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가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 길에 서매”(2절)
이사야를 읽다 보면 심판과 회복의 이야기가 반복되어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36장부터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 일어난 앗수르의 침략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이사야가 여러 역사 가운데 이 사건을 택해 자세히 기록한 것은, 이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절 “히스기야 왕 십사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올라와서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쳐서 취하니라.” 남유다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앗수르가 마침내 쳐들어온 것입니다. ‘모든 견고한 성읍을 취했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제외한 유다의 나머지 지역이 이미 앗수르의 손에 넘어갔다는 뜻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하나만 남은 절체절명의 위기입니다.
산헤립은 예루살렘을 굴복시키려 랍사게라는 장군을 보냅니다. 그가 라기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와 2절 “윗못 수도 곁 세탁자의 밭 큰길에” 섰습니다. 그런데 이 장소가 이사야서에 이미 나왔던 장소입니다. 오래전 이사야가 아하스 왕을 만났던 곳입니다(7:3). 이사야는 여기서 아하스에게 앗수르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라 권면했습니다. 그러면서 7:9절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만 굳게 설 수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아하스는 끝내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를 의지했습니다. 그런데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 같은 장소에서 이번에는 앗수르의 위협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같은 자리, 같은 위협 앞에서 아버지 아하스는 불신앙으로 무너졌는데, 과연 아들 히스기야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이것이 핵심입니다.
오늘 본문의 대부분은 랍사게의 말입니다. 그의 조롱의 중심에는 ‘믿음’과 ‘신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연 누구를 믿고 신뢰할 것인가? 4절 “네가 믿는 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5절 “네가 누구를 믿고 나를 반역하느냐.”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무엇을 붙들고 버티는지를 정확히 알고, 그 신뢰의 대상을 공격합니다.
먼저 애굽입니다. 6절 “보라 네가 애굽을 믿는도다 그것은 상한 갈대 지팡이와 같은 것이라 사람이 그것을 의지하면 손이 찔리리니” 부러진 갈대를 지팡이 삼아 짚으면 도리어 손을 찌르듯, 애굽을 의지하면 해만 입는다는 것입니다. 앞서 30-31장에서 하나님이 유다에게 하셨던 경고를, 아이러니하게도 적인 랍사게가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하나님입니다. 7절에서 랍사게는 히스기야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마저 조롱합니다. 히스기야가 그의 산당과 제단을 제하여 버리고 예루살렘 제단 앞에서만 예배하라 했는데, 그 하나님을 어찌 믿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랍사게의 무지가 드러납니다. 히스기야가 산당을 없앤 것은 종교개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정해진 방식으로 예배받기를 명하셨는데, 유다 백성은 여기저기 산당을 두고 하나님도 섬기고 우상도 섬기며 신앙을 병들게 했습니다. 히스기야는 그것을 헐어 예배를 바로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 숭배의 눈으로 보는 랍사게에게는, 여러 곳에서 제사하던 것을 한 곳으로 줄인 히스기야가 신을 노엽게 한 어리석은 왕으로 보인 것입니다. 여기에 참 신앙과 우상 숭배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우상 숭배는 아무 데서나 정성만 바치면 된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이 정하신 자리에서 정하신 방식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랍사게의 조롱은 더 노골적으로 이어집니다. 8절에서 그는 “내가 네게 말 이천 필을 주어도 너는 그 탈 자를 능히 내지 못하리라”고 비웃습니다. 싸울 사람조차 없는 유다의 처지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10절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이 땅을 멸하러 올라온 것이 여호와의 뜻 없이 된 줄 아느냐, 여호와께서 나더러 치라 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까지 끌어다, 이 침공마저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합니다. 거대한 문제 앞에서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21절)
이런 상황에서 유다의 신하들이 요청합니다. 11절, 아람 방언으로 말하고, 성벽 위 백성이 듣는 데서 유다 방언으로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백성이 이 조롱을 다 들으면 사기가 무너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랍사게는 바로 그것을 노렸습니다. 그는 도리어 더 크게 유다 방언으로 외치며, 항복하지 않으면 성이 포위되어 백성이 제 배설물을 먹고 마시게 되리라 위협합니다. 이 심리전의 표적은 처음부터 왕이 아니라 백성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복해서 “히스기야를 믿지 말라”고 합니다. 14절 “히스기야에게 미혹되지 말라”, 15절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신뢰하게 하려는 말을 따르지 말라”, 18절 “여호와께서 건지시리라 해도 속지 말라” 왕과 백성 사이를, 그리고 백성과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대신 16-17절에서는 항복하면 각자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평안히 살게 해 주겠다고 합니다. 행복한 일상을 살게 해준다는 겁니다. 마지막에는 열방의 신들을 열거하며 “어느 신이 앗수르 손에서 자기 나라를 건졌느냐, 하물며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건지겠느냐”(18-20절)고, 하나님을 이방의 무력한 신들과 나란히 놓고 모독합니다.
이 정도면 유다는 무너져 항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21절이 뜻밖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잠잠하여 한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왕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대답하지 말라 하였음이라.” 히스기야가 백성에게 아무 대꾸도 하지 말라 명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잠잠함’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히스기야의 이 명령은 30:15절에서 이어진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원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으리라”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이 모든 것을 듣고 계시며 반드시 앗수르 문제를 해결하시리라 믿고,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한 것입니다. 조롱에 말로 맞서는 대신, 인간적인 방법을 찾는 대신에 하나님께 이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같은 장소에서 아하스는 위협 앞에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를 택했지만, 히스기야는 더 극심한 위협 앞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잠잠히 신뢰했습니다. 같은 문제를 만나도 어떤 이는 사람과 환경을 의지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사야는 이 두 왕의 대조를 통해, 참된 신뢰가 무엇인지를 보여 줍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세상의 소리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랍사게는 유다가 신뢰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을 믿지 말라, 그가 너를 건지겠느냐”고 외쳤습니다. 오늘도 “하나님 믿어 봐야 소용없다, 세상의 방식대로 살라”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립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도 그런 의심과 회의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아무리 크고 그럴듯해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흔들려는 조롱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사면초가의 위기에서 말로 맞서지 않고, 잠잠히 하나님께 그 일을 맡겼습니다. 우리는 작은 문제 하나에도 불안과 두려움에 흔들리곤 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며 신뢰할 때, 하나님이 반드시 일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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