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1절)
시편 14편은 우리에게 익숙한 구절로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여기 ‘어리석은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무신론자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사람일까요.
‘어리석은 자’는 원어로 ‘나발’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머리가 나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사람, 삶이 뒤틀린 사람을 가리킵니다. 삼상 25장에는 실제로 ‘나발’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나옵니다. 나발은 큰 부자였으나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그의 부모가 ‘어리석은 자’라는 이름을 지어 주지 않았을 겁니다. 본래 이름이 따로 있었을 텐데, 그의 삶이 어리석음의 표본이라 그렇게 불린 것으로 보입니다. 그의 아내 아비가일조차 그를 두고 “그의 이름과 같이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쫓겨 다니던 시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나발의 양 떼와 목자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이 양털을 깎는 잔칫날,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동안의 은혜를 언급하며 먹을 것을 청하자, 나발은 “다윗이 누구냐, 내가 왜 그에게 내 음식을 나눠 주느냐”며 매몰차게 거절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삶에서는 결코 자기 것을 나누지 않고 오직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아닌, 하나님이 계심에도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특별히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삽니다. 그런데 내 삶을 지켜보는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이 과연 저럴 수 있을까”라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어리석음입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가볍고 하찮은 분으로 여기면, 우리의 삶도 그만큼 가벼워집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그 삶이 어떻게 됩니까. 1절 뒤에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다윗의 안타까움은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는데 있습니다. 3절 끝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은 다윗과 이스라엘을 통해 세상과 다른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핵심이 선을 행함으로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아름다운 나라를 세워 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뜻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과 다르게 선을 행하는 백성의 공동체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1절과 2절은 분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1절에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데, 2절은 정반대를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살피사” 어리석은 자가 인정하든 않든,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셔서 이 땅을 굽어살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을 살피실까요. 2절 뒤에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하나님은 이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한 사람을 간절히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아보시니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3절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여기 ‘다’, ‘함께’, ‘하나도 없다’는 표현은, 그 시대 전체가 하나님 없는 자들의 모습을 닮아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 3절을 신약의 바울이 로마서 3장에서 인용하여, 모든 인간이 죄 아래 있고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인간의 근본 문제를 논증합니다. 그만큼 이 구절은 인간의 실상을 꿰뚫는 무거운 진단입니다.
●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6절)
4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삼키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떡 먹듯이’라는 표현이 놀랍습니다. 우리가 하루 세 끼를 자동으로 먹듯, 이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자동으로 악을 행합니다. 이처럼 삶의 방향이 잘못되면, 열심히 살수록 오히려 악을 쌓아 갈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열심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남을 짓밟으며 악을 쌓는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살던 이들도 결국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5절 “거기서 그들이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이 의인의 세대에 계심이로다” 이 마지막 구절을 새번역은 “하나님이 의인의 편이시니”로 번역합니다. 악인들에게 고통당하던 의인들 편에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고, 악인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 앞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이 벼락을 치시거나 불을 내리셔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삶과 말을 통해 생깁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말은 안 해도, 어느 순간 “하나님 믿는 사람은 진짜 다르구나” 하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했던 말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며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는구나”하는 두려움을 갖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삶이 곧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통로입니다.
6절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이 노리는 대상은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가난하고 억울한 자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사는 자들 때문에 무고하게 고난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고, 그 가운데서도 선을 행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렇게 기도하던 다윗이 7절에서 갑자기 시야를 활짝 넓힙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 이제 구원이 가난한 몇 사람에게가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에 임하기를 소망합니다. 여기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라는 표현 때문에, 이 시를 포로기 이후의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로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어디에 끌려가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억압과 고통에 얽매인 삶 자체가 포로된 삶입니다. 다윗의 시대에도 억압과 고통 속에 사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돌이키시고 회복시켜 그분의 백성으로 굳게 세우십니다. 그리고 그때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이 없는 듯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삶은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그것이 곧 어리석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을 귀히 여기며, 어두운 세상에서도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는 세상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 계셔서 이 땅을 굽어살피시고,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자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무고하게 고난당할 때,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이 이루실 구원을 소망하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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