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40절)
야곱이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20년 동안 참아왔던 말들이 한꺼번에 쏟아집니다. 그동안 야곱은 라반 앞에서 을이었습니다. 항의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2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야곱은 다릅니다.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합니다. 36절 “내 허물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이전의 야곱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20년 동안 야곱과 함께하시며 그를 이렇게 만들어 오셨던 것입니다.
야곱이 쏟아낸 말의 핵심은 자신이 얼마나 성실하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38절 “내가 이 이십 년을 외삼촌과 함께 하였거니와 외삼촌의 암양들이나 암염소들이 낙태하지 아니하였고 또 외삼촌의 양 떼의 숫양을 내가 먹지 아니하였으며” 야곱이 맡은 양떼에서 문제가 생긴 적이 없었습니다. 외삼촌의 것에 손을 댄 적도 없었습니다.
39절 내용은 더 놀랍습니다. “물려 찢긴 것은 내가 외삼촌에게로 가져가지 아니하고 낮에 도둑을 맞든지 밤에 도둑을 맞든지 외삼촌이 그것을 내 손에서 찾았으므로 내가 스스로 그것을 보충하였으며” 그 당시 법으로는 짐승에게 물려 찢기거나 도둑을 맞은 경우 양치기에게 배상 책임이 없었습니다. 그냥 ‘잃었다’고 말하면 됐습니다. 그런데 라반은 그마저도 야곱에게 채워 넣으라고 했고, 야곱은 그렇게 했습니다. 억울하지만 따지지 않고, 요구받은 것보다 더 성실하게 감당해왔습니다.
40절에 야곱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와 같이 낮에는 더위와 밤에는 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지냈나이다” 이것이 야곱의 20년이었습니다. 속이는 자로 살았던 야곱이, 라반 아래에서 성실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빚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면서 맡겨진 일은 대충 하는 모습이 우리에게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사람이 안 보는 곳에서도 성실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의 성실함은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고백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말은 41절과 42절에 있습니다. 야곱은 20년 동안 봉사하였는데 외삼촌은 품삯을 열 번이나 바꾸었다고 합니다.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정작 받아야 할 것은 10번이나 빼앗겼습니다. 라반이 어떤 사람인지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내버려 두면 빈손으로 만들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야곱이 이렇게 가족과 재물을 이끌고 돌아갈 수 있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42절에 야곱이 직접 말합니다. “우리 아버지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이삭이 경외하는 이가 나와 함께 계시지 아니하였더라면 외삼촌께서 이제 나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을 것이라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어젯밤에 외삼촌을 책망하셨나이다”
야곱이 빈손이 되지 않은 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이유를 야곱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고난과 수고를 보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라반은 끝까지 빼앗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20년을 하나도 빠짐없이 보고 계셨습니다.
이 말이 오늘 우리에게 참 크게 닿습니다. 열심히 살았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느낌, 성실하게 감당했는데 오히려 손해를 본다는 억울함. 우리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고백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모든 고난과 수고를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나님이 갚아주십니다. 환경과 사람을 보며 낙심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갑시다.
● “이제 오라 나와 네가 언약을 맺고”(44절)
오늘 본문에서 눈에 띄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부를 때 두 번이나 “이삭이 경외하는 이”(파하드 이츠하크)라고 부릅니다(42,53). 여기 ‘경외하다’는 깊은 두려움과 떨림을 의미합니다. 왜 굳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일까요?
이삭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모리아 산에 데려가 번제로 드리려 했던 그 날입니다. 칼이 내려오려는 순간 하나님이 막으시고 살려주셨습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은 두렵고 떨리는 분이었습니다. 가볍게 대할 수 없는, 살아계셔서 실제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은 아마 아버지 이삭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자신도 20년의 삶을 통해 그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벧엘에서 약속하신 하나님, 라반의 손을 막으신 하나님, 고난과 수고를 보고 계신 하나님. 야곱에게도 이제 하나님은 가볍게 대할 수 없는 두렵고 살아계신 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경외하는 이”라는 말이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국 라반과 야곱은 언약을 맺습니다. 돌무더기를 쌓아 증거로 삼고, 서로의 경계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언약을 맺는 장면이 창세기에서 반복되는 패턴이라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아브라함도 왕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었고(21장), 이삭도 같은 왕과 언약을 맺었습니다(26장). 그리고 오늘 야곱도 라반과 언약을 맺습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한 개인이었던 믿음의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의 강한 자들이 두려워하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라반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49절 “우리가 서로 떠나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나와 너 사이를 살피시옵소서” 또 50절에는 “하나님이 나와 너 사이에 증인이 되시느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는 라반, 드라빔도 믿고 조상신도 믿는 혼합주의 신앙의 사람 라반이, 야곱의 하나님을 살피시고 증인이 되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야곱의 삶을 20년 가까이 옆에서 지켜본 라반이 부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야곱과 함께하신 하나님을요. 우리도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를 가까이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더라도,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네”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실함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이 보든 안 보든 성실합니다.
다른 하나는 신뢰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과 수고를 보고 계십니다. 42절 “하나님이 내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보시고” 이 한 문장이 야곱을 버티게 한 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을 붙들고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