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20절)
요셉이 아버지의 요청을 따라 형들을 만나러 갑니다. 세겜까지 갔지만 만날 수 없었고, 다시 도단으로 가서 드디어 형들과 만납니다. 형들이 보였을 때 요셉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하지만 형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채색옷을 입은 요셉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이때 형들은 말합니다. 19절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형들이 가장 싫어했던 것이 바로 요셉의 꿈이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기들이 요셉에게 절한다는 그 꿈, 어쩌면 정말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분노와 뒤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20절 끝에 형들이 말합니다.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 우리가 볼 것이니라” 요셉을 죽이면 그 꿈도 끝날 것이라는 계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형들의 착각입니다. 요셉의 꿈은 요셉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사람이 꺾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사람이 아무리 하나님의 계획에 맞서도,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형들은 이미 작전을 세워 두었던 것 같습니다. 멀리서 요셉을 보자마자 죽일 계획이 나왔고, 아버지를 어떻게 속일지까지 구체적으로 논의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사람이 제동을 겁니다. 장자 르우벤입니다. 21절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을 해치지 말자” 왜 르우벤이 이런 제안을 했을까요? 그 당시 장자에게는 동생들의 생명을 지켜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르우벤에게는 또 다른 사정이 있었습니다. 앞서 그는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이미 아버지 눈 밖에 난 자신이, 이번에 장자로서 역할을 다함으로써 그 잘못을 만회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르우벤의 제안은 이것이었습니다. 죽이지 말고 그냥 구덩이에 던지자. 그는 나중에 몰래 돌아와 요셉을 구해낼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이 장면 속에서, 하나님은 르우벤의 마음을 움직여 요셉의 생명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형들은 요셉이 오자마자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이 구덩이는 빗물을 모아두기 위해 판 저수조로, 깊이가 6-8미터에 달하고 입구는 좁고 안은 넓어서 한 번 들어가면 혼자 빠져나올 수 없는 구조였다고 합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당한 일이 얼마나 당황스럽게 무서웠을까요? 분명 요셉이 구덩이 안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형들이 애굽에서 요셉에게 이 사실을 실토할 때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우리가 듣지 아니하였다”(창 42:21)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형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서 앉아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성경은 사람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이 이런 일을 만들어냅니다. 형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시기와 분노가 쌓이면 사람은 이런 일을 저지릅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고, 바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36절)
음식을 먹다가 유다가 상단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스마엘 사람들이 낙타에 짐을 싣고 애굽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순간 유다가 말합니다. 26절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자” 죽이는 것보다 팔아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계산이었습니다. 형들이 유다의 말에 따랐습니다. 27절 끝에 “그의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이 장면에서 유다가 서서히 형제들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것이 보입니다.
요셉은 은 이십에 팔렸습니다. 이 장면은 훗날 예수님이 은 삼십에 팔리시는 것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요셉의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와 겹쳐 보이는 지점입니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세상으로 나왔고, 자기 사람들에게 배신당했고, 종이 되셨습니다.
형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완전범죄로 만들기 위해 채색옷을 사용합니다. 31절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리고 아버지에게 가져가 물었습니다. 32절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여기서 성경은 중요한 단어 하나를 사용합니다. ‘숫염소’입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속일 때도 ‘염소 새끼’를 사용했습니다(27:9절). 어머니 리브가가 염소 요리를 만들었고, 야곱은 그 가죽을 몸에 붙이고 형 에서처럼 위장해서 아버지의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때도 염소였고, 지금도 염소입니다. 야곱이 염소로 아버지를 속였듯이, 이제 야곱의 아들들이 숫염소로 야곱을 속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우연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원칙이 이렇게 세대를 넘어 반복됩니다.
야곱은 옷을 알아보고 악한 짐승에게 공격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충격이 어떠했을까요? 34절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아들들이 위로해도 위로받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태연하게 아버지를 위로하는 형제들의 모습이 이 본문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도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36절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았더라” 요셉은 살아 있었습니다. 그것도 바로의 친위대장 집에 팔렸습니다. 그리고 이 집에서부터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꿈이 이루어집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형제들의 시기와 분노와 거래만 가득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혼란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습니다. 르우벤의 마음을 움직여 요셉의 죽음을 막으셨고, 상단이 지나가는 타이밍을 맞추셨고, 요셉을 국무총리로 가는 길의 첫 번째 집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끝난 것 같을 때, 하나님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십니다. 야곱도 몰랐고, 형들도 몰랐고, 요셉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셨고, 이루고 계셨습니다. 우리 삶에도 이런 순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하나님의 뜻은 멈추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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