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44절)
예수님께서 사마리아를 떠나 갈릴리로 향하십니다. 그런데 갈릴리에 도착하시기도 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44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막상 갈릴리에 도착하니 45절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을 영접한 이유가 45절 “자기들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입니다. 2장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셨습니다. 동시에 표적도 행하셨습니다. 2:23절은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갈릴리 사람들이 본 것은 예수님의 표적이었고 이것이 예수님 환영의 이유였습니다.
이 모습이 어제 묵상 말씀인 사마리아 사람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사마리아 지역에서 예수님은 어떤 표적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한 여인을 통해 예수님을 소개받고 나와서 말씀을 듣고 믿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머무시면서 말씀 전해주기를 요청해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결과를 41절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절 하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고 고백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표적이 아닌 말씀을 듣고 믿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을 인정하지 않고 짐승처럼 생각하며 무시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는 관심이 없고 표적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런 신앙의 위험성을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48절에서 갑작스럽게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표적 중심의 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오해를 낳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1:29절). 그것을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처럼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실 것이고, 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멸망하지 안하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죄의 세력 아래 신음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고 참 생명과 참 자유를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그 십자가를 향해 예수님은 묵묵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이것을 바로 알고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땅에서 몇 개의 표적을 경험하는 것보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 해결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표적과 기사 중심의 신앙은 예수님을 오해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보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길 기대합니다. 표적에 집중할수록 잘못된 기대가 커집니다. 예수님이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가 되어주길 원합니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아들도 외면하고 버릴 것입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기대했던 사람들에 의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적 중심의 신앙이 아닌, 말씀 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절)
이처럼 말씀과 말씀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두 번째 표적에서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 표적을 행하신 갈릴리 가나에 도착하십니다. 결혼 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왕의 신하 한 사람이 등장하는데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습니다.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의 거리는 약 30km이고 걸어서 8시간 정도가 걸립니다. 이 신하가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먼 길을 달려와 간청합니다. 47절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그리고 다시 절규하듯 부르짖습니다. 49절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이 신하는 예수님께서 함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대 치유해주시길 간구하고 있습니다. 다른 방법은 머릿속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함께 가는 대신에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제 신하는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갈 것인지, 아니면 기어이 예수님을 끌고라도 갈 것인지. 놀랍게도 신하는 50절 하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표적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갑니다. 그리고 아들이 낫는 표적을 경험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싶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표적이 앞서고, 표적이 우리 신앙을 이끌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내 뜻을 이루려 합니다. 하지만 표적보다 말씀이 앞서갈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오직 말씀을 믿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신하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가는데, 아이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올라오던 종들을 만납니다. 종들이 전한 소식은 아이의 열이 떨어져 살아났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52절 “어제 일곱 시”입니다. 우리 시간으로 오후 1시입니다. 이때가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아있다고 말씀하셨던 그때임을 깨닫고 신하의 모든 집안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 표적이 54절 “예수께서 유대에서 갈릴리로 오신 후에 행하신 두 번째 표적이니라”고 합니다. 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도 행하신 많은 표적은 제외하고 갈릴리에서 행하신 표적에 첫 번째, 두 번째라고 순서를 말합니다. 두 표적의 공통점을 말하기 위함입니다. 바로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첫 번째 표적인 가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의 어머니는 하인들에게 2:5절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하인들도 예수님께서 물을 채우라고 하니 가득 채웠고, 물을 떠다주라 하니 그대로 순종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두 번째 표적도 말씀을 믿고 순종해서 갔더니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말씀보다는 표적을 따라갑니다. 이로 인해 신앙이 왜곡되고 삶이 안정적이지 못한 경우들이 많습니다. 이런 시대 어렵지만 말씀을 붙잡고, 매일 묵상하며, 함께 말씀을 나누는 삶이 복된 신앙입니다. 무엇보다 말씀의 자리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하루하루가 쌓여 견고한 신앙, 복된 인생이 됩니다.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