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1절)
12-13장까지를 읽으면 성도들의 현실이 절망적입니다. 큰 용이 교회를 공격합니다. 13장에서는 용의 하수인인 두 짐승이 권세를 가지고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 성도들을 사로잡아가고 칼로 죽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경배하고 추종합니다. 이들의 이마에 짐승의 이름의 숫자인 육백육십육을 받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온통 짐승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4장으로 넘어오면 완전히 분위기가 바뀝니다. 1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승리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온산에 서 계십니다. 이는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고(12:17), 짐승들이 하나는 바다에서 올라오고, 다른 하나는 땅에서 올라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세상은 이처럼 용과 짐승들이 활개를 치는 것 같지만 시선을 돌려 하늘에 있는 시온산을 바라보니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땅에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4장에서 요한이 땅의 어두운 현실에서 열린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 보좌에 앉으신 영광의 하나님의 만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렇습니다. 계시록은 우리 눈으로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열린 문으로 올라가 하늘 보좌를 보아야 하고, 땅에서 눈을 들어 시온산에 서 계신 어린양을 바라봐야 합니다.
어린양 곁에는 144,000명의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짐승의 이름이 아닌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어린양과 성도들이 함께 시온산에 서 있는 이유는 큰 소리로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함입니다. 이 새 노래는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3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합니다.
이어서 땅에서 속량받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4-5절이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자와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계시록에서 여자는 음녀로 표현되며(17장), 본문 8절에 나오는 “큰 성 바벨론” 즉 세상을 상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짐승에게 경배하고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순결한 자들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길을 따른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승리자들입니다. 고난 뒤에 승리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그 대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신 믿음을 지킨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계시록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통해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0:11절에서도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복음을 전하라는 겁니다. 본문 6절도 “땅에 거주하는 자들 … 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이요, 당시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도 집중해야 할 것이 바로 영원한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7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지만 거부하는 자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심판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12절)
하나님의 심판이 누구에게 어떻게 임하는가? 8절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세상을 상징하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집니다. 이유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로 하여금 음행을 하게 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에 앞장서고 세상을 그 길로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런 바벨론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아닌 짐승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10절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섞인 것이 없다”는 것은 긍휼이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합니다. 불과 유황입니다.
이것을 11절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짐승을 경배하고 따랐습니다. 그 결과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는 이 세상에서 잠깐 기쁨을 맛보지만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고통 당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지배하는 큰 성 바벨론에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성도들은 인내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의 죽음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합니다. 11절과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잠깐의 기쁨을 위해 믿음을 저버린 자들은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지만, 말씀과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잠깐 고난을 받지만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영광의 하나님과 함께 하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의 안식입니다.
‘암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군이 친일파를 암살합니다. 그런데 독립군 중에 일제 첩자가 있었습니다. 염석진이라는 인물입니다.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염석진은 경찰 고위간부가 됩니다. 법이 이 사람을 벌하지 않자 독립군 저격수인 안윤옥이라는 여인이 염석진을 처단합니다. 총을 쏘기 전 안윤옥이 묻습니다. “왜 동지를 배반하고 반역자 노릇을 했습니까?” 염석진이 대답합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지,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 그리고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납니다.
본문은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성도들의 현실이 힘들어도 승리의 그 날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 날을 기대하며 그 날을 믿음으로 준비하는 삶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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