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12절)
어제 말씀에서 야고보는 시련 가운데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했습니다.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가 우리를 온전하고 부족함이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련을 만난 사람이 모두 온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가난한 형제는 높음을, 부한 자는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다시 시험에 대해 말합니다.
12절은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4절에서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같은 말을 합니다. 어려움을 만나면 참기가 정말 힘듭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힘들 때 이 말씀을 기억하고 인내하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왜 참는 자가 복이 있습니까?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면류관은 승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입니다. 끝까지 견딘 사람만 받습니다. 마라톤 선수가 멈추고 싶은 마음을 이기고 끝까지 달려야 우승의 면류관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신앙의 길에도 멈추고 싶고 주저앉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바라보며 견디는 사람이 생명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지금 내가 인내해야 할 자리와 일은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특히 이 면류관이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시련을 견디는 것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 때문에 견디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끝까지 견딜 수 없습니다. 인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입술로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막상 시련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또한 시련 앞에서 죽겠다, 못 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주님이 살아 계시고 반드시 일하신다는 것을 믿고 견디면, 주님은 생명의 면류관으로 우리 삶을 풍성하게 이끄십니다.
13절은 같은 ‘시험’이라는 말을 쓰지만 다른 의미로 이야기합니다. 12절까지의 시험은 믿음 때문에 당하는 시련이었습니다. 그런데 13절부터의 시험은 죄로 끌어들이는 유혹입니다. 원어에서도 같은 단어가 두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믿음을 단련하려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련이 있고, 내 안에서 생기거나 사탄이 속여서 오는 유혹이 있습니다. 이 둘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혹에 넘어가 무너진 사람 가운데 하나님을 탓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이런 시험에 들게 하셨느냐고 핑계를 댑니다. 그 당시 성도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유혹해서 무너지게 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면 유혹은 어디서 옵니까? 14절은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속이는 사람이 가장 큰 문제지만, 속는 사람에게도 욕심이 있으면 그 안의 함정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옳은 길인지 분별해야 하는데, 욕심에 끌리면 눈이 가려져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유혹이 밖에서 오는 것처럼 보여도, 그 유혹에 끌려가게 만드는 것은 내 안의 욕심입니다.
●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17절)
욕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욕심이 작은 것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작은 욕심이 생명처럼 자라서 죄가 되고, 그 죄가 자라서 사망에 이릅니다. 우리 안의 작은 욕심을 조심하지 않으면 결국 그것이 우리를 죄와 죽음으로 끌고 갑니다.
여기서 12절과 14절이 대조를 이룹니다. 12절은 “주님을 사랑하는 자”이고, 14절은 “자기 욕심에 끌리는 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길의 끝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있고, 욕심을 따르는 길의 끝에는 ‘사망’이 있습니다. 사람이 욕심을 따르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사기의 이스라엘이 자기 소견대로 살다가 죽음과 같은 결과를 맞은 것처럼, 욕심은 결국 사망을 가져옵니다.
이어서 야고보는 속지 말라고 말합니다. 무엇에 속지 말라는 것일까요? 욕심을 부리면 이 땅에서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17절은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라고 말합니다. 좋은 것은 욕심을 부려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께서 주셔야 얻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려 움켜쥔 것은 오히려 나를 죄로 끌고 가지만, 아버지께서 주시는 것은 온전한 선물입니다.
17절은 그 아버지를 “빛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고,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고 말합니다. 해와 달과 별 같은 빛들은 움직이고 그림자도 바뀝니다. 그러나 그 빛들을 지으신 아버지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고 채우십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생각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신뢰할 때, 하나님이 위로부터 좋은 것으로 우리 삶을 채우십니다.
18절은 하나님이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합니다. 15절에서는 욕심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았습니다. 18절에서는 하나님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십니다. 같은 낳는다는 말로 두 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낳는 것은 죄와 사망이고, 말씀이 낳는 것은 의와 새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욕심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붙들려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피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게 하려고 낳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살다 보면 유혹을 받고 욕심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욕심에 끌려가면 죄와 사망으로 갑니다. 그러나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살면 그 길이 의와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좋은 것은 모두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좋은 것은 욕심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변함없으신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위로부터 주십니다. 지금은 시련 가운데 있어도 반드시 채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견딥시다.
또한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욕심이 많은 세상에서 내 생각대로 살면 결국 죄와 사망에 이릅니다. 우리를 말씀으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답게, 선택의 순간마다 말씀이 가리키는 길을 따라 생명의 길을 걸어갑시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으로 승리합시다.
0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