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3절)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편지를 보내는 이유는 교회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보면 예수님의 재림 때문입니다. 이것을 1절 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라고 합니다. 주님의 재림에 관한 잘못된 이야기들이 많았습니다. 2절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아마 “성령께서 이렇게 말했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현대의 시한부종말론자들처럼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바울의 편지를 거짓으로 이용해서 재림이 임박했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혼란과 두려움을 겪습니다.
바울은 2절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3절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시대도 누가 어떻게 주장해도 미혹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주장들에 미혹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요? 주님의 재림 전에는 반드시 징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장에서 성전 파괴와 예수님 재림에 관해 말씀하시면서, 마24:15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이라고 하시면서 다니엘이 말한 것처럼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세워지는 것을 보면 이것이 성전이 파괴되기 전 임할 징조임을 알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 재림 전에도 징조가 나타날 것인데 배교하는 일이 있고, 특히 불법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 불법의 사람을 본문은 3절 “멸망의 아들”, 4절 “대적하는 자”, 8절 “불법한 자”, 9절 “악한 자”라고 표현합니다. 이 불법의 사람 특징은 4절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습니다.
우리는 이 내용들이 혼란스럽지만 5절을 보면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런 내용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런 불법의 사람을 막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온 세상이 용과 짐승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악의 세력을 결박하고 다스리시는 것처럼 막으십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8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승리하시고 불법한 자를 폐하십니다.
그런데 이 악한 자의 배후가 등장하는데 바로 사탄입니다. 이들이 사용하는 도구는 9절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이며, 10절 “불의의 모든 속임”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영과 말과 편지 내용을 악용해서 재림에 대한 거짓 내용을 전하고, 거기다 능력과 표적과 기적을 동원해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니 흔들리고 미혹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통해 어떤 일이 일어나냐면 12절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합니다. 즉 진리가 아닌 불의를 좋아하는 자들이 미혹되고 결국 멸망의 길로 걷게 된다는 겁니다. 진리를 따르는 자와 불의를 따르는 자가 이 과정에서 분리됩니다. 생명과 사망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15절)
오늘 본문의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이런 미혹과 혼란의 시대에 성도들이 붙잡아야 할 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진리”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10,11,13). 14절에서는 진리를 “우리의 복음”이라고 표현하고 15절에서는 “가르침을 받은 전통”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전통’은 사도의 모든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이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는 2절의 거짓된 “영과 말과 편지”가 있고, 15절에는 바른 “말과 편지”가 대조를 이룹니다. 사도가 가르쳐준 진리의 말씀 말고 새롭고 이상한 가르침이 성도들을 미혹하고 관심을 끕니다. 이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단들이 사람을 유혹하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기존 교회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을 알려준다고 합니다. 자신들에게만 진리가 있다고 미혹합니다. 이렇게 새로운 가르침이나 신비한 능력에 현혹되지 말고,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66권을 붙잡고 매일 묵상하며 진리 안에서 걸어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진리 안에 굳게 서기를 바라면서, 성도들이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언제 주님이 오신다, 누가 그렇게 꿈을 꾸고 성령의 음성을 들었다 등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말고, 13절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즉 택하심과 거룩하게 하심과 구원받게 하심에 집중하고 감사하라는 겁니다.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재림의 때에 관심 기울이지 말고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살아가라는 겁니다. 그것이 살전5:5절처럼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인 성도들의 삶이라는 겁니다. 살전5:8절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이렇게 믿음과 사랑, 소망으로 늘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바른 삶입니다. 언제 주님이 오셔도 기쁨으로 맞이하는 삶입니다.
특히 본문 16-17절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어쩌면 재림에 대한 관심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이 위로를 얻고자해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의 진정한 위로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께서 위로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 마음을 위로해주신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고난 가운데 있다하여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우리는 위로를 얻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로 충분합니다.
여전히 거짓된 가르침이 많은 혼란한 시대에 진리의 말씀을 굳건하게 붙잡고, 그 말씀 묵상하며,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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