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1절)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심판은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를 전제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는 말이 “내가 사랑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조건없는 일방적인 사랑이었습니다. 1절 “내가 내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사랑과 기대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심판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노래는 한 사람이 포도원을 일구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1-2절 “심히 기름진 산에” 포도원이 있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주인이 포도원에 쏟은 정성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장소는 ‘심히 기름진 산’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달리 남유다는 기름진 땅이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을 파서 돌을 골라냈습니다. 그리고 아무 나무가 아니라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망대도 세우고 술틀도 만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 것입니다. 좋은 땅, 돌을 골라낸 수고, 최고의 품종, 지키는 망대, 수확의 준비까지. 그러니 당연한 기대가 있습니다. 극상품 포도가 맺히리라는 기대입니다.
그러나 맺힌 열매는 2절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들포도는 작고 시고 쓸모없는, 먹을 수 없는 열매입니다. 원어는 ‘베우심’으로 ‘악취나는 포도’라는 의미입니다. 최고의 조건에서 최고의 품종을 심었는데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은 이 포도원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5-6절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주인이 하시는 일은, 지금껏 베푸신 것을 하나하나 거두어 가시는 것입니다. 울타리를 걷으시니 짐승이 먹어 버리고, 담을 헐으시니 짓밟히며, 돌보던 손길을 거두시니 가시가 자랍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은혜로 이 포도원을 붙들고 계셨는지가 도리어 여기서 드러납니다. 특히 “구름에게 명하여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을 보면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셔서 포도가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7절에서 이 노래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포도원은 이스라엘이고,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건지시고 광야에서 먹이시고 좋은 땅에 정착시키시고 말씀을 주시며 정성껏 가꾸신 그 나무가 바로 자기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맺은 것이 들포도였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신 좋은 열매는 무엇이었을까요. 7절 “그가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가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이 바라신 것은 ‘정의’와 ‘공의’였습니다. 정의는 어그러진 것을 바로잡아 각 사람에게 마땅한 몫을 돌리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억울하지 않도록 바르게 해결하는 것입니다. 공의는 관계 안에서 신실하고 올바르게 사는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이 정의와 공의를 맺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강물처럼 흐르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런데 맺힌 들포도가 무엇이었습니까. 정의 대신 ‘포학’이요 공의 대신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이 대목은 히브리어로 읽어야 선명하게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바라신 정의는 ‘미쉬파트’인데 맺힌 것은 소리가 거의 같은 ‘미스파흐’, 곧 포학이었습니다. 바라신 공의는 ‘체다카’인데 맺힌 것은 역시 발음이 닮은 ‘체아카’, 곧 억눌린 자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소리는 비슷하나 뜻은 정반대인 단어를 나란히 놓아, 하나님이 기대하신 것과 정반대의 것이 나왔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정의처럼 보였으나 실은 포학이었고, 공의인 줄 알았으나 실은 약자의 눈물이었습니다.
●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16절)
그러면 이들은 어떻게 정의과 공의를 버렸을까요? 8절부터 하나님은 ‘화 있을진저’를 거듭 선언하시며 그 실상을 하나씩 짚으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 가운데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 번째 화가 8절입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집에 집을 잇고 밭에 밭을 더해, 남은 자리가 없을 때까지 땅을 사들여 홀로 차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그토록 심각한 죄일까요. 이스라엘에서 땅은 단순한 재산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각 지파와 가문에 나누어 주신 기업이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물려받아 지켜 온, 하나님이 정하신 몫이었습니다. 그런데 힘 있고 가진 자들이 그 이웃의 기업을 사들여 독차지한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축재가 아니라, 힘없는 자를 그 땅에서 몰아내고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 자체를 무너뜨리는 일이었습니다. 앞서 본 ‘포학’과 ‘부르짖음’이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심판이 9-10절입니다. 그토록 크고 아름다운 집을 그러모았지만 거기 살 사람이 없게 되고, 넓은 포도원과 밭에서 나오는 소출이 씨앗의 십분의 일 수준으로 쪼그라든다는 것입니다. 욕심으로 모은 모든 것이 도리어 텅 비고 헛되게 됩니다.
두 번째 화는 11절입니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아침부터 밤까지 술과 잔치에 빠져 사는 삶입니다. 12절을 보면 그 잔치에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가 넘칩니다. 겉으로는 즐겁고 화려한 삶입니다.
그런데 12절 하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이 없으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문제는 향락 자체보다, 그 향락에 빠져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도무지 관심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무엇을 행하시는지 보려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즐거움에만 눈이 팔려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1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사로잡힐 것이요” 여기 ‘지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고 향락에 빠져 살다가, 결국 그 무지함 때문에 포로로 사로잡혀 간다는 것입니다.
14-17절은 그 심판의 모습을 그립니다. 스올이 목구멍을 넓히고 입을 크게 벌려, 그 화려하던 무리와 떠들며 즐기던 자들이 그리로 삼켜집니다. 그리고 16절은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사랑했던 자기 백성이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자, 그들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정의와 공의를 세우십니다.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쏟으신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포도원 주인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듯,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모든 사랑을 쏟으셨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하셨습니다. 그 은혜를 기억한다면, 우리 삶에 맺히는 것이 좋은 포도인지 들포도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는 대단한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정의와 공의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는 것입니다. 두 번째 화를 받은 이들은 자기 향락에 빠져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지 않았고, 그 무지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즐거움 때문에 하나님을 잊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어떻게 일하시는지 관심을 두고, 그 하나님을 알아가며 그분 앞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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