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5절)
어제 본문에서 이사야는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심판받는지를 예언했습니다. 이것은 남유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수 있으니 겸손히 돌이키라는 의미입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죄는 하나님께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으로 듣지 않고 제 길을 간 것입니다(9:9절).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를 들어 북이스라엘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앗수르에 대한 심판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심판 도구가 된 앗수르가 마치 자기 힘으로 이룬 것처럼 교만해지자, 하나님이 앗수르마저 심판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5절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앗수르는 그 시대 최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앗수르를 ‘내 진노의 막대기’, ‘내 분노의 몽둥이’라 부르십니다. 앗수르가 강한 것은 스스로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의 도구로 쓰시려고 그렇게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않은 나라를 치게 하시고, 노하신 백성을 쳐서 탈취하고 노략하며 짓밟게 하십니다. 곧 앗수르가 북이스라엘을 친 것은 앗수르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앗수르는 자기가 정복하는 줄 알았지만, 실은 하나님 손에 들린 막대기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내용을 읽으면 “앗수르가 하나님께 멸망당하나 보다”하고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에 앗수르의 멸망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로 치면 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를 향해 “저 나라가 곧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눈에는 그렇게 크고 강한 것이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압도하고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까? 아무리 거대하고 견고해 보이는 나라도, 사람도, 문제도,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손가락 하나 튕기시면, 또한 하나님의 콧김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쓰러진다고 말합니다. 그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나를 압도하는 거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문제는 앗수르의 속마음입니다. 7절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하나님은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쓰셨는데, 정작 앗수르는 그 사실을 알지도 인정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더 많은 나라를 파괴하고 멸절하려는 정복욕만 가득했습니다.
8-11절에서 그 교만이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앗수르 왕은 자기 고관들이 다 왕과 같다고 뽐내며, 정복한 성읍들을 하나하나 늘어놓습니다. 그러고는 무서운 말을 합니다. 자기가 우상을 섬기는 여러 나라를 쳤는데 그 나라들의 우상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보다 더 대단했다며, 그렇다면 예루살렘과 그 우상에게도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앗수르의 근본 문제입니다. 앗수르는 여호와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섬기다 버린 여느 우상들과 똑같은 급으로 여겼습니다. 다른 나라 우상을 짓밟았듯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짓밟을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한낱 나무와 돌로 만든 우상과 동급으로 여기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교만의 절정입니다.
또한 앗수르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은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섬기는 하나님을 우상의 하나로 본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결국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신앙의 실패였습니다.
●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15절)
그래서 하나님은 앗수르 왕의 교만한 마음과 거만한 눈을 벌하시겠다고 하십니다. 13절에는 앗수르 왕의 자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내 손의 힘과 내 지혜로 이 일을 행하였나니 나는 총명한 자라 열국의 경계선을 걷어치웠고 그들의 재물을 약탈하였으며” 모든 것을 ‘내 힘, 내 지혜’로 이루었다는 것입니다. 14절에서는 자기가 새의 둥지에서 알을 줍듯 열국의 재물을 손쉽게 거두었고, 아무도 날개를 치거나 입을 벌려 저항하지 못했다고 뽐냅니다.
이 교만에 하나님이 던지시는 물음이 15절입니다. “도끼가 어찌 찍는 자에게 스스로 자랑하겠으며 톱이 어찌 켜는 자에게 스스로 큰 체하겠느냐 이는 막대기가 자기를 드는 자를 움직이려 하며 몽둥이가 나무 아닌 사람을 들려 함과 같음이로다” 도끼가 나무를 찍습니다. 그런데 그 도끼가 “이 나무는 내가 찍었다”라고 자랑한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입니까. 도끼는 사람 손에 들려 움직였을 뿐입니다. 톱도, 막대기도, 몽둥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구가 그것을 쓰는 사람에게 큰소리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앗수르가 바로 그 도끼였습니다. 하나님 손에 들려 쓰임받았을 뿐인데, 자기가 다 한 것처럼 자랑한 것입니다.
우리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이루었을 때,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해냈다”고 여기지는 않습니까? 교만한 자의 말의 특징은 ‘나’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도, 재능도, 시간도, 기회도, 심지어 오늘 하루 숨 쉬는 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더 중요한 것은 그 은혜로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교만한 앗수르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그토록 살지고 강성하던 앗수르가 여위어 쇠약해지고, 그 영화가 불에 타 버립니다. 17절이 인상적입니다. “이스라엘의 빛은 불이 되고 그의 거룩하신 이는 불꽃이 되실 것이니 하루 사이에 그의 가시와 찔레가 소멸되며”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빛이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교만한 앗수르에게는 태워 버리는 불이 됩니다. 같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는 따뜻한 빛이 되시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에게는 소멸하는 불꽃이 되시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울창한 삼림 같던 군대와 영화가 다 타 버려, 마치 병든 자가 쇠약해지듯 스러지고, 남은 나무가 어린아이라도 셀 수 있을 만큼 몇 그루 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처럼 앗수르는 북이스라엘 정복 이후 점점 쇠퇴해서 멸망하고 맙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가 도끼임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도 무언가를 이루면 그것을 내 공로로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 자로 살아가는 하루 됩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앗수르는 그 시대에 아무도 무너지리라 상상하지 못한 나라였지만, 하나님의 손안에서는 곧 소멸할 삼림에 불과했습니다. 지금 우리를 압도하고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고 의지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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