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02 | 매일성경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3절)
바울은 짧은 기간(세 안식일)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 일행을 공격하려는 유대인들 때문에 더 머물 수가 없어 밤중에 베뢰아로 이동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오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들이 어떻게 데살로니가로 들어가서 어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해를 부탁하는 내용이면서 또한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앞으로 복음을 맡은 자로서 어떤 마음과 태도로 감당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순회전도자로서 방문해야 할 곳이 많은데 데살로니가를 방문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으로 인해서 예수님을 만나고 믿음과 사랑, 소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외면을 받지만 새 생명을 얻어 소망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바울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위에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과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연이 아니오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만난 사람, 우리가 경험한 사건들로 예수님을 만나고 새 소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감사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오기 전 빌립보에서 만났던 고난과 능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점치는 귀신들린 여인을 고쳐주어 고발을 당하고 많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힙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잘 아는 찬송과 기도 가운데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나고 간수의 가족이 구원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빌립보 사역 이후 데살로니가를 방문하였습니다.
바울은 3절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5절도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결코 간사함이나 부정, 속임수, 아첨, 탐심으로 성도들을 대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당시 순회전도자들이 있었는데 잘못된 목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영광을 위해서 속이고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전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4절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하나님께서 바울을 선택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맡기셨습니다. 핍박자였던 바울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찾아와 만나주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사명이 아니라면 자신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느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명을 감당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반복되는 말이 4절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4절 하 “하나님을 기쁘시게”, 5절 하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10절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즉 바울은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의 사역이었습니다. ‘Coram Deo’의 삶입니다.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13절)
그러기에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7절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11절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습니다. 즉 부모의 심정으로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했습니다. 그랬기에 8절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성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 위해 생명주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런 설명을 길게 하는 이유는 12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본을 통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바울은 말이 아닌 삶으로 본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13절입니다. 본문의 다른 구절은 잘 몰라도 13절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왜 이 구절이 본문의 흐름 속에서 등장하고 있는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짧은 기간 복음을 전했지만 좋은 교회, 소문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1:6절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였습니다. 말씀을 받고 본을 받았습니다. 말씀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관계를 통해 전달됩니다.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 신뢰하고 수고를 존중할 때 말씀의 열매를 풍성히 맺을 수 있고, 본을 받게 됩니다.
즉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은 사역자들의 순수한 마음과 복음의 열정을 성도들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고, 그 말씀의 풍성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어떤 마음과 태도이어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풍성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이 관계가 아름답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고난에 대해 설명합니다. 신앙의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고난을 주는 사람들이 동족이라고 합니다. 같은 민족, 가까운 사람이 고난을 줍니다. 이때 고난의 문제는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흔들림없이 우리 가야할 길을 가야 합니다.
2025.09.01 | 매일성경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2절)
9월을 시작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를 묵상합니다. 데살로니가서는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의 관계를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성령의 강권적인 인도로 유럽을 향하게 됩니다. 가장 먼저 빌립보에 복음을 전했고 행17장을 보면 그 다음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에 도착한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행17:2절은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고 합니다. 3주라는 짧은 기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불량배들을 선동해서 소동을 일으킵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 지역에 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행17:10절 보면 한 밤중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냅니다. 이렇게 바울은 데살로니가교회를 갑작스럽게 떠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마음 속에 염려가 있습니다. 짧은 기간 복음을 들은 성도들이 과연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갑자기 떠난 바울에 대해서 오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를 통해 전해 들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모습은 바울에게 감동이었습니다.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기쁨의 마음을 담아서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편지의 발신인을 1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라고 합니다. ‘실루아노’는 ‘실라’의 헬라식 이름입니다. 바울은 위대한 사도였지만 이처럼 많은 이들과 함께 동역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혼자 할 수 없습니다. 함께 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를 보내는데, 그 앞에 교회는 어떤 곳인가를 설명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교회, 하나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정체성이요 세상 그 어떤 공동체와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 중심, 예수님 중심이 아니면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삶에 너무 중요한 은혜와 평강도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집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은 항상 감사하며 항상 기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떠나가야 하는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멀리서 기도합니다. 몸으로 함께 할 수 없지만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녀와 교회, 일터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온전하게 함께 하십니다.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5절)
데살로니가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은 감동입니다. 왜냐하면 3절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과 사랑, 소망이 등장하는데 보이지 않지만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믿음, 사랑, 소망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바로 나타나 눈에 보이는 열매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믿음으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사람의 생각과 경험, 계산으로가 아닌 하나님에 대한 믿음으로 결정하고 행동합니다. 이들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랑을 위해 수고합니다. 입술로만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수고합니다. 품을 수 없는 사람을 품고, 그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기다려줍니다. 또한 소망으로 인내합니다. 우상숭배가 만연한 시대에 교회와 성도들 향한 핍박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손해와 고통을 인내하면서 장차 나타날 영광을 기대하며 살아갑니다.
궁금한 것은 어떻게 3주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이런 열매가 맺어질 수 있을까요? 5절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고 합니다. ‘말’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전해졌습니다. 바울은 성령을 강조합니다. 6절에서도 성도들 역시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라고 합니다. 정리해보면 전하는 자들도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능력과 성령과 확신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받는 성도들도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았습니다. 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복음에 집중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많은 내용을 듣고 알고 있느냐보다, 또한 얼마나 오랫동안 전하고 받았는지보다, 성령과 능력으로 전하고 성령의 기쁨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시대 우리가 기도하며 회복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말씀의 홍수 속에 살아가지만, 반면 말씀의 기갈을 경험하는 시대입니다. 그만큼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이기기 보다는 생명과 능력을 상실하고 세상의 흐름에 떠내려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때 모든 교회에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고 그렇게 살아가는 일들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데살로니가교회의 이야기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역에 본이 되고 믿음의 소문이 퍼졌습니다. 작은 교회요 이제 시작하는 교회이지만 이들의 삶의 열매들, 복음 안에서 이루어진 변화들이 좋은 소문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9-10절에서 참된 신앙은 무엇인지를 다시 정리합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진노에서 건져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신앙의 기초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신앙의 요소들이 보이는 열매로 나타나길 기도합시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이룹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선포되고, 듣는 이들은 성령의 기쁨으로 받아 생명과 능력의 신앙이 됩시다.
2025.08.22 | 매일성경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들을 크게 요란하게 하시리니”(13절)
스가랴서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쉽지 않은 말씀을 묵상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회복과 또한 회복된 백성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14:2절에서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셨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정결케 되고 예루살렘은 새롭게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하며 생수가 흘러 넘쳐 온 세상으로 향하는 곳이 됩니다.
예루살렘 회복의 날은 이방 나라들에게는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12절 “예루살렘을 친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께서 내리실 재앙은”이라고 시작됩니다.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이방 나라 사용해서 예루살렘 공격하게 하시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이방 나라에 재앙을 내리시는 것이 옳은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심판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심판입니다. 14장은 여러 번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합니다. 9절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16,17절은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가 반복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들이 왕이 되어 거대한 세상을 만들고 주도했습니다. 그들이 만든 세상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12절의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의 결과로 반복되는 말이 “썩는다”입니다. 범죄한 후 하나님의 생명에서 끊어진 아담에게 하나님은 창3:19절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겉으로 화려하고 거대해도 그곳은 죽음의 장소입니다. 또한 13절 “피차 손으로 붙잡으며 피차 손을 들어 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기도 하지만 자신들끼리 피차 죽고 죽이는 정글의 세상입니다. 스스로 파멸을 길을 걷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반면 예루살렘은 비록 작고 초라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이 가득한 도성이 됩니다. 하나님은 14절 보면 유다도 예루살렘에서 이방 나라들과 전쟁하는 가운데 많은 전리품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많은 재물을 얻는다는 말이 아니라 1절에서는 죄악된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의해 재물이 약탈되고 나누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로 회복과 승리가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이런 역전의 날이 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디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할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20절)
이렇게 이방 나라가 심판을 당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데, 16절 “예루살렘을 치러 왔던 이방 나라들 중에 남은 자가 해마다 올라와서 그 왕 만군의 여호와께 경배하며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이처럼 돌아오는 소수의 사람에게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은 재앙을 한꺼번에 쏟지 않으시고 서서히 강도를 높이십니다. 믿지 않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의 은혜를 누리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도 이방 나라 중에 소수의 남은 자들이 해마다 예루살렘에 올라와 초막절을 지킬 것이라고 합니다. 그 경배의 대상이 “그 왕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지나면서 초막, 즉 텐트에서 생활하던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절기입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 기둥으로 보호하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또한 초막절을 지키는 때는 가을 추수하고 감사하는 때로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통해 풍성한 결실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키는 절기들 가운데 가장 성대한 절기입니다. 이처럼 초막절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에 감사하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반면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오지 않는 자들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으시고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왕이신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어떤 마음과 자세이어야 하는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우리 힘으로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데 광야 같은 세상 하나님께서 늘 보호하시고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심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20절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말은 대제사장이 머리에 쓰는 관에 새겨진 글씨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 앞에 봉사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글귀가 이제는 “말 방울”에까지 기록될 것이라고 합니다. 말은 부정한 짐승입니다. 그런 말의 방울에 까지 기록된다는 의미는 이제 성전만이 아닌 모든 곳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거룩한 곳이요, 그러기에 모든 곳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다시 솥 이야기를 통해 설명합니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성전에 있는 구별된 솥으로만 제물을 삶았다고 한다면, 이제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여호와의 성물이 되어 고기를 삶을 수 있게 됩니다. 이제는 성과 속의 구별이 없이 모든 곳에서 거룩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21절 하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하는데 “가나안 사람”은 장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이 있었고, 성전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가 아닌 사람들이 자기 욕망을 채우는 장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종교지도자들의 허락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성전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뒤집어 엎으시고 정결케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성전이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만이 생명이십니다. 이 생명에서 떠나면 화려하고 거대해도 죽음입니다. 하나님만 왕이십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고 하나님만 경배하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을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내야 하겠습니다.
2025.08.21 | 매일성경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4절)
슥 14장은 스가랴서의 결론입니다. 마치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내용이 새 예루살렘의 회복인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회복을 위해서는 과거 예루살렘의 죄악들이 제거되어야만 합니다. 13:2절에서 우상을 섬겼습니다. 또한 거짓 예언자들의 말에 현혹되어 삶이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회복은 먼저 예루살렘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회복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1절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날”이 이르면 악에 대한 심판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승리가 이루어질 것 같은데 오히려 예루살렘이 약탈당합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을 동원해서 행하십니다. 성읍은 함락되고 백성들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13:9절의 “불 가운데 던져 은같이 연단하여 금같이 시험할 것이라”는 말씀처럼, 그동안 잘못된 것을 붙잡고 살았던 것을 버리게 하십니다. 허탄한 것들을 쌓았던 것들이 무너지게 하십니다. 정결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이렇게 강한 이방 나라들이 모여 예루살렘을 공격하면,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결론이 날 것 같은데 3절부터 반전이 일어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과 싸우십니다. 그래야 예루살렘이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작은 하나님의 임하심으로부터입니다. 4절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하나님의 발이 감람산에 섭니다. 하나님께서 임하십니다. 그래서 5절 하 “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라고 합니다. 이 장면은 마치 이전에 예루살렘을 떠나셨던 하나님께서 돌아오신 것과 같습니다. 에스겔서를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있을 수 없는 죄악이 만연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떠난 건물 성전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돌아오셔서 다시 예루살렘 위에 임하십니다. 능력의 하나님께서 임하신다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임하실 때 우레와 번개가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임하심으로 감람산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집니다. 큰 골짜기가 만들어집니다. 마치 홍해가 갈라진 것처럼, 가나안 땅 들어갈 때 요단강 물이 멈춘 것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 골짜기를 통해 5절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고 합니다. 여기 도망은 남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골짜기를 통해 하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있어도 하나님께서 떠나시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위기 속에 있어도 하나님께서 돌아오시면, 함께 하시면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9절)
6절부터는 회복된 예루살렘의 모습이 나옵니다. 6-7절 새번역 “그 날이 오면, 햇빛도 차가운 달빛도 없어진다. 낮이 따로 없고 밤도 없는 대낮만이 이어진다. 그 때가 언제 올지는 주님께서만 아신다. 저녁때가 되어도, 여전히 대낮처럼 밝을 것이다.” 빛이 필요없는 밝음이 계속됩니다. 마치 계21:22-23절 말씀과 같습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늘 함께 하기에 해와 달이 소용없습니다. 모든 어둠이 떠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8절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생수가 솟아 동해와 서해, 즉 온 세상으로 퍼져나갑니다. 죽었던 것들이 살아납니다. 계절에 상관없이 항상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말씀 역시 계22:1-2절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와 같습니다. 이렇게 보면 스가랴서는 당시 성도들에게 예루살렘 회복에 대한 소망을 강력하게 전달하면서 사실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9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시리니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홀로 한 분이실 것이요 그의 이름이 홀로 하나이실 것이라” “홀로”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원래 하나님만 온 세상의 왕이십니다. 홀로 한분 하나님만이 경배의 대상이십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너지면서 결국 이스라엘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주일 말씀이 사무엘상을 통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과 사울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혼란과 연약함입니다. 모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회복은 환경이 변하는 것보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왕되심, 다스리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 한분만 경배해야 합니다.
이런 예루살렘을 하나님은 높여주십니다. 10절 “온 땅이 아라바 같이 되되”는 평평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가운데 예루살렘만 우뚝 솟아오릅니다. 다시 저주가 있지 않고 예루살렘이 평안히 서게 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회복의 은혜를 누리는 자들입니다. 영광의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셔서 함께 하십니다. 빛과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매 순간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며 말씀의 통치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빛과 생명을 누리며 어둔 세상을 빛으로, 죽어가는 자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2025.08.20 | 매일성경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2절)
어제 말씀은 하나님을 찌른 자들이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철저하게 애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각각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은혜를 베풀어주시는가? 1절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 열리리라” 용서의 샘이 열립니다. 죄악을 씻어주시며 심령을 정결케 해주십니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외적인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정치 군사적 약함이 아니었습니다. 내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지 못했습니다. 죄와 더러움 가운데 살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내면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주시고 애통할 때 깨끗케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문제는 내면에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외모와 환경에 관심이 많습니다. 나를 바라보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내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티를 보며 정죄합니다. 내게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보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에게 없는 것에 대해 불평합니다. 우리의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말씀으로 우리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찌른 이스라엘의 죄악은 어떤 것들일까요? 2절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우상의 풍요를 주리라 기대했는데 결과는 멸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거짓 선지자로 인한 것입니다. 2절 하-6절까지 길게 이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3절은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사람이 아직도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가 예언할 때에 칼로 그를 찌르리라” 예언하는 자는 낳은 부모가 칼로 찌른다고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꿔말하면 그 정도로 심각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른 예언자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참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거짓 예언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거짓 예언이 가득했다는 의미입니다. 특히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새번역은 “네가 주님의 이름을 팔아서 거짓말을 하였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 상대방이 듣기를 원하는 말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합니다. 특히 왕과 같은 지도자 옆에서 그들이 원하는 내용을 전합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나라가 불순종으로 인해 멸망하기 전, 참된 선지자들은 회개해고 돌이켜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하지만 많은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결국 나라가 멸망해서 포로로 끌려가는데 하나님은 70년 포로생활을 말씀하시는데, 거짓 예언자들은 곧 돌아올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래서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돌이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래서 낳은 부모가 이들을 칼로 찌를 것이라고까지 경고하시는 겁니다.
결국 거짓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거짓 환상을 부끄러워 할 것이며, 선지자처럼 위장하기 위해 입었던 털옷을 벗게 될 것입니다. 자신은 선지자가 아니고 농부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힐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 그의 두 팔 사이에 있는 상처에 대해 묻습니다. 이 상처는 우상에게 간구하다 생긴 상처입니다. 왕상18장에서 엘리야와 바알의 선지자들이 대결할 때 바알이 응답하지 않자 바알 선지자들이 칼과 창으로 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런 상처들입니다. 그런데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친구 집에서 난 상처라고 둘러댑니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지금도 거짓 예언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맹종하게 합니다. 이들로 인해서 한국교회가 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잘 분별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9절)
하나님은 언약을 회복하시는데, 다수가 아닌 소수의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 과정에 목자를 치자 양들이 흩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이 목자를 “내 짝 된 자”라고 하시는 것을 보면 이 목자는 선한 목자입니다. 이 목자가 공격을 받자 양들은 흩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2/3은 멸망하고 1/3만 남게 됩니다. 이 남은 자들을 9절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 가운데에 던져 은 같이 연단하며 금 같이 시험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하나님은 이들을 “내 백성”이라 하시며 그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내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성도에게 찾아오는 시련은 우리를 연단합니다. 금 같은 믿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니 인내하고 잘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내적인 정결함이 필요합니다. 말씀의 거울로 늘 점검합시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해서 내 뜻과 생각을 말하는 것이 가장 위험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시련을 통해 금 같은 믿음으로 성숙하는 소수의 사람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