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3절)
성벽 봉헌식을 하며 백성들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합니다. 말씀을 통한 부흥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말씀이 백성들을 새롭게 합니다. 점점 더 온전케 합니다. 이들이 낭독한 내용은 1절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라는 구절입니다. 이는 신23:3-6절의 내용입니다. 암몬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출애굽하여 광야 길을 걷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배척하고 잔인하게 공격하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이라는 주술사에게 뇌물을 주고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였습니다.(민22-24장) 하지만 하나님은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민24:10절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그러니 이들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말씀의 기준을 따라 분리해야 합니다. 이전 에스라 때에는 이방인과 통혼하는 문제가 있어 스10:11절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때는 관계의 단절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의 완전한 분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3절은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신앙의 순수성과 거룩함을 위해 섞이면 안 됩니다. 분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계속 이스라엘은 섞여 있었습니다. 분명 공동체에 분명 부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알지 못했고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통해 깨닫고 분리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묵상하며 작은 부분 하나도 점검하면서 세상 속에 살지만 구별되어야 합니다. 구별된 가치관,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분리해야 할 것을 분리해야 합니다.
●“레위 사람을 불러 모아 다시 제자리에 세웠더니”(11절)
이어지는 4-13절은 분위기가 갑자기 바뀌면서 충격적인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교제하면서 도비야를 위해 성전에 큰 방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방의 원래 목적은 제사장과 성전 봉사자들인 레위사람들을 위해 예물을 쌓아 놓는 방이었습니다. 도비야는 어떤 인물입니까? 1절에서 분리해야 할 대상인 암몬 사람입니다. 산발랏과 함께 성벽 재건을 방해하며 조롱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자가 다른 곳도 아닌 하나님의 성전에, 다른 방도 아닌 성전 봉사자들을 위해 예물을 보관하는 방에 머물렀다는 것이 충격입니다. 그 일을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이 주도했다는 것은 더 충격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너무 갑작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과정이 말씀 중심으로 회개와 은혜 속에서 회복되어 갔는데 말이지요. 하지만 6절은 이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설명합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있지 않을 때 일어났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32년에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에게 돌아갔습니다. 왜냐하면 처음 예루살렘에 올 때 돌아온 기간을 정하고 왔기 때문입니다(2:6절).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때는 2:1절을 보면 아닥사스다 제20년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페르시아로 돌아간 때는 아닥사스다 32년입니다. 12년 정도 총독으로 일을 하다 돌아간 것입니다. 그 이후 일어난 일입니다.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은 아마도 느헤미야가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런 일을 저지른 듯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그의 행동은 진실이 아닌 가식이었습니다. 13:28절에도 보면 대제사장인 엘리아십의 손자가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다고 합니다. 계속해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아닌 사람 앞에서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마음 중심이 변하지 않으면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6절 하 “며칠 후에 왕에게 말미를 청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하는데 “며칠 후”를 새번역성경은 “얼마가 지나서”로 번역했고 아마 2-3년 후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로 돌아가서도 고국에 대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염려가 된 듯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왔는데 짧은 기간 안에 예루살렘은 많은 것이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앞에서도 계속 강조하였듯 외형적인 건물을 세우는 것보다 내적인 신앙을 온전히 세우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성전도 성벽도 세워져 있지만 마음의 성전이 무너지니 심각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리고 세우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사실을 알고 도비야의 세간을 방 밖으로 다 던지고 그 방을 정결하게 하고 다시 예물을 들여놓습니다.
도비야가 성전 방을 차지한 것은 하나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12:44-47절에 나온 것처럼 성전을 섬기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할 것들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레위인들은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생계를 위해 밭으로 도망합니다. 성전 중심 예배를 위해 질서있게 조직했던 모든 것이 무너졌습니다. 신앙이 이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과연 온전할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먼저 지도자들을 꾸짖습니다.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불러 다시 제자리에 세웁니다. 오늘 본문에 “다시”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9절 “다시 그리로”, 11절 “다시 제자리로”. 그렇습니다. 다시 원래 모습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섬김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에도 치울 것은 치우고 다시 말씀으로 채워야 합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다시 곳간에 성전 봉사자들을 섬길 예물을 채우고 관리하는 자들을 세웁니다. 이들은 13절 하 “그들이 충직한 자로 인정됨이라 그 직분은 형제들에게 분배하는 일이었느니라” 정직하고 인정받는 사람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바르게 분배하게 합니다. 늘 강조하지만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 일상에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순결을 위한 분리가 필요합니다. 다시 채워야 할 것으로 마음의 성전을 채우고,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로 다시 돌아가 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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