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17-34절 / 자기를 살피라(26.06.18)

2026.06.18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22절)

11장 앞부분에서 예배의 질서를 다룬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성찬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며 그 십자가를 기념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성찬에서는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칭찬했습니다(2절). 그러나 오늘은 정반대입니다. 17절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22절 끝에서도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고 거듭 말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심각했을까요? 17절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성도들의 모임이 유익이 아니라 해로움이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모일 때마다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일어나 차라리 모이지 않는 편이 나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모임으로 이루어집니다. 예배도 소그룹도 함께 모여 이루어집니다. 그런 모임이 은혜와 기쁨, 격려와 위로가 되어야 하는데 도리어 상처와 갈등이 된다면 공동체가 흔들립니다. 우리 자신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속한 모임이 유익이 되고 있는가, 해로움이 되고 있는가. 나는 유익이 되는 모임을 이루고 있는가?”

18절에서 바울은 다시 분쟁을 언급합니다. 1장부터 다룬 분쟁이 성찬 자리에서도 드러난 것입니다. 20-21절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이 내용은 당시 상황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는 예배당 건물이 없어, 큰 집을 가진 부유한 성도의 집에 모였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시간이 여유로워 일찍 와서 주인과 친한 이들끼리 안쪽의 좋은 자리에 앉아, 다른 성도들이 오기도 전에 떡을 배불리 먹고 잔을 마음껏 마셨습니다. 심지어 취하는 사람까지 있었습니다. 성찬은 주님의 몸을 기념하는 자리인데, 취하도록 마신 것입니다.

반면 가난한 성도, 노예 신분의 성도는 늦게까지 일하다가 뒤늦게 도착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음식이 없어, 주님의 떡과 잔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22절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이것이 왜 그토록 심각한가요? 당시 교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세상에서 함께할 수 없던 주인과 노예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한 식탁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신분의 벽이 복음으로 깨진 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가진 자는 먼저 먹고 취하고, 없는 자는 소외되어 굶주린다면, 그것은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를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일”이라고 책망합니다.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교회를 가볍게 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성찬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을 때, 마음으로 차별하고 소외시킨다면 역시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를 일입니다. 오히려 약한 이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삶이 회복되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교회의 마땅한 방향입니다.

●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33절)

바울은 성찬이 무엇인지 다시 가르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찬을 시행하신 시점이 중요합니다. 23절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24-25절에서 떡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고,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입니다. 여기서 ‘새 언약’이라는 말이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통해, 죄로 깨어졌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십자가가 세로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했다면, 가로로는 성도들 사이의 깨어진 관계도 회복했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모든 성도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부릅니다. 예수님을 통해 모든 성도가 지체를 이루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과거에는 성찬식을 하면서 빵 한 덩어리를 함께 떼어 먹었는데, 이는 “우리가 한 몸”임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성찬을 나누면서 차별하고 분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27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28절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성찬식이 죄를 짓는 과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살피고 참여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자기를 살피라”는 말을 “내가 죄지은 것이 없는지 돌아보고 회개하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그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흐름을 따라가 보면, 바울이 말하는 ‘자기 살핌’은 내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성도를 소외시키거나 차별하지 않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임을 온전히 실현하며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가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29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여기서 ‘주의 몸’은 교회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하나 된 몸임을 분별하지 못하고 분쟁을 일으키며 참여하면, 자기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입니다.

30절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않으니라” 여기서 ‘잠자는 자’는 죽은 자를 가리킵니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 함부로 성찬에 참여한 결과로 약해지고 병들고 죽기까지 하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심판이 아니라 인정과 칭찬을 받아야 함을 일깨우는 경고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권면은 단순하고 분명합니다. 33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잠깐을 기다리지 못해 늦게 온 성도를 소외시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른 성도를 배려하고, 나의 권리와 자유를 조금 내려놓고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의 계속되는 문제의 밑바탕에는 자유와 권리의 남용이 있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바울은 자유와 권리가 있지만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내려놓고 절제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 모임이 유익이 되고 있는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모임 공동체입니다. 그 모임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성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도록 세워가는 것, 때로 힘들어도 소그룹에 참여해 함께 나누며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찬에 참여할 때 공동체의 하나 됨을 살피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살피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지체들을 소중히 여기며 하나 됨을 이루고 있는지,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않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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