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0:18-33절 /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26.08.21)

2026.08.21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18절)

어제 하나님은 애굽을 의지하는 유다에게 “화 있을진저”라 책망하시며, 애굽을 의지한 결과가 무너지는 담과 깨진 토기 같으리라 경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살 길을 일러 주셨습니다.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고, 잠잠히 신뢰해야 힘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유다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애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배은망덕한 자식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인데, 놀랍게도 반전이 일어납니다.

18절은 ‘그러나’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유다가 하나님을 저버렸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유다를 기다리십니다. 벌하려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려 기다리시고, 긍휼히 여기려 일어나십니다.

어제 하나님이 유다를 ‘패역한 자식’이라 부르셨습니다(1절). 자식이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제멋대로 불순종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아버지는 패역한 자식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시며 일어나 일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18절 하 “여호와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여기 ‘정의의 하나님’은 상황이나 문제에 따라 흔들리거나 변하는 분이 아니라,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십니다. 유다가 아무리 하나님을 저버려도, 하나님은 그 언약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그래서 18절은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로 맺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시니, 우리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 ‘은혜’가 18절과 19절에 반복됩니다. 18절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라 했고, 19절 뒤에서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라 합니다. 하나님은 철저히 자기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며, 그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시온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백성이 다시는 통곡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회복은 어떤 모습입니까요? 20절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회복이라 하면 고생 끝 행복 시작을 떠올리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앗수르의 위협과 포위 같은 고난이 여전히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고난이 없으면 진정한 돌이킴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 속에 은혜가 있습니다. 20절 중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보리라” 환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스승을 거두지 않으시고 백성과 함께하십니다. 스승은 가르치는 분입니다. 그래서 21절 “너희가 오른쪽으로 치우치든지 왼쪽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바른 길이니 너희는 이리로 가라 할 것이며” 스승이 함께하시며 “그 길이 아니다, 이 길이 바른 길이다” 하고 뒤에서 인도합니다. 생명의 길을 알지 못해 헤매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친히 스승 되어 그 길을 일러 주십니다. 지금까지 계속되는 유다의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가볍게 여기며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하나님은 말씀으로 함께 하시며 인도하십니다.

이 스승이 22절에서는 우상을 제거합니다. 은을 입힌 조각한 우상과 금을 올린 부어 만든 우상을, 백성이 이제 부정한 물건처럼 던지며 “나가라” 합니다. 유다가 그토록 우상을 섬긴 이유는 풍요를 위해서였습니다. 주변 나라가 다 우상을 섬기며 잘되는 듯 보이니, 우리도 그러면 잘되리라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을 버리면 도리어 풍요를 잃을까요. 정반대입니다. 우상이 풍요를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기 때문입니다.

●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26절)

그 풍요가 23-24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씨 뿌린 땅에 비를 주시니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며, 가축은 광활한 목장에서 먹습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까지 풍요를 누립니다. 이 모습은 에덴동산을 생각나게 합니다. 사람과 짐승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풍요와 안식을 누렸습니다. 이처럼 에덴은 죽음이 없고 완전한 풍요와 행복을 누리던 곳인데, 에덴을 잃은 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에덴의 풍요를 회복시키신다는 것은, 그 풍요의 뿌리인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신다는 뜻입니다. 곧 이 회복은 단순히 물질이 넉넉해지는 것이 아니라, 죄로 잃어버린 창조의 질서가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문제가 신약에서 해결되었습니다. 18절에서 기다리시고 일어나 일하시는 그 하나님이, 무한한 사랑으로 생명보다 소중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풍요를 다 누리지 못할지라도, 성도는 이미 죄 사함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회복, 곧 신령한 복을 누리는 존재입니다. 26절이 그 회복의 절정을 빛으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고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 달빛이 햇빛 같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이 임합니다. 완전한 회복은 다른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회복하시는 그 손으로 앗수르를 심판하십니다. 유다가 얼마나 앗수르를 두려워했으면 벌벌 떨며 애굽을 의지하려 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그 앗수르를 친히, 그것도 무섭게 심판하십니다. 이 심판의 그림을 통해 하나님은 유다에게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 한 이유가 여기 있다, 나만 의지하면 앗수르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7-28절이 그 심판을 하나님의 임재로 그립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먼 곳에서 오는데 그 진노가 불붙듯 하고 빽빽한 연기가 일어나며, 입술에는 분노가, 혀는 맹렬한 불 같습니다. 불과 연기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이 앗수르 가운데 임하셔서 순식간에 무너뜨리신다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심판받는 그 밤에, 유다는 29절에서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처럼 노래하고 피리를 불며 마음으로 즐거워합니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혔던 백성이,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하시니 기쁨으로 바뀝니다. 30절은 하나님이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치신다고 합니다. 자기 백성을 대적하는 자를 향해 이토록 무섭게 싸우시는 것은, 그만큼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 승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그 심판의 절정이 33절입니다. “대저 도벳은 이미 세워졌고.” 도벳은 시체를 태우는 곳입니다. 전쟁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태우는 그곳이, 이미 앗수르를 위해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앗수르의 완전한 패배가 곧 유다의 구원과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기다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도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18절은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시작해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고 합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이 오면 하나님보다 먼저 다른 것을 의지해 달려가곤 합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방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머물러 기다릴 때,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기다리시는 아버지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회복을 이루십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기다리시고, 일어나 일하시며, 그 백성을 공격하는 앗수르를 친히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일상을 살다 보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지, 내 기도를 들으시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위해 일하시며, 그 때가 되면 대적을 물리치고 반드시 승리를 주십니다. 이 사실을 붙들고 기다리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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