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0:14-11:1절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26.06.16)

2026.06.16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14절)

8장부터 바울은 우상의 제물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우리에게는 자유가 있다”며 우상의 신전에까지 들어가 담대하게 그 음식을 먹었고, 그것이 믿음이 연약한 이들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9장에서 바울은 사도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한 자신을 예로 들었고, 10장에서는 광야의 이스라엘을 거울 삼아 우상숭배를 경고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상 제물에 대한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결론을 내립니다.

14절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바울의 권면이 강하고 거칠수록, 그 밑바닥에는 안타까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고 부릅니다. 여기서 ‘피하라’는 의미는 ‘도망치듯 달아나라’입니다. 음행을 피하듯 우상숭배도 피해 달아나야합니다. 15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늘 지혜를 자부하던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 지혜로 분별해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무작정 “하지 말라” 하지 않고, 왜 안 되는지를 논리적으로 풀어갑니다. 그 출발이 성찬입니다. 16절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성찬에서 잔을 마시고 떡을 떼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몸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참여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코이노니아’로, 단순한 동참을 넘어 깊은 사귐과 연합을 뜻합니다. 또한 17절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이 구절에 ‘하나’라는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곧 성찬에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참여한 성도들끼리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18절에서 바울은 구약의 제사를 예로 듭니다. 제물을 먹는 자들은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그 의식과 하나가 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냥 몸만 참여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참여하다’가 많이 반복됩니다(16,17,18,21). 그런데 바울은 ‘참여’를 뜻하는 두 개의 헬라어 단어를 의도적으로 함께 씁니다. 16, 18, 20절의 ‘참여’는 깊은 내적 연합을 뜻하는 ‘코이노니아’이고, 17절과 21절의 ‘참여’는 겉으로 함께하는 동참을 뜻하는 ‘메테코’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저 그 자리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메테코) 이미 깊은 연합인 ‘코이노니아’가 되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겉으로 동참하는 것조차 금합니다. 그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식탁과 하나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19절 “그런즉 내가 무엇을 말하느냐 우상의 제물은 무엇이며 우상은 무엇이냐” 바울은 앞서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그 제물을 먹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 꺼냅니다. 20절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우상 자체는 헛것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을 우상으로 향하게 하고 그 숭배를 조종하는 영적 실체가 있습니다. 그것이 귀신의 일입니다.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배후에서 일하는 어둠의 세력은 실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신전의 자리에 참여해 음식을 먹는 것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그 어둠을 주관하는 귀신과 하나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21절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상과 귀신의 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예수님과 하나 된 성도가 귀신의 자리와 하나 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보았듯 그 자리에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연합이 되기에,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을 겸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바울의 권면도,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은 채 자유를 내세워 마음대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하나님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24절)

23절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6장에도 나왔던 것처럼 “모든 것이 가하다”는 고린도 성도들의 구호였습니다. 바울은 이를 인정하면서도 두 가지 잣대를 댑니다. 이것이 유익한가, 그리고 이것이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가. 그리고 이어 본문의 핵심이 나옵니다. 24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신앙생활은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다고 다 말하고 다 행하는 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실제 상황에 적용해서 우상 제물 이야기를 정리합니다. 25-26절,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 고기가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라 해도, 우상은 아무것도 아니고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지 않는 사람이 초대해 음식을 차려주면 그것도 묻지 말고 먹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이것은 제물입니다”라고 알려주면 그때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그 말을 꺼낸 사람의 마음에 거리낌이 있기 때문입니다. 먹어도 죄가 되지는 않지만, 그 사람의 양심을 위해 절제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자기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입니다.

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이 말씀이 바로 이 긴 이갸기의 결론으로 나온 것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느냐 마느냐를 두고, 결국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32절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우리의 모습을 보고 다른 성도가 시험에 들고 흔들린다면 옳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를 보고 은혜받고 도전받아 더 신실하게 살고 싶어지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바울은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11:1절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섬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신 그분을 본받아, 바울도 그 길을 걸었습니다. “나를 본받으라”는 것은 곧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살라는 겁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우리가 어디에 참여하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인지, 아닌지를 잘 살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 이것이 지혜롭고 성숙한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 성도를 통해 교회 공동체가 하나로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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