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7.21 | 매일성경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1절)
12-13장까지를 읽으면 성도들의 현실이 절망적입니다. 큰 용이 교회를 공격합니다. 13장에서는 용의 하수인인 두 짐승이 권세를 가지고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는 성도들을 사로잡아가고 칼로 죽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경배하고 추종합니다. 이들의 이마에 짐승의 이름의 숫자인 육백육십육을 받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온통 짐승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세상입니다. 그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4장으로 넘어오면 완전히 분위기가 바뀝니다. 1절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승리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시온산에 서 계십니다. 이는 용이 바다 모래 위에 서 있고(12:17), 짐승들이 하나는 바다에서 올라오고, 다른 하나는 땅에서 올라는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세상은 이처럼 용과 짐승들이 활개를 치는 것 같지만 시선을 돌려 하늘에 있는 시온산을 바라보니 이미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서 계십니다. 땅에서 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4장에서 요한이 땅의 어두운 현실에서 열린 문을 통해 하늘로 올라가 보좌에 앉으신 영광의 하나님의 만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그렇습니다. 계시록은 우리 눈으로 보이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계속 강조합니다. 열린 문으로 올라가 하늘 보좌를 보아야 하고, 땅에서 눈을 들어 시온산에 서 계신 어린양을 바라봐야 합니다.
어린양 곁에는 144,000명의 구원받은 성도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짐승의 이름이 아닌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있습니다. 어린양과 성도들이 함께 시온산에 서 있는 이유는 큰 소리로 새 노래를 부르기 위함입니다. 이 새 노래는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3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합니다.
이어서 땅에서 속량받았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4-5절이 설명합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순결한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여자와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계시록에서 여자는 음녀로 표현되며(17장), 본문 8절에 나오는 “큰 성 바벨론” 즉 세상을 상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짐승에게 경배하고 세상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순결한 자들입니다. 어린양 예수님의 길을 따른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 거짓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승리자들입니다. 고난 뒤에 승리입니다.
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그 대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을 향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대신 믿음을 지킨 교회와 성도들에게는 반드시 승리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계시록이 또 하나 강조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믿지 않는 자들이 복음을 통해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간절히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0:11절에서도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복음을 전하라는 겁니다. 본문 6절도 “땅에 거주하는 자들 … 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더라”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이요, 당시 성도들이 고난 속에서도 집중해야 할 것이 바로 영원한 복음,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7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하지만 거부하는 자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심판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12절)
하나님의 심판이 누구에게 어떻게 임하는가? 8절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세상을 상징하는 “큰 성 바벨론”이 무너집니다. 이유는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로 하여금 음행을 하게 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에 앞장서고 세상을 그 길로 유혹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런 바벨론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아닌 짐승에게 경배하고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10절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라고 합니다. “섞인 것이 없다”는 것은 긍휼이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진노를 말합니다. 불과 유황입니다.
이것을 11절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의 이름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들은 세상의 기쁨과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을 버리고 짐승을 경배하고 따랐습니다. 그 결과 밤낮 쉼을 얻지 못한다는 의미는 이 세상에서 잠깐 기쁨을 맛보지만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고통 당하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짐승의 지배하는 큰 성 바벨론에서 믿음을 지킨 성도들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12절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성도들은 인내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13절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이유는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의 죽음이 그것으로 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라고 합니다. 11절과 반대입니다. 세상에서 잠깐의 기쁨을 위해 믿음을 저버린 자들은 영원한 안식을 누리지 못하지만, 말씀과 믿음으로 인내한 성도들은 세상에서 잠깐 고난을 받지만 영원한 안식을 누립니다. 영광의 하나님과 함께 하고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광의 안식입니다.
‘암살’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독립군이 친일파를 암살합니다. 그런데 독립군 중에 일제 첩자가 있었습니다. 염석진이라는 인물입니다.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염석진은 경찰 고위간부가 됩니다. 법이 이 사람을 벌하지 않자 독립군 저격수인 안윤옥이라는 여인이 염석진을 처단합니다. 총을 쏘기 전 안윤옥이 묻습니다. “왜 동지를 배반하고 반역자 노릇을 했습니까?” 염석진이 대답합니다.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지,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 그리고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납니다.
본문은 아무리 세상이 어둡고 성도들의 현실이 힘들어도 승리의 그 날은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 날을 기대하며 그 날을 믿음으로 준비하는 삶이 됩시다.
2025.07.18 | 매일성경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1절)
오늘 본문은 마치 SF영화와 같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쉽지 않습니다. 먼저 한가지 예를 설명하는 것이 본문을 비롯한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저 사람 변사또와 같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 이해합니다. 추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을 의미합니다. 여러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이 한 단어가 더 선명하게 의미를 전달합니다. 그런데 우리 문화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에게 “당신 변사또와 같다”라고 한다면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오해가 생깁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 생소한 내용이지만 그 당시 문화 속에 살고 있던 성도들은 무슨 이야기인지를 어떤 말이나 글보다 선명하게 이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찾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자와 아이 그리고 용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쉬운 것부터 시작한다면 “용”입니다. 3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런데 9절은 용의 정체를 설명합니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고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옛 뱀인 사탄이 여전히 온 세상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용이 해산하는 여인에게서 아이를 삼키려고 합니다. 용이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모방해서 자신이 왕인 것 처럼 흉내내는 존재라는 겁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사탄은 꼭 하나님처럼 흉내내는 존재입니다. 이런 사탄이 제거하려는 아이는, 5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입니다. 승리하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여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1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고 합니다. 해와 달과 별로 표현되는 여인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것은 창37:9절에 나오는 요셉이 꾼 꿈을 반영합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의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열한 형제들이 자신에게 절하는 꿈을 꾼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야곱의 가족을 통해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형성됩니다. 구약의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고, 결국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런 예수님을 제거하려 사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패합니다. 오히려 5절 하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용은 여자를 공격합니다. 그래서 6절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고 합니다. 광야는 황량하고 위험한 곳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가 있는 곳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교회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14절도 그렇습니다. 다시 광야로 도망하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도우십니다. 당시 성도들이 마주한 현실이 광야와 같습니다. 위험하고 막막합니다. 하지만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보호하시고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만나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동일하게 함께 하십니다.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11절)
예수님을 제거하는 일에 실패한 용은 하늘에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미가엘과 사자들에 의해 패배합니다. 그래서 8절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9절 “큰 용이 내쫓기니” “내쫓겼다”입니다(9,10,13). 용이 하던 일이 온 천하를 꾀는 일을 하며, 10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용은 패배하였습니다. 내쫓겼습니다. 사탄도 자신의 패배를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최후의 발악을 합니다. 그 대상은 교회입니다. 그래서 13절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고 합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해져있습니다. 사탄의 패배, 교회의 승리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무엇으로 승리할 수 있을까요? 11절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먼저 어린양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탄의 머리를 박살내고 승리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붙잡을 때 우리도 승리합니다.
또한 성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승리를 굳게 붙잡고 선포했습니다. 앞에서 재앙 가운데서도 10:11절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했고 11:3절 “두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때 전한 복음의 내용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승리입니다. 사탄의 참소와 공격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 이것입니다. 우리가 다시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승리입니다.
이를 위해 성도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합니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가 목숨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잠깐 이 땅을 살아가는 육신의 생명은 잃어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성도들이 세상의 공격과 유혹 앞에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는 교회의 영광스러움을 발견합니다. 교회의 모습을 해와 달과 별을 품고 있는 여인으로 표현합니다. 당시 교회는 세상의 눈에 어떻게 보였을까요? 초라하고 연약했습니다. 기울어져가고 소망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교회와 성도들이 영광스런 공동체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십니다.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해보여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인도하셔서 사용하십니다. 교회와 성도가 바로 그런 영광스런 존재입니다.
지금 시대도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교회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교회가 영광스러운 공동체임을 말씀하시며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승리합니다.
2025.07.17 | 매일성경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15절)
14절은 둘째 화가 지나가고 셋째 화가 속히 이른다고 합니다. 8장을 보면 나팔 재앙 중에서 네 번째 나팔까지 울리자 자연계 1/3이 심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8:13절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고 했습니다. 세 번의 “화”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다섯 번째 나팔과 여섯 번째 나팔 그리고 일곱 번째 나팔의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 전에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나팔 재앙으로 땅에 사는 사람 1/3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화와 두 번째 화가 지나간 것이고 이제 셋째 화인 일곱 번째 나팔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은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라고 합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이전과 같은 재앙이 임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 전혀 다른 일들이 이어집니다. 15절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이르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그리스도께서 “세세토록 왕노릇”하십니다. 또한 17절 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왕노릇하는 세상이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 재앙과 나팔 재앙을 통해 궁극적으로 원하신 일이 바로 세상 나라가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참된 회복을 원하십니다.
원래 세상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왕이신 세상이었습니다. 피조물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길 때 가장 복된 관계 속에서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왕의 자리에서 내쫓고 인간이 왕이 되고 주인이 되는 겁니다. 이런 유혹에 넘어가 범죄하므로 세상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세상 나라의 특징은 관계가 깨지고 힘있는 자들이 왕노릇하는 세상입니다. 죄가 가득한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도 10-11장을 통해 작은 두루마리와 두 증인 이야기를 통해 세상에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결과 회개하지 않던 자들 가운데 11:13절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고 합니다. 돌아오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나라가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이런 큰 음성을 듣고 하나님 앞에 있던 24장로가 엎드려 경배하며 이렇게 찬양합니다. 17절 “이르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의 시작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반역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세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도전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속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더불어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19절)
세상 나라에 속한 자들과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들의 결과가 분명합니다. 18절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라고 하는데 이 말씀은 시편2편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방이 분노하는 이유는 시2:2-3절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면서 벗어나려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시2:4-6절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 비웃으십니다. 놀라게 하십니다. 그리고 왕을 거룩한 산에 세우십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시2:11절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왕되심이 회복될 때 기쁨이 회복됩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하나님은 18절 중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라고 하십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분노하는 자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고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땅히 세상 나라가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당시 상황은 세상 나라가 거대하고 세상 나라에 속하는 것이 안전과 행복이 보장되어 보입니다. 반대로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에 속하는 것은 죽음의 길이요 초로한 삶입니다. 그러니 세상 나라로 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본문은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붙잡고 살아야 할지를 알게 합니다. 비록 지금 잠깐의 고난이 있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는 삶이 복된 삶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실 상을 기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상”은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상입니다. 성도에게 이것보다 더 큰 상급은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당시 성도들이 들을 때 확신을 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흔들리는 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19절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라고 합니다. 언약궤를 보여주시므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심을 알게 합니다. 또한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은 하나님의 임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으로 하나님께서 반드시 임하셔서 이 일을 성취하실 것에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도 거대한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교회와 성도가 연약하고 초라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나라가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께서 완전히 다스리시는 때가 임할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025.07.16 | 매일성경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3절)
여섯 번째 나팔 재앙 이후 아직 일곱 번째 나팔이 울리지 않은 상황입니다. 일곱 번째 나팔은 11:15절에서 울립니다. 그 사이에 하나님의 진노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는 세상을 향해(9:20-21절) 교회와 성도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어제 본문은 “작은 두루마리”를 통해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두 증인” 이야기를 통해 설명하십니다.
1-2절은 교회의 두 가지 측면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입니다. 그래서 갈대를 주시며 1절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되”라고 합니다. 성전 측량은 에스겔 40-48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측량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전을 보호하고 계심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와 성도들을 보호하십니다. 특별히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은 예배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자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런데 교회의 다른 측면도 있습니다. 2절입니다. “성전 바깥 마당은 측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은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고 합니다. 교회가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힙니다. 핍박을 당합니다. 그 기간이 “마흔두 달”입니다. 그런데 이 기간이 3절에 나오는 “천이백육십 일”과 같습니다. 또 이 기간을 다른 곳에서는 “삼년 반”이라고도 하고 “한때 두때 반때”라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기간을 왜 이렇게 다르게 표현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처럼 고난의 기간은 짧은 숫자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승리와 사명의 시간은 길게 표현합니다. 즉 고난의 짧고 영광은 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낙심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승리하는 겁니다.
이처럼 교회는 하나님의 보호도 받지만 한편으로는 세상의 핍박도 받고 고난도 당합니다. 이때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바로 3절에 나오는 “두 증인”의 사명입니다. 이단들은 여기 나오는 두 증인이 자신들의 교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두 증인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4절 “그들은 이 땅의 주 앞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라고 합니다. 두 증인을 “두 촛대”라고 합니다. 1:20절에서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교회를 가리킵니다.
교회를 “두 감람나무”라고 한 것은 슥4장을 배경으로 하는데 총독(왕)인 스룹바벨과 제사장인 여호수아를 가리킵니다. 이는 교회가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고, 또한 감람나무가 금 촛대에 기름을 공급해서 불이 타오르게 하는데 이처럼 증인의 사명을 감당할 때 성령 충만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며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교회와 성도는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12절)
두 증인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주십니다. 이들을 해하고자 하면 입에서 불이 나와 삼키게 하십니다. 이들은 엘리야의 권능으로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할 수도, 모세가 했던 것처럼 물을 피로 변하게 합니다. 이렇게 능력으로 복음이 증거되게 하십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 전파가 계속되지 않습니다.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과 두 증인이 싸움을 하게 되고 안타깝게도 죽임을 당합니다. 그들의 시체가 길에 버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두 증인이 죽은 장소를 8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고 합니다. 두 증인이 죽임을 당한 곳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곳입니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두 증인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 세상과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것과 같이 10절 “이 두 선지자가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사는 자들이 그들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고 하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은 두 증인이 복음을 전하므로 자신들을 괴롭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증인의 죽음을 기뻐하며 예물을 보내기까지 합니다. 세상의 무지를 봅니다. 무엇이 생명인지, 무엇이 진리의 길인지를 알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가 중요합니다.
여기까지 보면 두 증인을 죽인 세상이 승리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죽임당한 두 증인에게 생기를 넣어주십니다. 그러자 11절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처럼 부활합니다. 그리고 12절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그들이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도 구경하더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승리하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것처럼, 두 증인도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들 역시 예수님과 함께 온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왕노릇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 시대 성도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말씀해 줍니다. 예수님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면 십자가 이후 승리와 영광을 주십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먼저 십자가요 후에 영광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없는 영광을 원합니다. 고난 없는 승리를 원합니다. 아닙니다. 반드시 십자가 뒤에 영광입니다. 지금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다면 주어질 영광을 바라보며 인내해야 합니다.
또한 고난 속에서도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갑시다. 땅에 거하면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에게 하늘 소망을 전하는 복된 삶이 됩시다.
2025.07.15 | 매일성경
●“그 손에는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2절)
9장에는 여섯째 나팔 재앙까지 임했습니다. 이로 인해 자연의 1/3과 사람 1/3이 심판을 당합니다. 그런데 결과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귀신과 우상을 숭배하고 죄악 가운데 행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속에서 교회와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를 10-11장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힘센 천사가 등장합니다. 천사의 모습이 1절 “구름을 입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고 그 얼굴은 해 같고 그 발은 불기둥 같으며”라고 합니다. 구름을 입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머리에 무지개가 있다는 것은 4:3절에서 하나님의 보좌에 무지개가 둘린 것과 같습니다. 창9장의 무지개 언약을 생각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시고 반드시 언약을 지키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얼굴은 해와 같고 발은 불기둥 같다고 하는데 1:15-16절에 기록된 예수님의 모습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와 흡사합니다. 이런 표현은 힘있게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천사의 모습입니다.
2절 보면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가 들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5장에서 하나님의 오른 손에 들린 두루마리를 살펴보았습니다. 일곱 인으로 봉인되었던 두루마리의 인봉이 하나씩 떼지면서 인 재앙과 나팔 재앙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작은 두루마리는 5장의 두루마리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5장의 두루마리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세상을 향해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에 대한 것이라면, 본문은 작은 두루마리는 그런 세상 속에서 성도들이 전해야 할 복음의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대조되는 내용이 2절의 “펴 놓인 작은 두루마리”와 4절 하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입니다. 한마디로 열려 있는 책이 있고, 인봉되어야 할 닫힌 말씀이 있습니다. 3절은 작은 두루마리를 든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칠 때 일곱 우레가 소리를 내어 말을 했다고 하는데 이 일곱 우레 소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앞으로 되어질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자 요한이 기록하려고 하는데 이때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까지 알려지지 않아야 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주님 재림과 관련된 날과 시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세세토록 살아계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뜻은 무한합니다. 그것을 사람이 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꼭 필요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기록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록된 말씀, 펴서 보여주시는 말씀을 붙잡고 살아가면 됩니다. 그럼에도 우리 삶에 답답한 문제들을 만납니다. 언제 어떻게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실지 알지 못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은 분명하게 강조하십니다. 6절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작정하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 가운데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주권자되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지체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십니다. 7절도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고 합니다. 우리 삶과 가정, 일터와 자녀들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10절)
다시 2절로 돌아가면 작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는 천사가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왼 발은 땅을 밟고”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본문은 세 번 반복합니다(5,8). 계시록에서 바다와 땅은 악을 상징합니다. 성도들의 눈에 세상이 승리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 바다와 땅을 천사가 밟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십니다.
하늘의 음성이 요한에게 말합니다. 8절 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두루마리를 가지라” 그래서 요한이 천사에게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이렇게 말합니다. 9절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천사의 말대로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먹으니 입에는 꿀같이 달지만 배에서는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거나 묵상할 때 은혜와 감동을 받습니다. 힘을 얻고 소망을 가집니다. 이것이 입에 달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 말씀을 삶의 현장에서 살아내려 할 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배에서는 쓰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이 말씀을 가지고 어떻게 해야 하는가? 11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고 합니다. 이 구절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여기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9장과 연결해서 보면 하나님의 진노에도 회개하지 않는 완악한 세상입니다. 여전히 성도들을 핍박하는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향해 성도들은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할까요?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고 합니다. 다시 복음을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절대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지만 다시 복음을 들고 나가 전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1/4, 1/3로 강도를 더해가는 것이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과정에서 한 사람이라도 돌이켜 생명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마음을 발견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사명입니다.
이를 위해 먼저 말씀을 달게 먹어야 합니다. 묵상하며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의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전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