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2절)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후 몇 개월이 지난 시점에 발생한 문제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몇 사람의 지도자들이 에스라를 찾아와 1차 귀환했던 백성들 사이 만연하고 있는 죄악에 대해 고발합니다. 1절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2절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고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루살렘 주변에 머물고 있던 이방인들과 통혼하며 섞이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의 심각성을 저자는 1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지 않는 민족들의 이름을 통해서 설명합니다.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입니다. 중심은 가나안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에스라 당시에는 가나안 민족은 이미 사라지고 없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들 민족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과거 출애굽 후 가나안 정복 시기를 상기시키기 위함입니다.
가나안땅을 정복하기 전 하나님은 여러 차례 가나안 백성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나안 풍속을 본받게 될 것이고 결국 그 땅에서 버림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가나안 족속 진멸하지 않고 어울리다가 결국 우상을 숭배하고 나라가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돌아와 회복을 향해 나가고 있는데 주변 백성들과 통혼하는 것은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민족들의 이름을 통해서 죄악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7-8절의 회개 기도에도 이런 역사를 고백합니다.
4:1-3절을 보면 1차 귀환한 후 성전을 건축할 때 앗수르에 의해 섞여버린 주변 백성들이 찾아와 성전 건축에 함께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때 스룹바벨과 백성들은 4:3절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들과 단절하면 분명 방해와 어려움이 있을 것을 알았지만 신앙의 정체성을 지켰습니다. 그것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런데 8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이 약화되고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그 땅의 기득권 세력들을 가까이하게 되었습니다. 부와 권세를 누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없이 즐기며 살아가는 이방인들과 함께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일에 지도자들이 앞장 섰다는 겁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물론이거나와 종교 지도자들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떠나야 할 사람들을 떠나지 않고 섞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과 동떨어져 살게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 속에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을 가지고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동화되어 섞이고 세상을 따라가는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아름다움과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매력을 그들에게 보여줌으로 오히려 세상이 하나님 나라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3절)
에스라는 죄악에 관한 소식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습니다. 3-4절에 반복되는 말이 “기가 막혀 앉으니”입니다. 애통함을 표현할 때 보통은 겉옷을 찢습니다. 그런데 속옷까지 찢었다는 것은 에스라가 느낀 참담함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할 말을 잃고 기가 막혀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4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고 합니다. 지도자들부터 백성들까지 죄악이 만연한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떠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죄악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스러운 신실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시대 세상의 물결이 거세지만, 세상의 흐름을 따라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순종하는 성도들이 바로 이런 소수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섞이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아갑니다. 이들이 소망입니다.
에스라의 회개 기도가 이어집니다. 5절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라고 하는데, 이어지는 내용은 범죄한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엄벌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권한이 에스라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7:26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왕이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두 손을 듭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모습입니다. 6절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자신이 저지른 죄악이 아니지만 자신의 죄악으로 느끼면서 감히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에스라는 죄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악 가운데서도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살아가는데, 에스라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을 들지 못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면서도 하나님 앞에서는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있지 않은지 돌아봅니다.
또한 에스라는 그들의 죄악을 우리의 죄악으로 고백합니다.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에스라는 공동체의 죄악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함께 짊어지고 해결해야 할 모두의 죄악이요 나의 죄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다른 사람의 죄를 지적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한국교회를 보면서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가정에서도. 하지만 그 죄악을 나의 죄악으로 애통해하고 회개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는 심각한데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들의 죄악이 바로 나의 죄악임을 고백하며 엎드려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회복의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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