 전 하나님께서 먼저 하나님의 군대를 야곱에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여전히 너와 함께 있다. 그것도 하나님의 군대로!”
20년 전 벧엘에서도 그랬습니다. 야곱이 혼자 두려움 속에 길을 떠날 때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20년 만에 돌아오는 길에도 하나님이 먼저 나타나십니다. 가는 길에도, 오는 길에도 하나님은 야곱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야곱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것,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의 야곱은 여전히 두려웠습니다. 자신이 돌아온다는 소식을 알리기 위해 심부름꾼을 에서에게 보냈는데 돌아온 소식은 에서가 400명을 데리고 온다는 겁니다. 그 말을 듣자 7절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합니다. 일행을 두 떼로 나눕니다. 에서가 한 떼를 치더라도 나머지 한 떼는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군대를 보았지만, 에서의 군대 앞에서 야곱은 여전히 떨렸습니다. 신앙이 있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도 두려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두려움 앞에서 야곱이 무엇을 했느냐입니다.
● “내가 주께 간구하오니”(11절)
야곱은 기도했습니다. 9절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 즉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이루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12절도 그렇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씨로 바다의 셀 수 없는 모래와 같이 많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야곱은 문제를 바라보며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셨던 말씀, 약속을 붙잡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야곱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기도의 방법입니다. 절박한 상황일수록 문제에 집중하면 더 두려워집니다. 그런데 그 문제 위에 계신 하나님과 말씀의 약속을 붙잡을 때, 기도가 달라집니다. 우리도 기도의 자리에 나올 때, 내 문제만 쏟아놓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 그 말씀을 이루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 이것이 야곱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야곱의 기도에는 또 하나 중요한 고백이 있습니다. 10절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가 이루었나이다” 지팡이 하나 들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20년 뒤 돌아올 때는 두 떼나 되는 사람과 가축과 재물이 생겼습니다. 예전의 야곱이었다면 “내가 열심히 일해서, 내 지혜 덕분에”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야곱은 이것이 자신이 감당할 자격도 없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합니다. 20년의 연단이 야곱을 이렇게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까지 왔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다시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 여기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 지금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야곱은 에서에게 예물을 준비합니다. 500마리가 넘는 짐승들을 준비합니다. 그것도 한꺼번에 보내지 않고 세 떼로 나눠, 차례로 보내면서 에서의 마음이 누그러지도록 계획을 세웁니다. 야곱은 기도하고 난 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행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노력을 대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우리의 노력 앞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지도록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모으고 최선을 다하되, 그 위에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시도록 기도하는 것. 야곱은 오늘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담대함입니다. 에서의 400명보다 먼저 하나님의 군대가 우리와 함께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곁에 하나님의 군대가 있습니다. 세상의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기도의 방법입니다. 절박한 상황일수록 문제가 아니라 약속을 붙잡으십시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계획을 붙잡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2026.04.28 | 매일성경
●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40절)
야곱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20년 동안 참아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그동안 야곱은 라반 앞에서 을이었습니다. 항의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2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다릅니다.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합니다. 36절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이전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20년 동안 야곱과 함께하시며 그를 이렇게 만들어 오셨던 것입니다.
야곱이 쏟아낸 말의 핵심은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38절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야곱이 맡은 양떼에서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습니다. 외삼촌의 것에 손을 댄 적도 없었습니다.
39절 내용은 더 놀랍습니다.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든지 밤에 도둑을 맞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그 당시 법으로는 짐승에게 물려 찢기거나 도둑을 맞은 경우 양치기에게 배상 책임이 없었습니다. 그냥 ‘잃었다’고 말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그마저도 야곱에게 채워 넣으라고 했고, 야곱은 그렇게 했습니다. 억울하지만 따지지 않고, 요구받은 것보다 더 성실하게 감당해왔습니다.
40절에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이것이 야곱의 20년이었습니다. 속이는 자로 살았던 야곱이, 라반 아래에서 성실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면서 맡겨진 일은 대충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사람이 안 보는 곳에서도 성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성실함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고백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은 41절과 42절에 있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봉사하였는데 외삼촌은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고 합니다.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정작 받아야 할 것은 10번이나 빼앗겼습니다. 라반이 어떤 사람인지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내버려 두면 빈손으로 만들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이렇게 가족과 재물을 이끌고 돌아갈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42절에 야곱이 직접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을 것이라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야곱이 빈손이 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과 수고를 보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라반은 끝까지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20년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계셨습니다.
이 말이 오늘 우리에게 참 크게 닿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느낌, 성실하게 감당했는데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억울함.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모든 고난과 수고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환경과 사람을 보며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시다.
●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44절)
오늘 본문에서 눈에 띄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부를 때 두 번이나 “이삭이 경외하는 이”(파하드 이츠하크)라고 부릅니다(42,53). 여기 ‘경외하다’는 깊은 두려움과 떨림을 의미합니다. 왜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까요?
이삭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모리아 산에 데려가 번제로 드리려 했던 그 날입니다. 칼이 내려오려는 순간 하나님이 막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은 두렵고 떨리는 분이었습니다.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살아계셔서 실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마 아버지 이삭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20년의 삶을 통해 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벧엘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라반의 손을 막으신 하나님, 고난과 수고를 보고 계신 하나님. 야곱에게도 이제 하나님은 가볍게 대할 수 없는 두렵고 살아계신 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경외하는 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국 라반과 야곱은 언약을 맺습니다. 돌무더기를 쌓아 증거로 삼고,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언약을 맺는 장면이 창세기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아브라함도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었고(21장), 이삭도 같은 왕과 언약을 맺었습니다(26장). 그리고 오늘 야곱도 라반과 언약을 맺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한 개인이었던 믿음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의 강한 자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라반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49절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또 50절에는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는 라반, 드라빔도 믿고 조상신도 믿는 혼합주의 신앙의 사람 라반이, 야곱의 하나님을 살피시고 증인이 되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삶을 20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본 라반이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야곱과 함께하신 하나님을요. 우리도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더라도,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네”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실함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성실합니다.
다른 하나는 신뢰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과 수고를 보고 계십니다. 42절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이 한 문장이 야곱을 버티게 한 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붙들고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2026.04.27 | 매일성경
●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24절)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의 행렬이 출발합니다. 혼자 떠났던 길을 이제 아내 넷, 자녀 열한 명, 그리고 그동안 모은 가축과 재물을 이끌고 돌아갑니다. 20년 전을 생각해 보면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분노를 피해 고향을 떠났을 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두운 밤 돌을 베개 삼아 누운 그 자리에서 마음은 두렵고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그 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약속하셨습니다. 28:15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야곱의 가정이 평탄했던 것은 아닙니다. 속고 속이고, 시기하고 경쟁하며, 두 자매가 자녀 낳기 경쟁을 벌이는 혼란스러운 20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약속하신 것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루어 가셨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말하지 않고 몰래 떠납니다. 라반의 눈빛이 예전 같지 않았고, 아들들의 태도도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를 기다렸습니다. 마침 라반이 양털을 깎으러 멀리가서 자리를 비웠습니다. 야곱은 이때가 도망칠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가족과 모든 재물을 이끌고 조용히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이때 라헬이 아버지 라반의 ‘드라빔’을 몰래 훔쳐 낙타 안장 밑에 감췄습니다. 드라빔은 가정의 수호신 역할을 하는 작은 우상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집집마다 두는 부적이나 수호신 같은 것입니다. 라반이 이 드라빔을 굉장히 소중히 여겼다는 것은, 뒤에서 라반이 야곱을 추격하며 제일 먼저 물어보는 것이 드라빔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라헬은 왜 이것을 훔쳤을까요? 먼 길을 떠나는 불안함 속에서, 하나님보다 이 드라빔이 자신과 가족, 그리고 미래를 더 확실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손에 잡히는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 본문 바로 앞 16절에서 라헬은 “하나님이 … 이제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르신 일을 다 준행하라”고 하며 겉으로는 하나님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신앙의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손에는 드라빔을 쥐고 있었습니다. 입으로 하는 고백과 실제로 의지하는 것이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 라헬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보이는 무언가를 더 붙들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이 우리 모두의 연약함입니다.
라반은 3일이 지나서야 야곱이 사라진 것을 알았습니다. 분노한 라반이 형제들을 데리고 야곱을 추격합니다. 무려 7일을 달려 길르앗 산에서 야곱을 따라잡습니다. 야곱은 가족과 짐을 이끌고 있고, 라반은 형제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왔습니다. 라반이 나중에 스스로 고백하는 말이 29절에 있습니다. “너를 해할 만한 능력이 내 손에 있으나” 이 말이 라반의 진짜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대로 야곱을 만났다면 큰 해를 당했을 것입니다. 야곱에게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위기의 순간을 단 한 절로 정리합니다. 24절 “밤에 하나님이 아람 사람 라반에게 현몽하여 이르시되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에 말하지 말라 하셨더라” 하나님이 한 번 나타나시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형제들을 이끌고 야곱을 해하러 달려왔던 라반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 순간 우리는 분명하게 보게 됩니다. 라헬은 드라빔을 숨기고 있지만, 야곱의 가정을 실제로 지킨 것은 드라빔이 아니었습니다. 20년 전 베델에서 “내가 너를 지키겠다”고 약속하셨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이 라반의 손을 막으셨습니다. 드라빔은 그 어두운 밤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 “라헬이 그 드라빔을 가져 낙타 안장 아래에 넣고”(34절)
라반이 드라빔을 찾겠다며 야곱의 장막들을 샅샅이 뒤집니다. 레아의 장막, 두 여종의 장막을 다 뒤졌지만 찾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라헬의 장막에 들어갔을 때, 라헬은 이미 드라빔을 낙타 안장 밑에 깊이 숨기고 그 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합니다. 35절 “마침 생리가 있어 일어나서 영접할 수 없사오니 내 주는 노하지 마소서” 라반은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갑니다.
성경이 이 장면을 자세히 기록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문화적으로 이 상황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것인지를 독자들은 알았습니다. 가정을 지켜준다는 드라빔이 지금 여인의 안장 밑에 깔려 있습니다. 그것도 제의적으로 부정하다는 생리하는 여인이 앉은 안장 아래에 숨겨져 있습니다. 이것이 드라빔의 실체입니다. 사람을 지킬 수 없고, 자신을 숨겨준 사람도 지킬 수 없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이 발견되지 않게 막을 힘조차 없습니다. 성경은 이 장면을 통해 우상의 무능함을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드라빔을 의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웃음과 함께 보여주는 것입니다.
라헬이 드라빔을 낙타 안장 밑에 숨겼듯, 우리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드라빔을 하나씩 숨겨두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돈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 사람의 능력이나 인맥이 나를 안전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 지위나 건강에 대한 과도한 의존. 이것들이 현대판 드라빔입니다.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삶이 흔들리지 않는 동안에는 우리가 진짜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기면 드러납니다. 위기가 장막을 뒤집을 때, 우리가 하나님보다 무엇을 먼저 붙들고 있었는지 보이게 됩니다.
야곱의 가정은 혼란스럽고 부족했습니다. 속고 속이고, 시기하고 경쟁했습니다. 그 가운데 드라빔까지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가정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20년 전 벧엘에서 하신 약속 한마디가, 라반의 손을 막고, 야곱을 고향으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며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말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하면서, 손에 꼭 쥔 드라빔이 있지 않는가? 드라빔은 우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약속하시고 반드시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그 드라빔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붙드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6.04.24 | 매일성경
● “라헬이 이르되 내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라”(3절)
야곱은 외삼촌 라반에게 속아 레아와 라헬 두 자매와 결혼합니다. 라헬을 사랑했고 레아는 사랑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레아에게 하나님은 네 명의 자녀를 주었습니다. 네 번째 유다를 낳으면서 레아는 29:35절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녀만 놓고 보면 레아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두 자매가 남편 하나를 두고 자녀를 낳기 위해 경쟁하고, 각자의 여종을 남편에게 들이고, 식물 하나를 두고 협상을 벌입니다. 창세기 30장은 야곱의 가정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태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 이야기를 이토록 솔직하게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자녀가 없었던 라헬이 언니 레아에게 네 아들이 태어나는 것을 보며 시기합니다. 야곱에게 말합니다. 1절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야곱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야곱이 화를 냅니다. 2절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의 말이 맞습니다. 자녀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은 여기서 기도하며 기다리는 대신, 자기 여종 빌하를 야곱에게 들입니다. 빌하를 통해 단을 낳자 6절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푸시려고 내 호소를 들으사 내게 아들을 주셨다”고 하고, 납달리를 낳자 8절 “내가 언니와 크게 경쟁하여 이겼다”고 합니다. 자녀를 낳는 과정에서 기쁨보다 억울함과 경쟁의 언어가 먼저 나옵니다.
이런 라헬의 이 모습이 누구와 닮았습니까? 야곱입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고, 기다리지 못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 모습이 꼭 야곱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외삼촌 라반을 통해 야곱에게 자신의 과거를 보여주셨다면, 이번에는 아내 라헬을 통해 야곱이 자기 자신을 다시 보도록 하십니다. 형의 장자권을 시기하고 욕심내어 자신의 방법으로 빼앗으려했던 야곱이었습니다. 자녀를 주고 안 주고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말했던 야곱이, 정작 자신은 온 삶을 내 힘으로 쥐려 했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이 레아의 소원을 들으셨으므로”(17절)
유다를 낳으면 하나님을 찬양했던 레아도 라헬이 여종을 통해 자녀를 낳자, 자신의 여종 실바를 야곱에게 줍니다. 실바를 통해 갓과 아셀이 태어납니다. 이름의 뜻이 각각 ‘행운’과 ‘행복’입니다. 그런데 정작 레아 자신이 행복한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때 아들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구해 어머니에게 가져옵니다. 합환채는 그 당시 사랑과 임신을 돕는다고 여겨지던 식물입니다. 야곱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어머니가 안쓰러웠던 아들이 마음을 담아 가져온 선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그것을 달라고 합니다. 레아가 분노합니다. 15절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그러자 라헬이 조건을 겁니다. 합환채를 자신에게 주면 오늘 밤 남편을 언니 침소에 보내겠다는 겁니다. 야곱이 라헬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서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산 것처럼, 라헬이 합환채로 남편의 하룻밤을 거래하고 있습니다. 그 방식이 많이 닮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 가정의 이 혼란을 통해 야곱 자신의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하나님은 계속해서 거울처럼 보여주고 계십니다.
저물 때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자 레아가 영접하고 동침합니다. 하나님은 레아의 소원을 들으셔서 다섯째 아들 잇사갈, 여섯째 아들 스불론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딸 디나도 태어납니다. 딸의 이름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 흔치 않은 일입니다. 디나는 나중에 34장에서 큰 사건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자녀가 없던 라헬이 처음부터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야곱의 아버지 이삭과 어머니 리브가도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때 이삭이 아내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했고, 하나님이 들으셔서 쌍둥이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라헬은 기도하지도 기다리지도 않고 인간적인 방법을 먼저 동원했습니다. 그 결과 가정이 시기와 경쟁으로 뒤엉켰습니다.
그리고 22절, 드디어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생각하신지라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들으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므로” 라헬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요셉이라 합니다. 이 요셉이 어떤 사람이 됩니까? 나중에 야곱의 가정 전체를 기근에서 살려내고,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살아남도록 길을 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시고 주신 아들이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됩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야곱의 가정이 너무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혼란스러운 과정을 통해 야곱의 아들 열한 명이 태어났습니다. 나중에 라헬이 베냐민을 낳으면서 열둘이 됩니다. 이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 12지파를 이루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민족이 형성됩니다. 시기와 경쟁과 거래와 혼란 속에서, 하나님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사람의 민낯이 이렇게 드러나도,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 가정도, 우리 공동체도 완전하지 않습니다. 시기가 있고, 경쟁이 있고, 상처가 있습니다. 그럴 때 사람에게 집중하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이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라헬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이 있습니다. 잘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인간적인 방법을 먼저 동원하고, 조급하게 서두르고, 남과 비교하며 경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까?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기억하신 라헬에게 요셉을 주셨듯이, 기도하며 기다리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응답하십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그 자리가, 기도해야 할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