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1절)
어제 9편은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라는 찬양으로 시작했는데, 10편은 “어찌하여”라는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두 시는 원래 하나로 알파벳 시로 지어진 짝입니다. 9편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감사하는 노래라면, 10편은 그 공의가 보이지 않는 현실 앞에서 터져 나오는 탄식입니다. 감사와 탄식이 함께 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정직한 신앙입니다.
1절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시인은 지금 환난 가운데 있습니다. 대적도 많고 조롱하는 자도 많습니다. 그런데 더 힘들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런 때에 가까이 오셔서 위로하시고 은혜를 베푸셔야 할 하나님이, 오히려 멀리 서 계신 듯 느껴지는 것입니다. 문제만으로도 벅찬데 하나님마저 나를 외면하신 것 같은 절망입니다.
시편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가 있습니다. 시편은 “힘들어도 표현하지 말고 늘 감사하며 살아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감사할 때는 감사하지만, 힘들고 어려울 때는 그 마음을 그대로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다 아시고 들으시며 합당하게 응답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면서도 “하나님, 제 기도를 듣고 계십니까, 언제까지입니까” 하고 부르짖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 시인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1절의 탄식을 뱉은 뒤, 시인은 2-11절까지 길게 악인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합니다. 첫 특징이 2절에 나옵니다.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압박하오니” 악인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이 향하는 대상은 가련한 자, 가난한 자, 힘없는 자입니다. 8절 “그의 눈은 가련한 자를 엿보고”, 9절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 10절 “가련한 자들이 넘어지나이다” 교만한 자는 이처럼 연약한 자를 공격합니다.
여기에서 악인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이 없고 긍휼이 없습니다.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자기 이익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흔히 말하는 갑질도 결국 같은 뿌리입니다. 직장에서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매장 직원에게 함부로 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어떤 자세로 대하는가, 이것은 신앙의 근본과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고 말합니다. 교회 안의 성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악인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악인이 이렇게 거침없이 행동하는 이유를 4절에서 설명합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악인은 가진 것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이 갖기 위해 없는 자의 것을 착취합니다. 그런데 그 탐욕의 밑바닥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멸시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대놓고 “하나님은 없다”고 외치는 것은 아닙니다. 4절 마지막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이 아니라, 하나님을 부인하지는 않으면서도 자기 삶의 모든 결정과 행동에서 하나님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말하자면 실천으로 드러나는 무신론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지만, 삶의 방식이 “하나님은 나와 상관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12절)
5-11절은 그 악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의 길은 언제나 견고해 보이고 하나님의 심판은 그에게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6절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큰소리칩니다. 그의 입은 저주와 거짓과 포악으로 가득하고, 어둡고 은밀한 곳에 숨어 무죄한 자를 노립니다. 성도가 보기에 안타까운 것은, 저렇게 악을 행하는데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승승장구하는 듯 보입니다.
이런 악인들에 대한 결론이 11절입니다.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악인이 대담하게 악을 행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잊으셨고, 얼굴을 가리셨고, 영원히 보지 않으신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주목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절에서 시인은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라며 하나님이 얼굴을 보이시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악인도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셨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비슷한 두 고백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시인은 “어찌하여 숨으시나이까”라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고, 악인은 “하나님은 보지 않으신다”며 등을 돌리고 떠났습니다.
악인의 특징을 설명한 시인은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12절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일어나소서’와 ‘손을 드소서’는 전쟁에 나서시기를 구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일어나 악인과 싸우시고, 손을 드셔서 심판하시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4절은 악인의 말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4절에서 악인은 “여호와께서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 11절에서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보고 계시며,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시는 분이십니다.
이어지는 14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 악인의 압제 아래 있던 가련한 자들이 의지할 곳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미, 벌써부터 고아와 연약한 자를 도우시는 분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실 뿐, 하나님은 언제나 낮은 자의 편이셨던 것입니다.
16절이 이 시의 정점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악인들은 마치 자기가 왕인 양 하나님을 무시하며 활개를 칩니다. 그러나 참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일어나 손을 드시면, 천하가 자기 것인 양 살던 자들도 순식간에 그 앞에 엎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17-18절이 마지막 위로입니다. 악인의 특징이 교만이었다면, 하나님이 들으시는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연약하고 힘들지만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의 소원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압제당하는 자를 위해 반드시 일어나사 심판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알고 그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모든 것을 감찰하십니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어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어나시고 손을 드시는 분, 가난한 자를 잊지 않으시고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는 분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멀리 계신 듯 느껴져도, 주께서는 보고 계십니다. 이 소망을 품고 위축되지 말고 담대하게 하루를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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