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26:1-23절/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는데(25.10.16)

2025.10.16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웃시야가 …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4절)

​아마샤에 이어 웃시야가 왕이 됩니다. 아버지 아마샤가 반역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기에 웃시야는 어린 나이인 16세에 왕이 됩니다. 그리고 52년간을 통치합니다. 웃시야에 대한 이야기는 왕하14:21-22절과 15:1-7절에 짧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에는 웃시야의 이름이 ‘아샤라’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에 등장하는 제사장의 이름과 동일합니다. 그래서 역대기는 웃시야라고 부릅니다.

웃시야에 대한 평가는 4절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입니다. 이 평가는 전체적인 평가가 아닌 아마샤와 웃시야의 통치 초반에 대한 평가입니다. 아마샤도 신실하게 시작했지만 전쟁에서 승리한 후 우상을 숭배하고 선지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웃시야 역시 아버지의 길을 걷습니다.

웃시야가 정직하게 행한 이유를 5절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아는 스가랴가 웃시야 곁에서 말씀으로 지도했습니다. 이때 웃시야는 하나님을 찾았고 그런 웃시야를 하나님은 형통케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내용이 24:2절에도 나왔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웃시야의 할아버지인 요아스 왕 때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 있는 동안에 요아스가 정직하게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여호야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요아스가 변질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실제로 여호야다 죽은 후 요아스는 급속하게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합니다. 웃시야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 두 사람의 실패를 보면서 말씀을 밝히 아는 신실한 사람의 지도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찾는 일입니다. 우리가 매일 말씀을 묵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스스로 말씀 붙들고 순종하는 삶으로 성숙하기 위함입니다.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형통함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6-15절까지가 그 내용입니다. 먼저 유다의 지경을 넓혀주십니다. 서쪽으로는 블레셋을 점령하고 성읍을 건축합니다. 남쪽으로도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십니다. 동쪽으로는 암몬 사람들이 조공을 바칩니다. 뿐만 아니라 웃시야는 아마샤때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심지어는 광야에 망대와 물웅덩이를 만들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기릅니다. 산과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둡니다. 나라가 심히 부강했다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져서 곳곳에 새로운 성읍을 만들고 거주합니다. 풍성하고 강성한 삶입니다.

군사력도 대단합니다. 큰 용사인 족장들을 중심으로 건장하고 싸움에 능한 군사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15절은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합니다. 새로운 무기를 연구하고 만들어 나라를 견고하게 세웁니다.

이렇게 보면 웃시야 시대 부강함이 솔로몬 시대와 같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형통함이 웃시야의 능력이 아닌 7절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찾는 웃시야를 하나님께서 도우셨습니다. 8절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 15절 하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으로 형통함과 강성함을 누렸습니다. 그렇습니다. 25:8절 “하나님은 능히 돕기도 하시고 능히 패하게도 하시나이다”는 말씀처럼 아마샤도 군사력이 아닌 하나님을 의지할 때 능히 도우셨는데, 웃시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16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강성함이 웃시야에게 문제가 됩니다. 16절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계속해서 잘 될 때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아스, 아마샤, 웃시야까지 반복됩니다. 어쩌면 이것이 모든 사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형통과 강성함이 교만을 가져오고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그렇다면 형통함을 구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신 형통과 강성함을 겸손하게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의 준비가 더 중요합니다.

웃시야는 제사장만이 하도록 되어 있는 향단에 분향하는 일을 하려 합니다. 왕으로서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리는데 제사장이 하는 일만 금지되어 있으니 그 일까지 행하려 한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진짜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 자신의 마음대로 행동하려 합니다. 심각한 죄악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사랴가 80명의 용맹한 제사장을 데리고 들어가 막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합니다. 18절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이 내용이 역대기 저자가 당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 제사를 회복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을 무시하고 사람들의 욕심과 편리를 따라 행한다면 하나님 앞에 죄악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정하신 선을 잘 지키는 것이 복된 삶입니다.

아사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분향을 강행하려 하다 웃시야는 화를 냅니다. 그러자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깁니다. 나병은 부정한 질병으로 성전에 머물 수 없습니다. 자동적으로 성전에서 쫓겨납니다. 뿐만 아니라 21절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죽을 때까지 성전에서 끊어진 삶을 삽니다. 그리고 왕의 묘실에 묻히지 못하고 조상들의 땅에 묻힙니다. 웃시야의 삶과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영광스럽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교만의 결과가 무섭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형통함을 주십니다. 그러나 형통함은 교만으로 이어져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형통함과 강성함 이전에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신실한 믿음을 소유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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