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13절)
어제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 교회에 전했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회상하며, 부활이 수많은 증인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된 사실임을 강조했습니다. 오늘은 본격적으로 부활을 믿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지 설명합니다. 15장은 고린도전서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장이 마지막 인사임을 생각하면, 바울이 마지막에 부활을 다룬다는 것은 곧 부활 신앙이 성도에게 가장 핵심적이며 결코 놓쳐서는 안됩니다.
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바울이 그토록 분명히 전한 부활인데, 고린도 성도들 가운데 부활이 없다고 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이 복음을 전했고, 그것을 굳게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음을 굳게 붙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철학과 잘못된 신앙에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부활 자체를 전면 부정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헬라철학, 특히 이원론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영은 선하고 육체는 악하다는 사고입니다. 이런 생각은 오늘날에도 형태를 바꿔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서의 삶은 거룩하게 여기면서 세상에 나가면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고 여기는 것이 그 한 모습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이 이원론 때문에 육체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셔서, 육체로 죽으시고, 육체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영적으로만 오시고 영적으로만 부활하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예수님은 온전한 육체로 오시고 육체로 부활하셨다고 강조합니다.
바울은 ‘만일’이라는 가정을 거듭하며, 부활을 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13절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리라” 고린도 성도들의 기준대로 육체의 부활이 없다고 한다면, 육체로 부활하신 예수님조차 부활하지 못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자기 주장이 얼마나 큰 모순을 품고 있는지 보지 못한 채, 자기 기준으로 신앙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14절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예수님이 부활하지 못했다면, 십자가와 부활을 전한 복음도 헛되고, 그 복음 위에 세워진 믿음도 헛됩니다. 신앙의 기초가 통째로 흔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함부로 우리 생각이나 세상의 기준으로 신앙을 재단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부활 하나를 잘못 건드리면 모든 신앙의 기초가 헛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셋째, 15절 만일 부활이 없다면 바울과 사도들은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됩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했기 때문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하나님마저 공격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부활이 없다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지 못하신 것이 되고, 결국 하나님을 무능한 분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이렇게 복음 전체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능력까지 부정하는 일입니다.
●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19절)
17절에서 바울은 한 가지를 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여기서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기에 우리의 죄가 사해졌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시 강조하지만 십자가와 부활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면 십자가의 죄 사함도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됩니다. 죄가 인간에게 가져온 가장 심각한 결과가 죽음인데, 그 죽음을 이기고 정복한 것이 바로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죽음이 그대로 남아 있고, 우리는 여전히 죄와 사망 가운데 있는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죄 사함은 믿지만 부활은 못 믿겠다”는 신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성도들 역시 십자가의 은혜는 깊이 새기면서도 부활에 대해서는 “사람이 죽으면 정말 다시 살아날까”라고 의심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더구나 바울이 말하는 것은 몸의 부활, 곧 우리 몸이 새로운 몸이 되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봐야 안다, 혹은 그것이 뭐가 중요하냐”는 식으로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품고 사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18절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잠자는 자’는 예수를 믿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지금 부활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믿고 죽은 이들은 그것으로 끝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전 생애를 헌신했습니다. 당시 믿음을 지키다 순교한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없다면, 주님을 위해 생명을 건 그 모든 헌신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 땅에서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가장 헌신한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논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은 분명히 있고, 그래서 이 땅에서의 수고와 헌신은 결국 영광스러운 부활로 이어집니다. 죽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삶을 제대로 살듯, 부활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이 땅의 삶을 제대로 살아갑니다. 부활 신앙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입니다.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매 순간 십자가 앞에 나를 죽이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부활을 살아내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부활을 머리로만 아는지, 삶으로 살아가는지 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부활을 압니다. 그러나 핍박의 자리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위협 앞에 설 때, 부활 신앙이 없으면 믿음을 끝까지 고백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장담했지만 그 자리에서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부활을 믿기에 죽음이 우리를 어찌할 수 없음을 아는 것, 그것이 부활 신앙이 주는 은혜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이 확실하다면 이 땅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울이 고백했듯, 부활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을 주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헌신하고, 주님이 주실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활 신앙으로 부활의 삶의 열매를 맺어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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