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8:1-9절 /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26.07.08)

2026.07.8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3절)

시편을 살펴보니, 시인이 대적으로 인한 고난 속에서 낙심으로 기도를 시작했다가 소망과 찬양으로 바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달라졌을까요? 오늘 시편 8편을 읽다 보면, 시인이 기도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경험했기에 그런 확신과 믿음이 생겼는지 알게 됩니다. 이 시는 앞선 탄원시들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그냥 읽으면 단순한 찬양 같지만, 이 찬양의 배경이 3절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라고 합니다.

이런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대적에게 쫓겨 광야 한 곳에 홀로 머물던 다윗이, 밤중에 자기 문제를 안고 기도하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하늘이 펼쳐지고 달과 별이 반짝입니다. 그때 시인은 깨닫습니다. 저것들이 그냥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능력으로 창조하여 저 자리에 두신 것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하나님의 창조 권능이 온 세상 구석구석에 가득 퍼져 있는 것이며,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십니다.

그래서 시인의 입에서 터져 나온 첫마디가 “대적이 많습니다”가 아니라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입니다. 이 시에도 2절에 대적과 원수와 보복자가 나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초점은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맞춰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고, 그 영광이 땅을 넘어 하늘까지 가득하다고 고백합니다.

2절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와 왕 되심에 도전하는 대적들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시고 찬양을 받으십니다. 여기서 어린아이와 젖먹이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 곧 자기 연약함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왕이 되어 내 마음대로 살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도를 통해 원수와 보복자를 잠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두려움 없이 못 할 말, 못 할 행동을 하며 시끄럽게 활개를 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히 그분을 신뢰하는 자를 통해, 아무리 대적이 기승을 부려도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시인이 이렇게 찬양하게 된 계기가 3절에 있습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여기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밤하늘의 달과 별을 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것이 그냥 저절로 떠 있다고 여기며 ‘아름답다’ 하고 지나칩니다. 시인은 달랐습니다. 저 달과 별을 하나님이 손가락으로 만들어 그 자리에 두셨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다고 하는데, 시인은 굳이 ‘손가락으로 만드셨다’고 표현합니다. 세심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한 만들어 두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달과 별은 늘 그 자리에 고정된 것 같지만 실은 끊임없이 움직입니다. 그것들이 긴 세월 한 치의 오차 없이 운행되는 것을 생각할 때, 시인은 감동합니다. 달과 별에서 하나님의 창조 권능을 본 사람이라면, 지나가는 꽃 한 송이에서도 그 권능을 보게 됩니다. 왕 되신 하나님의 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5절)

이 광대한 창조 앞에서 시인의 시선이 자신,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4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의 광대함에 비추어 보니, 인간은 한없이 연약하고 초라한 존재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하는데, 그 ‘흙’의 원어에는 먼지, 티끌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먼지 같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5절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여기 ‘하나님보다’로 옮긴 원어가 ‘엘로힘’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으로도, ‘천사(하늘의 존재)’로도 옮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전 번역은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금 번역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번역이 타당합니다.

먼지 같은 인간을 하나님의 다음 자리, 곧 지극히 존귀한 자리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창세기가 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왕이신 하나님이, 사람을 그 다스림에 참여하는 존재, 곧 왕과 같은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6절이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하나님이 사람을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대리 통치자로 세우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특권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약의 히브리서는 이 시편을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합니다. 잠시 천사보다 낮아지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시고 만물을 다스리게 되신 분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첫 사람 아담이 죄로 잃어버린 그 다스림을, 둘째 아담이신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회복하십니다.

시인은 지금 대적에게 쫓겨 도망하는 처지입니다. 그런데 기도 가운데 이 진리를 깨닫습니다. 지금은 쫓기는 신세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영화롭고 존귀한 존재로, 다스리는 자로 지으셨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그 다스림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현실은 절망적이지만, 이런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미래는 하나님이 반드시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상황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기도를 통해 시인의 마음이 확신과 소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9절에서 시인은 1절의 고백을 그대로 반복하며 시를 맺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이 시가 같은 찬양으로 시작하고 마치는 것은, 시인의 시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고난이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는 길이 된다는 겁니다. 시인은 대적에게 쫓기는 가운데 창조의 하나님을 묵상하다가 그 하나님을 실제로 만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나, 그것이 마음 깊이 나를 위한 사건으로 와닿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그 하나님을 만날 때, 이론으로 알던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으로 다가옵니다.

다른 하나는 인간은 하나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지 같은 우리를 하나님이 왕과 같은 존귀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우리가 복된 삶을 사는 것은 내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로 그 능력의 하나님을 만나는 데서 옵니다. 오늘 하루도 자연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창조 권능을 발견하며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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