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상17:1-15절/여호와가 너를 위하여(25.06.16)

●“나는 백향목 궁에 거주하거늘 여호와의 언약궤는”(1절)

13장부터 시작해서 16장까지 법궤를 옮기는 내용이었습니다. 쉽지 않았습니다. 한 번의 실패 뒤에 점검하고 말씀을 따라 옮겼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다윗은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왕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17장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계획을 세웁니다. 성경 저자가 무엇을 중심으로 역대기를 기록하고 있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 누구보다 중요한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어떤 것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입니다.

1절에 다윗은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습니다. 자신은 백향목 궁에 거주하는데 하나님의 언약궤는 휘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14:1절을 보면 두로 왕 히람이 배향목을 보내고 기술자들을 보내 다윗 왕궁을 건축해주었습니다. 외교적인 목적을 위해 지어주었기 때문에 분명 크고 화려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 16:39절을 보면 여호와의 언약궤는 “기브온 산당 여호와의 성막”에 놓여져 있습니다. 성막을 이동식 텐트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귀합니다. 자신이 크고 화려한 집에 거주한다면 자랑할 만도 하고 편리한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인데, 하나님의 성막과 그 곳에 놓인 언약궤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고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집, 성전을 건축할 마음을 갖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들은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을 위한 일이니 당연히 좋게 여기고 2절 “하나님이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바를 모두 행하소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3절 “그 밤에”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4절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내가 거할 집을 건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하나님은 다윗으로 하여금 건축하지 못하도록 하시는 것일까요? 본문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나오지 않습니다. 5-10절까지 내용을 보면 지금은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 시기가 아니라 다윗의 왕위와 이를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견고히 세워야 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상22:8절을 보면 다윗이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네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을 굳건히 세우기 위해 많은 전쟁을 치렀고 당연히 많은 피를 흘렸습니다. 그런 다윗이 평화의 상징인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한 왕조를 세울지라”(10절)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인도하셨으며, 또한 앞으로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지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셔서 광야를 지나 지금까지 인도하시면서 집에 거하지 않으시고 5절 “오늘까지 집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이 장막과 저 장막에 있으며 이 성막과 저 성막에 있었나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크고 화려한 집이 아닌 이동식 텐트인 성막에 거하셨습니다. 이유는 이동하는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기 위함입니다.

역대하6:18절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성막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성전을 지었지만 이 성전도 하나님이 거하실 수 없는 장소라는 겁니다. 심지어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하나님을 모시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기꺼이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작은 성막에 함께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며 인도하시고 보호하기를 원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하나님을 위해 백향목 집을 건축하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하나님은 양을 치던 다윗을 세우셔서 이스라엘의 주권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과거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셔서 8절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고 하십니다. 다윗을 높여주시고, 그 이유는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10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한 왕조를 세울지라”고 합니다. 개역성경은 “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울찌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위해 집을 세우겠다는 다윗에게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집을 세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어지는 내용을 보면 집을 세워주신다는 말씀이 12절 하 “나는 그의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입니다. 누구도 빼앗거나 흔들 수 없도록 견고한 나라, 왕위가 이어지도록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십니다. 다윗 이후 남유다는 위기 속에서도 다윗의 후손을 통해 왕위가 이어졌습니다. 물론 나라가 멸망하였지만, 이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만왕의 왕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왕으로 온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집을 세우려 할 때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의 집을 세워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우리로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마음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높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역대상13:1-14절/궤를 옮겨오자(25.06.11)

역대상13:1-14절/궤를 옮겨오자(25.06.11)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3절)



역대상을 통해서 보면 다윗이 통일왕국의 왕이 된 후 처음으로 한 일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입니다. 이 내용은 삼하 6장에도 나오는데, 차이점은 사무엘하 내용은 다윗이 주도적으로 궤 옮기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윗이 지도자들과 의논하고 백성들의 동의를 얻어서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온 회중”(1,4), 온 땅(2), 온 이스라엘(5,6)이 반복됩니다. 왕이지만 명령이 아닌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중요한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2절 앞부분을 새번역으로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이 좋게 여기고 우리 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입니다. 다윗은 어떤 일을 진행할 때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춥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면, 그리고 백성들이 좋게 여기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이 두 가지는 기억해야 할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원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멈추어야 합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사람들과의 의논과 동의를 얻어 진행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물론 진리에 대해서는 타협과 양보가 있을 수 없지만, 많은 문제들은 진리가 아닌 문제를 일방적으로 진행할 때 일어납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옮기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이유는 3절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우리에게로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 묻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이어지는 내용에서 지금 하나님의 궤가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삼상 4-7장을 보면 길게 하나님의 법궤가 어떻게 블레셋 땅으로 가게 되었고, 또한 어떤 과정으로 이스라엘로 돌아와 기럇여야림에 오게 되었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법궤 사건이 이스라엘 신앙의 현주소를 알려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상징하는 법궤마저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이스라엘의 잘못된 신앙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렇게 법궤는 기럇여아림 아비다납의 집에 20년 동안 있게 됩니다(삼상7:2절). 문제는 사울이 법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을 다윗은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고 합니다. 대상10:14절은 사울의 죽음과 실패를 이야기하면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넘겨 주셨더라”고 합니다. 사울의 실패 원인은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왕으로 통치를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세워주셨지만 하나님께 묻지 않고 자신의 생각과 욕망을 따라 통치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결과는 실패입니다. 비록 작은 일을 하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면 성공적인 인생입니다. 사울과 달리 다윗은 하나님께 묻고자 합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자신이 왕이지만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묻는 겁니다.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14절)



궤 옮기기가 시작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말은 5절 “다윗이 …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고자 할새”, 6절 “다윗이 …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하니”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옮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함부로 만져서도 아무렇게나 옮겨서도 안 되고 반드시 레위 자손이 어깨에 메는 방식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런데 7절에 가면 이렇게 바뀝니다.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그리고 수레에 실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해서 웃사라는 사람이 죽게 됩니다.

수레에 싣고 가는데 소들이 뜁니다. 법궤가 넘어지려 합니다. 수레를 몰던 웃사가 자동적으로 손을 들어 궤를 붙잡았습니다. 궤를 넘어지지 않게하려는 좋은 행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웃사를 치시고 죽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하는 일이어도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은 수레에 궤를 싣고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메어 옮겨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수레에 옮겼을까요? 쉽게 설명하는 우리도 말씀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다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이유는 실용성과 편리함 때문입니다. 기럇여아림에서 예루살렘까지는 도보로 약 14km정도의 거리로 3-4시간을 이동해야 합니다. 궤를 어깨에 메고 가는데는 보통 수고로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실용적으로 수레가 등장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편리하게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또 하나의 이유는 블레셋에서 이스라엘로 법궤가 돌아올 때 블레셋 사람들이 암소 두 마리가 모는 새 수레에 법궤를 실어 보냈습니다. 지금 방식은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합니다. 즉 다윗과 이스라엘이 좋은 일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기준이 섞여 있습니다. 자신들의 편리를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변경해서 적용합니다. 문제는 시작하고 있는 다윗 왕국에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다윗 역시 사울의 길을 가지 않을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깨닫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12절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은 하나님의 뜻대로 법궤가 함께 한다면 그것을 복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예루살렘으로 옮겨가지 못한 법궤는 오벳에돔의 집에 머뭅니다. 그 결과는 14절 하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 진노가 아닌 복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도 삶의 우선순위가 하나님과의 관계, 즉 말씀과 기도가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된 삶을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크심과 두려우심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과 기준을 따라 행합시다.
[출처] 역대상13:1-14절/궤를 옮겨오자(25.06.11)|작성자 늘봄교회

역대상12:1-40절/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25.06.10)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인데 그 이름은 이러하니라”(2절)

다윗과 함께 했던 충성스런 용사들이 이야기가 11장에 이어 계속됩니다. 오늘 본문을 두 부분으로 나누면, 1-22절까지는 다윗이 사울에 의해 도망자의 삶을 살고 있을 때 다윗에게 나온 용사들에 관한 내용이고, 23-40절까지는 유다를 다스리며 헤브론에게 있던 다윗에게 모든 이스라엘 용사들이 나와 통일왕국의 왕으로 세운 이야기입니다.

1절 “다윗이 기스의 아들 사울로 말미암아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에” 역대기는 사울이 어떻게 해서 왕이 되었으며, 어떻게 통치를 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울의 죽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1절은 사울로 인해서 다윗이 숨어 있어야 했다고 합니다. 사울은 왕이고 다윗은 도망자입니다. 그런데 도망자로 숨어 있는 다윗에게 용사들이 나온 것입니다. 그것도 2절 “베냐민 지파 사울의 동족”입니다. 우리나라도 지역 성향이 강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자파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사울이 베냐민 지파이고, 그렇다면 베냐민 지파가 전폭적으로 사울을 지지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상당수가 다윗에게 나옵니다.

16절도 “베냐민과 유다 자손 중에서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오매”라고 하면서 베냐민 지파가 다윗에게 나왔음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윗이 속한 지파인 유다 지파와 함께 나왔다고 합니다. 이처럼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가 왕의 자리를 놓고 갈등 관계가 아니라 하나됨을 이루었음을 강조합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다윗에게 나왔다는 것은 이들이 지역감정이나 혈연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있는지를 깨닫고 순종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런 깨어있는 생각, 바른 생각들이 다윗이 통치하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8절은 “갓 사람 중에서 광야에 있는 요새에 이르러 다윗에게 돌아온 자”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 용사들이 얼마나 용맹스러운지를 “그의 얼굴은 사자 같고 빠르기는 산의 사슴 같으니”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윗에게 나온 때는 다윗이 “광야 요새”에 있을 때입니다. 1절에 나온 용사들은 다윗이 “시글락에 숨어 있을 때”였고, 16절도 “요새”에 있을 때이며, 20절도 “시글락”에 있을 때입니다. 즉 이들은 왕이 된 다윗이 아닌, 도망자였던 다윗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어려운 환경이요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이지만 마음을 다윗에게로 향하고 충성했던 용사들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 하나님 나라로 든든히 세워져 갑니다.

베냐민 지파와 유다 지파 용사들이 함께 다윗에게 나오자 다윗이 묻습니다. 17절 “만일 너희가 평화로이 내게 와서 나를 돕고자 하면 내 마음이 너희 마음과 하나가 되려니와” 도망자인 다윗을 사울에게 넘기려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지금도 다윗은 이들이 가까이 다가와 자신을 배신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합니다. 그러자 우두머리인 아마새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이렇게 답합니다. 18절 “다윗이여 우리가 당신에게 속하겠고 이새의 아들이여 우리가 당신과 함께 있으리니 원하건대 평안하소서 … 이는 당신의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심이니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알았고, 그런 다윗과 함께 하기를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의 위대한 나라를 이룬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22절)

대표적인 이야기가 19절에 나옵니다. 이 한 절은 삼상29장을 요약해 놓은 내용입니다. 다윗이 사울의 추격으로 이스라엘에 남아 있을 수 없어 블레셋으로 망명합니다. 이때 블레셋 왕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다윗이 함께 출정하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자칫 다윗의 손으로 사울 왕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장수들이 거세게 반대합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배신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전쟁에 함께 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전쟁에 참가한 것만으로도 이스라엘 왕으로서 오점을 남기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막으셨습니다.

22절 “그 때에 사람이 날마다 다윗에게로 돌아와서 돕고자 하매 큰 군대를 이루어 하나님의 군대와 같았더라” 다윗과 함께 하시니, 비록 도망자의 신세이지만 돕는 용사들이 늘어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어떤 환경에서도 승리합니다.

23절부터는 헤브론에서 다윗을 통일왕국의 왕으로 추대할 때 나온 각 지파 용사들의 숫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부분을 알기 위해서는 다윗이 속한 유다 지파의 숫자와, 다른 지파 특히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 숫자를 비교하면 됩니다. 24절 유다 지파 용사 숫자는 6,800명입니다. 그런데 30-31절 에브라임 용사 숫자는 20,800명입니다. 므낫세는 18,000명입니다. 유다 지파에 비해서 아주 많은 숫자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유다 지파만의 지지를 받은 것이 아니라 온 이스라엘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왕이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38-40절은 사흘 동안 진행된 왕 즉위식 잔치를 설명하는데, 38절 “다 한 마음으로 다윗을 왕으로 삼고자 하여”라며 “한 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40절 하 “이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기쁨이 있음이었더라”로 마칩니다.

다윗이 통일왕국을 이룹니다.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갑니다. 이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가능합니다. 또한 다윗이 사람들을 사랑하는 좋은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에게 나온 용사들의 충성스러움, 환경과 상황을 뛰어넘는 충성이 모아져서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어 갑니다.

빌립보서2:19-30절/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25.05.27)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19절)

사도 바울은 앞부분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기 위함입니다(14).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빌립보교회에 사역자를 보내기를 원하는데, 디모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보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에바브로디도를 보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상당히 길게 설명합니다. 읽다 보면 에바브로디도로 인해 빌립보교회 안에 어떤 문제가 발생한 것 같고, 그것을 염려한 바울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19절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이라고 합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 소식을 들은 것은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입니다. 그를 25절 하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즉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고 동시에 빌립보교회 소식을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빌립보교회를 향한 걱정이 생긴 듯 합니다. 그래서 “속히”(19,24)라는 단어를 사용해 디모데를 보내기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직접 가기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디모데를 선택했을까요? 20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합니다. 빌립보교회에 문제가 있는데, 교회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유익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잘 처리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핵심은 “진실한 마음”입니다. 자기 유익이나 자기 영광을 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일에 적임자가 디모데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일, 예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 일, 즉 이익과 영광을 구합니다. 지금도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교회를 흔들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들은 교회 문제에 개입해서 이득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뜻만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예수님의 일을 구하는 자요, 교회를 생각하는 자요, 특별히 바울과 뜻을 같이하는 자입니다. 디모데는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이런 성숙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영적인 아들로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처럼 신실한 사역자 디모데를 빌립보교회로 보내기를 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가서 사정을 듣고 성도들을 위로하고 해결책도 제시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지만 교회를 향한 바울의 사랑과 열정이 놀랍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29절)

바울은 장기적으로는 디모데를 보내려고 하지만, 지금 바울이 보내려는 사람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그래서 25절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바울의 소개처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자, 즉 빌립보교회에서 모아진 선교헌금을 바울에게 전달하고 교회 소식을 전해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너희 사자”라고 합니다. 여기 사자는 원어로 ‘사도’인데 한마디로 빌립보교회 사역자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잘 알고, 교회로 돌아가 성도들을 만나는 것이 마땅한데 왜 여기서 이렇게 길게 소개를 하고 설명을 하는 것일까요?

본문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 에바브로디도 때문에 교회에 갈등이 생긴 듯 합니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로 인한 갈등은 심각한 문제로 확대될 수 있습니다. 문제점을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26절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었습니다. 27절을 보면 죽음에 이르는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그것도 바울에게 선교헌금을 전달한 후 이런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근심이 컸습니다. 그런데 26절 하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고 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면 교회가 근심하고 기도해주어야 할 것인데, 에바브로디도가 심히 근심합니다. 여기 “근심”이라는 단어는 심각한 정신적인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런 근심의 이유가 자신이 병든 것을 교회가 알았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선교헌금을 가지고 멀리 있는 바울에게 간다고 했을 때 건강에 문제가 있었는지, 아니면 연약한 상태였는지 알 수 없지만 교회 안에서 다른 사람을 보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을 사랑하고 섬기고 싶은 마음에 자신이 감당하겠다고 했는데, 긴 여행의 피로 때문인지 병들게 되었고 사경을 헤매게 된 것입니다. 이 소식을 교회가 들었을 때 분명 두 가지 소리가 있었을 것입니다. “거 봐라, 왜 우리 말 안듣고 고집을 피우더니 이렇게 되지 않았느냐?”, 다른 한편에서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그런 것이냐? 바울의 사랑하는 마음으로 갔다가 병에 걸린 것이니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그냥 예를 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서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분쟁으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특히 바울 자신을 긍휼히 여기셔서 고쳐주심으로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다고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도우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에바브로디도가 가면 기쁨으로 맞이해서 자신이 근심하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책망이나 비난 대신 29절 하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30절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이것이 에바브로디도 질병에 대한 바울의 시각이고 해석입니다. 누군가는 문제라고 하지만, 사실은 목숨을 돌보지 않고 자신을 섬긴 것이며, 그것은 빌립보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해서 감당한 것이므로 오히려 감사하고 격려해야 할 일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모든 일에는 시각이 중요합니다. 해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관점, 은혜의 시각이 필요합니다. 특히 교회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감당하는 신앙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