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2절)
시편을 마치고 오늘부터 이사야서를 묵상합니다. 이사야는 선지서의 첫 책이자 66장으로 이루어진 긴 책인데, 그 구조가 특이합니다. 성경이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되어 있듯, 이사야도 1장부터 39장까지는 심판을, 40장부터 66장까지는 회복과 메시아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작은 성경’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실제로 구약임에도 오실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유독 많이 나옵니다.
선지서에는 선지자의 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할 백성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을 보며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이 무엇을 가장 안타까워하시는지가 담겨 있습니다.
1절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여기 유다는 남유다입니다. 본래 한 나라였던 이스라엘이 솔로몬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갈라졌는데, 이사야는 남유다에서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특히 히스기야 시대가 중요합니다. 그때 앗수르에 의해 북이스라엘이 멸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들은 왕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참고 참으시다 앗수르를 들어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남유다는 말씀대로 잘 살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남유다 역시 멸망의 문턱에 서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2절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식’이라 부르십니다. 그런데 그 사랑받은 자식이 아버지를 거역했습니다. 심지어 3절은 짐승도 주인을 아는데 자식이라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십니다. 자녀의 불순종 앞에 찢어지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4절부터 불순종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4절 중간입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할 자들이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고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묵상한 시편이 떠오릅니다. 다윗은 힘들고 어려울수록 하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오히려 그 임재 안으로 들어가기를 갈망했습니다. 그 다윗의 후손들이 정반대의 길을 간 것입니다.
이로 인해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성한 데가 없는 만신창이입니다. 7절을 보면 이것이 비유만은 아닙니다. 이미 강대국에게 짓밟혀 예루살렘 성만 겨우 남고 주변은 다 유린당한 상태였습니다. 9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하나님이 붙들지 않으셨다면 죄악으로 불타 없어진 그 성읍들처럼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소돔 고모라처럼 되지는 않은 걸 보니 그들보다는 낫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자기 상태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10절에서 부르십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너희가 바로 소돔이고 고모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늘 본문에 ‘들으라, 귀를 기울이라’가 거듭 반복됩니다(2절, 10절). 우리 삶에 문제가 생기면 우리는 “누구에게 맡겨야, 어떤 방법을 찾아야 이 문제가 풀릴까”를 찾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다르게 말합니다. 힘들수록, 복잡할수록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18절)
그렇다면 유다의 죄악은 무엇일까요? 11절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놀랍게도 이 백성은 예배를 안 드린 것이 아닙니다. 헌물을 안 바친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숫양의 번제와 기름을 넘치도록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에 배부르셨다 하시고, 12절에서 “누가 이것을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하십니다. 그 제물을 ‘헛된 제물’이라 하시고,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까지 견딜 수 없다 하십니다.
이유는 13절 하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밖으로는 제물을 넘치게 바치고 안식일과 절기를 성대하게 지키면서, 그 삶에는 악이 가득했습니다. 예배와 삶이 따로 놀았습니다. 그래서 15절이 무섭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눈을 가리시고 귀를 닫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하나님을 향해 기도로 펼친 그 손에 피가 묻어 있다는 것입니다. 연약한 자를 억압하고 짓밟은 손, 그 손을 들고 기도한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한다는 것은 교회를 부지런히 오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무너진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책망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16절에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여기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악을 ‘그치고’, 그다음 선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선행을 배워야 합니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익히고 훈련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선행의 내용이 구체적입니다. 정의를 구하고, 학대받는 자를 돕고, 고아를 위해 신원하며, 과부를 위해 변호하는 것입니다. 여기 ‘정의’는 원어로 ‘미쉬파트’인데, 힘없는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도록 바로잡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더 많은 제물이 아니라, 힘없는 자를 위해 그 손을 쓰는 것입니다. 피가 가득했던 그 손으로 이제 약한 자를 붙들라는 것입니다.
18절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변론하자’는 법정에서 쓰는 말입니다. 그런데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재판장이시고 이 백성은 명백한 유죄인데, 그 재판장이 먼저 ‘오라’고 부르십니다. 심판대에 세우려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주홍처럼 붉은 죄를 눈처럼 희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주홍과 진홍은 한번 물들면 결코 빠지지 않는 염색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죄를, 하나님이 친히 씻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압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 죄가 눈처럼 희어졌습니다.
19-20절이 결론입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순종하는 길과 거절하는 길입니다. 여기서 “즐겨 순종하면”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주홍 같은 죄가 눈처럼 희어지는 은혜를 입었다면, 그 은혜에 감사하여 합당하게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것이 즐겨 순종하는 삶이고, 그 손으로 다른 사람을 세우고 격려하며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삶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형식과 습관에 머문 신앙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남유다는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바쳤지만, 삶에는 악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이 견디지 못하신 것은 예배가 없어서가 아니라 예배와 삶이 따로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신앙생활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씻김받은 자로서 즐겨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대가 아니라 변론의 자리로 부르시고, 주홍 같은 죄를 눈처럼 희게 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입은 우리가 이제 할 일은, 악을 그치고 선을 배우며, 그 손으로 힘없는 자를 붙드는 것입니다. 즐겨 순종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아름다운 소산을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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