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18절)
어제 본문에서 하나님은 좋은 포도가 아닌 들포도를 맺은 자기 백성에게 두 가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8,11절). 집에 집을 잇는 탐욕과, 향락에 빠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심 없는 삶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어서 네 가지의 화가 선포되고, 그 결과 심판이 어떻게 임하는지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이토록 길게 화를 선언하시는 것은, 그만큼 자기 백성이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18절이 세 번째 화입니다.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수레 줄로 죄악을 끈다’는 표현은 죄를 어쩌다 짓는 것이 아니라, 밧줄로 수레를 끌듯 죄를 자기 쪽으로 힘껏 끌어당기며 산다는 것입니다. 죄를 짐스러워하기는커녕 애써 끌고 다니는 것입니다. 정의와 공의로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 죄를 이끌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19절인데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그럼 어디 한번 속히 해 보시지. 그 계획을 어서 이루어 우리 눈으로 보게 해 보라” 하나님의 심판을 대놓고 조롱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반드시 심판하신다는 말을 믿지 않고, 도리어 빈정대며 비웃습니다. 이것은 앞서 시편에서 본 어리석은 자, 곧 하나님이 계심을 알면서도 없는 듯 사는 자의 뻔뻔한 모습입니다.
20절이 네 번째 화이자,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말씀입니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이것은 가치가 뒤집히고 기준이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악을 악이라 하고 선을 선이라 해야 하는데, 그것을 거꾸로 부릅니다. 사람이 죄를 짓는 것도 문제이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도리어 옳다고 말합니다. 같은 사안을 가지고도 자신의 유불리에 따라 선과 악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심각한 죄인 것은 죄를 죄로 아는 사람은 돌이킬 수 있지만, 이들은 잘못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으니 회개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성경이 분명히 악이라 하는 것을 세상은 점점 선이라 부릅니다. 어둠을 빛이라 하고, 빛을 도리어 어둡고 답답한 것이라 합니다. 그리고 그 뒤집힌 기준이 마치 시대의 상식인 것처럼 자리 잡아 갑니다. 이런 때일수록 성도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명히 기준을 세워야 합니다.
21절이 다섯 번째 화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앞서 악을 선이라 부르게 되는 뿌리가 여기 있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는 교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지 않고 자기 판단을 기준 삼으니, 하나님이 악이라 하신 것도 자기 눈에 좋으면 선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22-23절이 여섯 번째 화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기에 용감하며 독주를 잘 빚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뇌물로 말미암아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는도다” 술 마시는 데는 영웅호걸이면서, 뇌물을 받고는 판결을 뒤집는 자들입니다. 뇌물을 받고 악인을 옳다 하고, 의인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습니다. 힘없고 가난한 자가 마땅히 받아야 할 정의를 돈 때문에 짓밟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바라신 정의와 공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24절)
그렇다면 유다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24절은 이 모든 화의 원인을 말합니다. “그들이 만군의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멸시하였음이라” 문제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멸시한 것입니다. 그 결과 뿌리가 썩고 꽃이 티끌처럼 날립니다. 겉으로 아무리 무성해 보여도, 말씀을 버린 삶은 뿌리부터 썩어 결국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25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노를 발하시고 그들 위에 손을 들어 그들을 치신지라 … 그럴지라도 그의 노가 돌아서지 아니하였고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느니라.” 여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느니라”는 말씀이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손을 드셨는데, 그 손이 아직 거두어지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앞부분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데, 심판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렇다면 그 손이 돌이킬 기회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손을 드신 것은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백성이 돌이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심판이 어떻게 임합니까. 26절 “그가 기치를 세우시고 먼 나라들을 불러 땅 끝에서부터 자기에게로 오게 하실 것이라” 하나님이 먼 나라를 부르셔서 심판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여기서 ‘부르신다’는 말의 원어는 휘파람을 불어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목자가 휘파람 한 번으로 양 떼를 부르듯, 하나님이 휘파람 한 번 부시면 저 먼 나라의 군대가 순식간에 달려온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는, 강대국의 군대조차 휘파람 한 번에 움직이는 도구일 뿐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는 앗수르와 훗날의 바벨론을 가리킵니다.
27-30절은 그 군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설명합니다. 지친 자도 없고 넘어지는 자도 없으며, 조는 자도 자는 자도 없습니다. 화살은 날카롭고 활은 당겨져 있으며, 말굽은 부싯돌 같고 수레바퀴는 회오리바람 같습니다.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하게 준비된 군대입니다. 이 군대가 사자처럼 먹이를 움켜 가는데 건질 자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온 땅에 남는 것은 흑암과 고난, 빛조차 구름에 가려진 어둠입니다. 앞서 20절에서 이 백성은 흑암을 광명이라 부르며 어둠을 택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온 땅을 덮은 것은 빛 하나 없는 흑암이었습니다. 어둠을 빛이라 부른 자들이 마침내 진짜 어둠에 삼켜집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선과 악의 기준을 말씀에 두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점점 악을 선이라, 선을 악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세상이 뒤집어 부른다고 악이 선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이 빛이고 무엇이 어둠인지를 내 판단이나 시대의 상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흑암을 광명이라 부르는 어리석음에 휩쓸리지 않아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아직 펴져 있는 그 손 앞에서 돌이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의 손을 드셨지만 그 손은 여전히 펴져 있습니다. 이는 아직 돌이킬 기회가 남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휘파람 한 번으로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말씀을 버리고 멸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말씀을 붙들고 돌이키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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