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3:1-18절 /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26.08.10)

2026.08.10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 “두로에 관한 경고라”(1절)

이사야 13장부터 오늘 본문까지, 하나님은 여러 나라를 향한 심판을 이어 오셨습니다. 그 첫 나라가 바벨론이었고, 오늘 두로가 그 열방 심판의 마지막입니다. 이런 구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벨론은 세상 나라의 대표로 최강의 군사력을 가진 나라, 곧 세상의 ‘힘’을 상징했습니다. 두로는 지중해 무역으로 부를 쌓은 나라, 곧 세상의 ‘풍요’를 대표합니다. 열방 심판이 힘으로 시작해 풍요로 끝납니다. 세상이 의지하는 두 가지, 힘과 풍요가 다 하나님의 손 아래 있음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1절 “두로에 관한 경고라 다시스의 배들아 너희는 슬피 부르짖을지어다” 다시스의 배는 먼 거리를 오가며 무역하던 큰 상선을 가리킵니다. 그 무역의 중심에 두로가 있었습니다. 두로는 바로 옆 시돈과 함께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로, 성경에 두 이름이 짝을 이루어 자주 등장합니다.

두로는 이스라엘과 가까운 관계였습니다. 다윗과 우호를 맺었던 두로 왕 히람은,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기술자와 백향목을 보내 도왔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성전 건축을 도왔던 그 두로가 이제 심판을 받습니다. 1절 중간 “두로가 황무하여 집이 없고 들어갈 곳도 없다” 풍요의 상징이던 도시가 순식간에 폐허가 됩니다. 그리고 그 소식이 깃딤, 곧 지중해 건너 먼 섬에까지 전해집니다. 그토록 견고하던 무역 도시의 몰락이 온 바다에 충격으로 퍼집니다.

두로가 어떻게 부를 쌓았는지 3절에 나타납니다. “시홀의 곡식 곧 나일의 추수를 큰 물로 수송하여 들였으니 열국의 시장이 되었도다” 시홀과 나일은 애굽의 강입니다. 애굽에서 나는 곡물을 배로 실어 날라 여러 나라에 되파는 중계무역으로, 두로는 ‘열국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곡식이 필요한 나라들이 다 두로를 거쳐야 했으니, 그 부가 어마어마했습니다.

그런데 그 풍요가 무너지자, 4절에서 두로는 자식을 낳지도 기르지도 못한 여인에 비유됩니다. 번성의 상징이던 도시가 생산이 끊긴 불모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5절, 이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애굽도 고통받습니다. 곡물을 실어 나르던 판로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의 몰락이 무역으로 얽힌 이웃 나라에까지 파장을 미치는 것입니다.

7절은 두로의 옛 영광를 회고합니다. “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무역으로 풍요와 향락을 누리며, 먼 곳까지 다니며 식민지를 세우던 그 도시가 이렇게 무너졌느냐는 탄식입니다. 모든 것을 가진,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던 도시가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렇다면 이 몰락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8절 “면류관을 씌우던 두로, 그 상인들은 고관이요 그 무역상들은 세상에 존귀한 자들이라 이에 대하여 누가 이 일을 정하였느냐” ‘면류관을 씌우던’이라는 표현이 두로의 위세를 보여줍니다. 두로는 여러 지역을 정복해 식민지로 삼고 거기에 왕을 세워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왕을 세우고 폐하는 권세를 부리던 나라입니다. 그 상인들은 한 나라의 고관에 견줄 만한 존귀한 자들이었습니다.

이토록 위세 등등하던 두로를 누가 무너뜨렸습니까. 9절이 답합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것을 정하신 것이라 모든 누리던 영화를 욕되게 하시며 세상의 모든 교만하던 자가 멸시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두로의 몰락은 우연이나 국제 정세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분명합니다. 하나님 없이 쌓은 영화를 욕되게 하시고, 스스로 주인 되어 교만하던 자를 낮추시려는 것입니다.

11절은 하나님의 열방 다스리심을 다시 선포합니다. “여호와께서 바다 위에 그의 손을 펴서 열방을 흔드시며” 사람의 눈에는 강대국이 세상을 이끌고 그 질서가 영원할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바다 위에까지 손을 펴서 열방을 흔드시는 분입니다. 아무리 견고해 보이는 무역 제국도, 하나님이 손을 펴시면 흔들립니다. 결국 무너집니다. 우리 의지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 “칠십 년이 찬 후에 여호와께서 두로를 돌보시리니”(17절)

12절은 학대받는 처녀 딸 시돈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깃딤으로 건너갈지라도 거기서도 네가 평안을 얻지 못하리라” 앞서 두로의 몰락 소식이 전해졌던 그 먼 섬 깃딤으로 피신해 가도, 거기서 평안을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평안은 안전해 보이는 장소에 머문다고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재앙이 없는 곳으로 몸을 옮긴다고 평안이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평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 있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참된 평안을 누리는 삶입니다. 그러니 좋은 장소 혹은 좋은 상황이 아닌 좋으신 하나님을 구하고 함께 합시다.

그런데 하나님은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십니다. 15절부터 ‘칠십 년’이라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두로가 칠십 년 동안 잊힌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다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칠십 년은 사람들이 두로를 완전히 잊을 만큼 긴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잊지 않으시고, 정하신 기한이 차자 두로를 다시 돌보십니다.

16-17절은 그 회복을 잊혔던 기생이 다시 노래를 불러 사람들의 기억에 오르는 것에 비유합니다. 이는 두로의 무역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그린 것입니다. 무역하는 도시가 이익만 좇아 어디든 오가는 모습, 기준 없이 값을 받는 기생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 놀라운 반전이 있습니다. “그 무역한 것과 이익을 거룩히 여호와께 돌리고 간직하거나 쌓아 두지 아니하리니 그 무역한 것이 여호와 앞에 사는 자가 배불리 먹을 양식, 잘 입을 옷감이 되리라.” 회복된 두로의 무역 소득이 예전처럼 쌓이고 간직되는 것이 아니라, 거룩히 여호와께 구별되어 그분 앞에서 섬기는 자들의 양식과 옷감이 됩니다. 세상의 풍요를 상징하던 두로의 부가,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을 먹이고 입히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 소득이 어떤 경로로 하나님께 바쳐지는지 본문이 자세히 밝히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세상의 풍요마저 결국 당신의 뜻과 백성을 위해 돌리시는 주권자시라는 사실입니다

이 마지막 모습은 두로를 향한 말씀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남유다를 향한 말씀입니다. 두로가 겪은 칠십 년의 고통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심판의 시간을 지나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회복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남유다의 미래를 보여줍니다. 남유다도 돌이키지 않으면 심판을 겪겠지만, 그 고통의 끝에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으로 세우실 것입니다. 두로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그 길을 미리 보여 주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의 힘과 풍요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열방 심판의 처음은 힘의 나라 바벨론이었고 마지막은 풍요의 나라 두로였습니다. 세상은 힘과 풍요를 따라 움직이고, 우리 마음도 그리로 쏠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힘과 풍요를 손 안에 쥐고 흔드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무너짐을 통해,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복된 삶의 길임을 보여 주십니다.

다른 하나는 심판으로 끝내지 않으시고 회복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두로조차 칠십 년 후에 돌보시고, 마침내 그 소득을 하나님께 돌리는 나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지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시키시고 온전케 하십니다. 그 하나님을 붙들고 흔들림 없이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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