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9:16-20:6절 / 애굽을 고치시리라(26.08.07)

2026.08.7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21절)

어제 하나님은 애굽을 어떻게 심판하실지 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심판이 끝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치시는 것은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애굽을 하나님이 어떻게 회복하시는지, 그리고 이 이야기가 사실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가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날에’라는 말이 여섯 번 반복됩니다(16,18,19,21,23,24절). 이사야에서 ‘그날’은 때로 심판의 날이지만, 오늘은 회복의 날입니다. 16-17절이 그 회복의 첫 장면입니다. “그날에 애굽이 부녀와 같을 것이라” 강대국 애굽이 연약한 여인처럼 떤다는 것인데, 무엇을 보고 떨까요? “만군의 여호와께서 흔드시는 손이 그들 위에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애굽을 떨게 하는 것은 다른 나라의 군대가 아니라 그 위에 얹힌 하나님의 손입니다. 더 니아가 17절은 유다의 땅이 도리어 애굽에 두려움이 된다고 합니다. 국력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는 두 나라인데 그 관계가 뒤집히는 것은, 유다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계획”이라고 합니다.

18절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애굽 땅의 다섯 성읍이 가나안 방언, 곧 하나님 백성의 언어를 말하게 됩니다. 강대국의 언어를 약소국이 배우는 것이 상식인데, 도리어 애굽이 하나님 백성의 언어를 배운다는 것입니다. 우상의 중심지가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입니다.

19절 “그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제단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이고, 기둥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표시하는 표지입니다. 이 두 단어는 창세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아 하나님을 불렀고,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며 기둥을 세웠습니다. 곧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하나님을 인정하며 제단과 기둥을 세웠던 그 일이, 이제 애굽 땅에서 재현됩니다. 이사야는 창세기의 언어를 빌려, 이방 애굽이 아브라함과 야곱처럼 하나님을 예배하게 될 날을 그리고 있습니다.

20-21절은 또 다른 성경의 그림을 가져옵니다. 애굽이 압박하는 자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구원자를 보내 건지시고, 마침내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로 경배합니다. 이것은 사사기의 반복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 이방의 압제를 받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사사, 곧 구원자를 보내 건지시던 그 패턴이, 이제 애굽 땅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제단과 기둥이 창세기의 그림이라면, 구원자의 부르심은 사사기의 그림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애굽에서 되풀이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22절이 이 단락의 핵심입니다.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치심(마카)과 고침(라파)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기록됩니다. 하나님의 치심은 파괴가 목적이 아니라 고침이 목적입니다. 우리 향한 하나님의 손길도 동일합니다.

●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24절)

23-25절에서 하나님의 회복은 상상을 넘어섭니다.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놓이고, 서로 대적하던 두 나라가 그 길로 오가며 함께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창세기에서 인간의 첫 범죄 이후 가장 먼저 깨진 것이 관계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남편과 아내, 그리고 형제의 관계가 차례로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회복은 그 깨진 관계를 회복하여 원수 되었던 나라들을 한 예배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25절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이 선언은 파격적입니다. ‘내 백성’과 ‘내 기업’은 본래 이스라엘에게만 쓰이던 칭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노예 삼았던 애굽을 ‘내 백성’이라 부르시고,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잔인한 앗수르를 ‘내 손으로 지은 것’이라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한 민족의 울타리를 넘어 온 열방을 향한다는 것, 훗날 신약에서 이방인이 ‘내 백성’이라 불리는 그 복음이 여기 이미 씨앗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선포의 진정한 방향은 애굽이 아니라 유다를 향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수 된 애굽조차 치시고 고쳐 돌아오게 하시는 분이라면, 자기 백성을 치실 때의 마음은 얼마나 더 간절하겠습니까.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징계 역시, 무너뜨림이 아니라 돌이켜 고치시려는 사랑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20장에 오면 그 영광스러운 미래와 현실 사이의 간극이 드러납니다. 앗수르 사르곤 왕이 블레셋의 아스돗을 점령하던 때(주전 711년경), 앗수르의 세력이 한창 뻗어 가던 시절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이 아니라 몸으로 예언하게 하십니다. 이것을 행위 예언이라 합니다.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베옷과 신을 벗고 삼 년을 다니게 하시는데, 벗은 몸은 포로로 끌려가는 자의 모습입니다. 애굽과 구스가 앗수르에 사로잡혀 벗은 몸으로 끌려가 수치를 당하리라는 것입니다. 말로 해도 듣지 않는 백성에게, 이사야가 자기 몸으로 삼 년을 그 경고를 새겨 보인 것입니다.

5-6절이 그 경고의 초점을 드러냅니다.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던 자들이 그 몰락을 보고 “우리가 믿던 나라,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으니 우리가 어찌 피하리요” 하며 부끄러워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것을 바라고 의지한 자의 끝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열방 이야기가 결국 유다를 향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흔들리지 않는 인생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강대국 애굽이 흔들린다는 것은 세상의 부한 자도 강한 자도 다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연약해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배하는 인생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애굽이 마침내 흔들림을 멈추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되는 것처럼, 참된 견고함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치시고 고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방 애굽조차 치시고 고쳐 돌아오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백성을 향한 마음은 얼마나 더 간절하겠습니까.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면, 그것은 무너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더 온전하게 하시려는 사랑의 길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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