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2절)
오늘 39장은 이사야 전반부의 마지막입니다. 이사야는 크게 두 부분, 1-39장까지와 40-66장까지로 나뉩니다. 오늘은 전반부의 마지막 장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내용이 이어집니다. 36-38장에서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위협을 이기고, 죽을 병에서 생명을 15년 연장받았습니다. 이대로라면 좋은 결말이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전반부의 마지막 39장은 정반대의 실패 이야기로 끝을 맺습니다. 왜 하필 이 실패의 이야기로 전반부가 닫히는지, 저자의 의도는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절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은 것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당시 최강대국은 여전히 앗수르였고, 바벨론은 아직 힘을 키워 가던 신흥 세력이었습니다. 그 바벨론 왕이 히스기야의 쾌유를 축하한다며 글과 예물을 보내왔습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오가는 예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이 선물은 단순한 축하가 아니라, 함께 손잡고 강대국 앗수르에 맞서자는 정치적 제안이 담긴 것입니다. 이전의 히스기야였다면 다른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의 반응이 문제입니다. 2절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 모든 것을 다 보여 주었으니” 병에서 나은 자기를 축하해 주니 기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아가 보물 창고를 다 열어 보여주고, 심지어 무기고까지 전부 보여 주었습니다. 작은 나라 유다가 이 모든 것을 열어 보인 이유는, 자기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약소국이지만 아직 너희와 손잡을 만한 쓸모가 있다”는 것을 과시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국 유다는 히스기야가 무기고까지 열어 보인 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점은, 히스기야가 무너진 시점입니다. 그는 앗수르가 쳐들어와 그토록 조롱하고 위협했을 때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 위기에서 성전으로 나아가 기도하며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죽을 병에 걸렸을 때에도 벽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하여 생명을 연장받았습니다. 엄청난 위기 속에서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무너진 때는, 누군가가 자기를 인정해 주고 자랑거리가 생겼을 때였습니다. 평안할 때였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위기가 아니라 형통과 인정 앞에서 무너지는 존재입니다. 연약합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아셨고, 이사야 선지자를 히스기야에게 보내십니다. 3절 이사야가 두 가지를 묻습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그런데 히스기야는 어디서 왔는지만 대답합니다.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그리고 첫 번째 질문인 ‘무슨 말을 하였느냐’는 답하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두 나라가 은밀히 나눈 것은 “손잡고 앗수르에 맞서자”는 정치적 밀약이었고, 그 대가로 예물이 오간 것입니다. 이어 4절에서 이사야가 “그들이 왕궁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묻자, 히스기야는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답합니다.
●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6절)
이제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5-6절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히스기야가 자랑삼아 보여 준 그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벨론으로 옮겨진다’는 것은 전시하러 간다는 말이 아니라, 나라가 멸망하여 백성은 포로로 끌려가고 재물은 약탈당한다는 뜻입니다.
7절은 더 충격입니다. “또 네게서 태어날 자손 중에서 몇이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히스기야에게서 날 자손은 왕이 될 왕족들입니다. 그 왕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환관이 된다는 것은, 다윗 왕조의 왕위가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앗수르에서 구원받고 생명까지 연장받은 히스기야가, 그 은혜를 자랑하는 대신 자기 영광을 드러내다가 이런 심판에 이른 것입니다. 그가 바벨론 사절 앞에서 자랑했어야 할 것은 자기 보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민족의 위기에서 나를 구원하시고 내 생명을 연장하셨다”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더 당황하게 하는 구절은 8절입니다. 이런 심판을 들었다면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처럼 다시 하나님께 엎드려 회개하며 기도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의 반응은 뜻밖입니다. “당신이 이른 바 여호와의 말씀이 좋으니이다 하고 또 이르되 내 생전에는 평안과 견고함이 있으리로다 하니라.”
자기의 잘못으로 미래 세대와 후손에게 이토록 심각한 재앙이 예고되었는데, 히스기야는 “그것은 내 생전의 일이 아니니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조금 심하게 말하면, 후손이 겪을 일이니 나는 상관없다는 태도입니다. 한때는 그토록 경건했던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한때 경건하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교만하고 자기중심적이 되어 다른 이의 아픔이나 미래 세대는 안중에 없이 “나만 평안하면 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히스기야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사야 전반부가 이 실패의 이야기로 끝날까요? 39장 앞까지만 보면 히스기야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고, 하나님을 등졌던 아버지 아하스와 완전히 대조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39장에 이르러 보니, 그 히스기야마저 무너집니다. 결국 인간은, 아무리 믿음의 사람이라도,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사야 후반부가 시작됩니다. 40장부터는 인간 왕이 아니라 참된 통치자, 곧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람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히스기야의 실패가 전반부의 마지막에 놓인 것은, 가장 훌륭한 인간 왕조차 실패하기에 우리에게 참된 왕이 필요함을 드러내어, 40장의 메시아를 향해 길을 여는 것입니다. 사람은 흔들리고 변하지만 하나님은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으시며,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아는, 무너지는 인간 왕과 달리 영원히 견고하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잘될 때, 인정받을 때 더욱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무너진 자리는 위기가 아니라 형통과 자랑의 자리였습니다. 우리가 흔들리는 때도 종종 힘들 때가 아니라, 잘되고 누군가 인정하고 칭찬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사람의 인정에 초점을 맞추면 우리도 흔들릴 수 있습니다. 누가 인정하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하며, 형통할 때일수록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나를 넘어 공동체와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사람과의 관계를 하나님보다 앞세웠고, 자기 생전의 평안만 생각하며 후손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사람과의 연결은 소중하지만, 사람이 하나님보다 앞선 의지의 대상이 되면 위험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세우고, 나만이 아니라 공동체와 미래 세대까지 생각하며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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