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2절)
어제 36장에서 앗수르의 장군 랍사게는 예루살렘 성벽에서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조롱했습니다. 그 말을 온 백성이 들었습니다. 왕은 이방 장군 앞에서 모욕을 당하면서도 그를 어찌할 힘이 없었습니다. 이 절망적인 위기 앞에서 히스기야가 어떤 태도를 취할까요? 우리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설 때가 있는데, 히스기야의 모습에서 길을 찾아봅시다.
1절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는 것은 애통과 슬픔의 표시이자 회개와 겸비의 표시입니다. 그런데 그 애통 가운데 히스기야가 가장 먼저 향한 곳이 ‘여호와의 전’입니다. 이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는 표현이 14절에서 다시 반복됩니다. 두 번 모두 그는 사람을 찾아가지 않았고, 군사력이 강한 다른 나라에 도움을 구하러 가지 않았습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문제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누구를 찾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신앙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가장 먼저 누구를 찾습니까?
어제 본문에서도 설명했듯, 36장의 위기는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가 겪은 7장의 위기와 대조를 이룹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이사야 선지자를 그에게 직접 보내셨음에도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는 반대입니다. 그는 왕궁 맡은 자와 서기관과 제사장의 어른들에게 굵은 베 옷을 입혀 선지자 이사야에게 먼저 보냅니다. 선지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왕이 먼저 하나님의 사람에게 나아가 함께 기도하기를 구한 것입니다. 같은 위협 앞에서 아버지 아하스는 하나님을 외면했고, 아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붙들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정직하게 직시합니다. 3절,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새 생명이 태어나야 할 순간에 해산할 힘이 없어 산모와 아이가 함께 위기에 빠진 것, 그것이 지금 유다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4절에서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2번이나 부릅니다. 이는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말이 아닙니다. 이사야가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 말씀을 직접 받아 전하는 선지자의 직무를 담당하는 자임을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히스기야가 가장 마음 아파한 것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입니다. 히스기야의 기도는 단지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가 아니었습니다. 대적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함부로 조롱하고 모욕했다는 사실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을 자신들이 멸망시킨 이방 나라의 신들과 똑같이 취급했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은 그런 신들과 전혀 다른 살아 계신 분이시니, 그들의 모욕에 능력으로 역사해 달라는 것입니다.
사신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자, 하나님은 곧바로 응답하십니다. 6절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그 조롱을 다 듣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7절 “보라 내가 그의 마음을 움직여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고 또 그의 고국에서 그를 칼에 죽게 하리라” 기세등등한 산헤립이 소문 하나를 듣고 물러가며, 결국 자기 땅에서 칼에 맞아 죽으리라는 것입니다. 강대국을 이룬 최고의 왕이지만 정작 자기 앞날 한 치 앞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생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시고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16절)
이렇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면, 상황이 나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현실은 더 심각해집니다. 8절부터 보면, 산헤립은 물러가기는커녕 다시 사신을 보내 더 강하게 위협합니다. 10절 “너희는 유다의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네가 신뢰하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이번에는 말에 그치지 않고 편지까지 써서 왕을 직접 협박합니다. 기도하기 전보다 상황이 더 나빠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면 일이 곧 풀리리라 기대하는데, 도리어 상황이 더 복잡하고 심각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내 기도를 안 들으시나, 나를 버리셨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결코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응답하셨어도, 그 응답이 이루어지기까지 시련이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4절, 이 위협 앞에서 히스기야는 다시 그 편지를 들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펴 놓고 기도합니다. 이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히스기야가 어떤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했는가입니다. 16절입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이 한 절에 히스기야가 붙든 하나님이 세 부분으로 담겨 있습니다. 첫째, ‘그룹 사이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성전 언약궤 위에 그룹이 날개를 펴고 있는데, 그 사이에 하나님이 임재하십니다. 상황을 보면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 그때에도,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여전히 자기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며 함께하신다고 고백합니다. 둘째,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입니다. 앗수르는 열방의 신들을 다 멸했으니 하나님도 마찬가지라 했지만,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그 어떤 신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신 분임을 확신했습니다. 다른 신들은 사람이 손으로 만든 우상일 뿐이지만, 하나님은 홀로 살아 존재하시는 분입니다. 셋째,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분이라면 저 앗수르의 대적들조차 그분의 손안에 있으니, 이 문제를 해결하시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에 기도의 핵심이 있습니다. 많이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분명히 알고 신뢰하며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임재하시고 유일하시며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신뢰하며 부르짖는 것입니다.
히스기야 기도의 절정은 20절입니다. 그의 기도는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 홀로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구원을 구하되, 그 구원의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에 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조롱하던 저들의 눈앞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의 유일하신 살아 계신 분이심을 이 일을 통해 드러내 달라는 것입니다. 곧 히스기야는 자기 문제의 해결을 넘어, 이 과정을 통해 하나님이 높임과 영광을 받으시고 온 세상이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기를 구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문제를 만날 때 가장 먼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수치와 절망의 위기에서 사람이나 강대국이 아니라 여호와의 전으로 나아갔습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위협이 거듭될 때마다 다시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펴 놓았습니다. 우리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다른 데로 가기 전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 뒤에 상황이 더 어려워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확신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그룹 사이에 임재하시고,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분이며,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붙들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목적을 자기 문제의 해결을 넘어 하나님의 영광에 두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위대하신 분인지를 확신하고, 그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만이 높임 받으시기를 구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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