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으로 올라와”(1절)
사사기 1장 내내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온전히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남쪽 유다부터 북쪽 지파들까지, 하나님이 이미 넘겨주신 땅을 다 차지하지 못하고 도리어 가나안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신앙의 위기로 접어든 백성에게, 오늘 하나님은 징계 대신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십니다.
1절은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말했다고 합니다. 길갈은 여호수아서에서 대단히 중요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 진을 친 곳이자 정복의 전진 기지였고, 무엇보다 거기서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켜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한 자리였습니다. 할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유월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새기는 예식입니다. 곧 길갈은 언약이 갱신된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실제로 여호수아서는 길갈이라는 이름을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뜻으로 풀이합니다. 사백 년 노예살이의 수치가 그곳에서 굴러 떠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가 그 길갈을 떠나 이른 곳이 ‘보김’입니다. 보김은 ‘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수치가 굴러간 은혜의 자리에서 통곡의 자리로 온 것입니다. 이 지명의 이동 자체가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를 보여줍니다. 언약을 새롭게 한 길갈의 은혜를 잊고, 이제 눈물의 자리 보김에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물의 원인은 하나님이 힘들게 하셔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해 보면, 1장의 실패를 생각할 때 곧바로 책망이 나올 법합니다. 그런데 사자가 먼저 꺼낸 것은 책망이 아니라 은혜의 회고입니다. 1절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여 내가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며” 한 줄로 요약되어 있지만, 애굽에서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 그리고 광야 사십 년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스스로는 결코 이룰 수 없던 일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따라 신실하게 이루신 것입니다.
이어 사자는 하나님과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한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과 언약을 맺어 ‘너희는 내 백성,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온 열방 가운데 오직 이스라엘과만 맺으신 이 언약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그리고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2절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 그들의 제단들을 헐라”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니 다른 신과 손잡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억압이 아니라 보호였습니다. 가나안의 제단을 헐지 않으면 반드시 그 영향을 받아, 그들이 멸망한 것처럼 이스라엘도 멸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2절 중 “너희가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입이 닳도록 경고하신 그 말씀을, 이스라엘이 흘려들은 것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보다 가나안 사람들이 누리는 부귀와 영화를 얻고 싶은 욕망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호와의 사자는 탄식합니다. 2절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그 결과가 3절입니다.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되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지금까지는 “내가 넘겨주었으니 나아가라” 하셨는데, 이제는 “쫓아내지 않겠다” 하십니다. 어제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노예로 부리며 ‘함께 사는 것이 유익’이라 여겼는데, 하나님은 바로 그것이 가시가 되고 올무가 되리라 하십니다. 세상과 손잡는 것이 편하고 풍요로워 보여도, 그 편함이 끝내 우리를 옭아매는 덫이 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이 말을 마치자, 4절에서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 뒤 그곳을 보김이라 이름하고 제사를 드립니다(5절). 겉으로는 뉘우침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눈물을 하나님 앞에서 회개의 눈물이었을까요? 참된 회개였다면 삶이 변했어야 하는데, 이어지는 사사기 내용은 갈수록 더 깊은 타락으로 빠집니다. 이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제 쫓아내지 않겠다, 가시와 올무가 되리라” 하시니, 백성은 다가올 미래가 두렵고 답답했습니다. 자기 죄가 아파서가 아니라, 그 죄의 결과가 무서워서 운 것입니다. 회개는 죄의 결과를 두려워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죄 자체를 아파하며 돌이켜 삶이 바뀌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아파하는 눈물,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변화된 삶입니다.
●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10절)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왜 이 악순환에서 헤어나지 못할까요. 6-10절이 그 신학적 뿌리를 밝힙니다. 여호수아가 살아 있는 동안과, 그가 행하신 하나님의 큰 일을 직접 본 장로들이 살아 있는 동안, 백성은 여호와를 섬겼습니다(7절). 이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인도하시고 구원하셨는지를 두 눈으로 본 세대라, 하나님을 경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대가 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10절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여기서 두 번 반복되는 단어가 ‘알지 못한다’입니다. 성경에서 ‘안다(야다)’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만나 경험하여 아는 것을 뜻합니다. 새 세대가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분의 권위를 인정하는 산 경험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알지 못하니, 그분이 원하시는 것도 모르고 세상을 닮아 함부로 살았습니다. 사사기의 끝없는 악순환이 바로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슬픈 것은 이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살고 있습니다. 노예살이하던 백성에게 이보다 큰 복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좋은 땅에서 그들이 겪는 것은 징계와 침략의 반복, 곧 평안(샬롬)이 없는 삶입니다. 어떤 이는 사사기를 ‘샬롬이 없는(엔-샬롬) 이야기’라 부릅니다. 축복의 땅에 들어왔으나 정작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땅의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앎이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한 데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길갈의 은혜를 기억하는 겁니다. 언약의 은혜를 새긴 길갈의 자리가 통곡의 자리인 보김으로 바뀌면 안됩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맺은 은혜의 언약을 잊고 세상과 손잡을 때, 그 편함이 도리어 가시와 올무가 됩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언약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아는 앎을 다음 세대로 이어 주는 것입니다. 사사기의 비극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세대가 끊긴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앎은 지식으로 물려줄 수 없고, 우리가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통해 자연스럽게 전해집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갈 때, 자녀와 다음 세대가 그 삶을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앎 안에서 복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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