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19절)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통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18절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미워한다”, “박해한다”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반복됩니다(18,19,20,23,24,25), 오늘 본문에만 ‘미워한다’는 말이 무려 일곱 번이나 나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서로 사랑하며 산다면,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칭찬하고 인정해 주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세상은 우리를 미워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세상으로부터 미움과 박해를 받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18절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제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예수님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바른 진리의 말씀으로 세상의 어둠과 죄악을 드러내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이들은 회개해야 하지만, 대신에 예수님을 미워하고 제거하려 합니다. 이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19절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세상 사람들은 ‘자기 편’을 정확하게 알아봅니다. 만약 어떤 성도가 교회는 다닌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세속적인 가치관과 타협하며 살아간다면 세상은 그를 절대 미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편으로 환영하고 사랑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예수쟁이가 되어, 예수님처럼 말하고 예수님처럼 생각하며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게 살려고 몸부림친다면 어떻게 될까요? 세상은 그런 우리를 불편해하고 껄끄러워하며 결국 미워하고 박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어둠의 영역에 속하지 않고, 빛의 자녀로 살아갈 때 필연적으로 세상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께 제대로 속해 있다는 영광스러운 증거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도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고난을 겪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제자도의 길입니다.
●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22절)
그렇다면 세상이 이토록 진리를 거부하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적대하는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 21절은 “나를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라”고 하십니다. 이 중심에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미워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 맹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22절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죄를 핑계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만약 예배 중에 성도님들이 마음대로 나갔다 들어왔다 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기준이 명확하지 않을 때는 그것이 잘못인지도 모르고 그냥 하던 대로 행동할 것입니다. 그것을 본받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회자인 제가 “지금부터 예배 시간에 함부로 이동하는 분은 벌금은 내야 합니다”라고 엄격한 ‘기준’을 세운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기준이 선포된 순간부터, 그 규칙을 어기는 행동은 분명한 잘못이 되고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천국 복음의 ‘절대적인 기준’을 명확히 선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핑계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복음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받아들이고 믿으면 구원이요 생명이지만, 거절하고 외면한다면 심판입니다.
이토록 세상이 진리를 거부하고 미움과 박해가 가득한 세상에서, 남겨진 제자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그저 침묵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동역자를 약속하십니다. 26절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주님이 보내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 성령님은 곁에서 우리를 도우시며 변호하시는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 충만은 단지 신비하고 기적적인 현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의 가장 핵심적인 사역은, 적대적인 세상 한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구원자이심을 당당히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7절은 제자들 역시 증언의 사명이 있다고 하십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언하느니라.” 진리의 성령께서 일하실 때, 이 시대 우리 역시 그 증언의 사역에 동참해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2천 년 전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땅에서 시작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어떻게 머나먼 대한민국 땅까지 전해져서 오늘 우리가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까? 바로 성령의 능력을 덧입고 세상의 미움과 죽음을 불사하며 복음을 ‘전했던’ 증언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증언하는 자가 없다면 세상은 결코 진리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과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려 몸부림치다가 세상으로부터 차가운 시선과 미움을 받고 있습니까? 비록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지라도, 우리를 세상에서 택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그 십자가 은혜를 기억합시다. 일상의 삶 속에서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행실로, 그리고 담대한 입술의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살아있는 ‘증인’의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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