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5:1-12절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시리라(26.08.13)

2026.08.13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1절)

어제 24장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해와 달이 부끄러워할 만큼 영광스러운 왕으로 통치하시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완전한 승리입니다. 오늘 25장은 그 승리를 바라보며 부르는 기쁨의 찬양입니다.

찬양은 1절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절망의 시간을 지날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외면하신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고 보면, 그때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1절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께서 기사를 옛적에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그런데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오래전에, 창세 전에 이미 정하신 뜻대로 이루십니다. 그것도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십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 같고 때로 실패 같아도, 여전히 하나님은 성실과 진실함으로 일하십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과정입니다.

찬양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견고한 성읍을 허무는 것’입니다. 2절, 하나님이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고 견고한 성을 황폐하게 하십니다. 12절도 “네 성벽의 높은 요새를 헐어 땅에 내리시리라”로 다시 반복됩니다. 하나님은 왜 잘 지어진 성을 자꾸 무너뜨리실까요. 사람들은 견고한 성읍과 높은 요새를 지으며 “이것이 나의 안전을 지켜 주리라” 여깁니다. 교만하고 하나님께 도전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안전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키십니다. 아무리 튼튼한 성이라도 하나님이 흔드시면 흔들릴 뿐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을 허무시는 것은, 안전을 엉뚱한 데 두는 그 착각을 깨뜨리시는 것입니다.

성읍이 무너지자 나타나는 반응이 있습니다. 3절에서 강한 민족과 포악한 나라들이 도리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화롭게 합니다. 자기 성이 자기를 지켜 주리라 믿었던 자들이, 그 성보다 강한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미리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았다면 은혜와 복을 받았을 텐데, 자기 힘으로 쌓은 것이 무너진 다음에야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구나”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4절입니다. 그렇게 견고한 성을 쌓고 약한 자를 학대하던 포학자들의 기세가 폭풍처럼 몰려올 때, 하나님이 누구의 편에 서시는가입니다. “주는 빈궁한 자의 요새이시며 환난 당한 가난한 자의 요새이시며 폭풍 중의 피난처시며 폭양을 피하는 그늘이 되셨사오니” 힘없이 당하던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이 친히 요새와 피난처와 그늘이 되어 주십니다. 사막의 뜨거운 폭양 같은 공격이 몰려와도, 하나님이 그늘이 되어 그 열기를 구름으로 가려 주십니다. 무너지는 것은 사람이 쌓은 견고한 성이고, 무너지지 않는 피난처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8절)

이 승리 위에서 하나님이 잔치를 베푸십니다. 6절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최고의 음식과 가장 잘 익은 포도주로 차린 풍성한 잔치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땅의 삶을 마치고 이를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미리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잔치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7절 보면 하나님이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와 열방 위에 덮인 덮개”를 제하십니다. 여기 ‘가리개’와 ‘덮개’는 서로 다른 둘이 아니라,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은 죽은 자를 애도하는 표시였습니다. 곧 이 가리개는 온 세상을 뒤덮은 죽음의 ‘수의’입니다.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고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라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죽음인데, 온 열방을 덮은 그 죽음의 천을 하나님이 벗겨 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8절이 그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아무리 견고한 성을 쌓고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자라도 결코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누구도 해결하지 못하는 그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하십니다. 죄로 말미암아 온 세상을 덮은 사망을, 하나님이 영원히 삼켜 버리시는 것입니다.

이 선언이 얼마나 놀라운지는 신약이 증언합니다. 바울은 부활을 말하며 이 구절을 그대로 가져와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전15:54절)고 외쳤고, 사도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며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계21:4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8절의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사망이 삼켜지니 그 사망의 그림자 아래서 흘리던 눈물이 씻기고, 믿음을 지키다 수치와 고난을 당한 백성이 부활의 영광으로 들려 올려집니다. 그리고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이 구원을 누리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9절에 두 번 반복되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기다리던 여호와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의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리라” ‘기다렸다’입니다. 이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은, 잠시 믿다가 어려움이 오면 돌아서는 이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말씀을 붙들며 인내한 사람들입니다. 일이 잘될 때 기다리기는 쉽지만, 힘들 때 기다리기는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기다림 끝에 하나님은 기쁨과 즐거움을 안겨 주십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기쁨의 노래 끝에 한 가지 경고를 말합니다. 10-12절 모압의 심판입니다. 왜 하필 여기서 모압일까요. 11절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그 손의 능숙함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모압을 하나님이 누르십니다. 모압은 제 손으로 이루는 일에 능하고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 능함이 교만을 낳았습니다. 잘하는 것으로 도리어 남을 무시하고 교만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교만을 헤엄치는 자를 물속에 누르듯 낮추십니다.

이 경고가 기쁨의 노래 끝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해 가며 구원의 승리를 바라보는 성도가 마지막까지 조심해야 할 것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기다린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기쁨이라면, 교만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낮아짐입니다. 교만을 내려놓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 그것이 기쁨의 잔치에 초대된 성도의 삶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정하신 뜻대로 성실하게 이루어 가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적에 정하신 뜻을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이루시는 분이고, 그 안에 우리 삶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들이 우연 같고 실패 같아도, 그것은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다른 하나는 사망을 삼키시고 눈물을 씻으시는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을, 하나님이 영원히 멸하시고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십니다. 이 시대에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리에게 예비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기대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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