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2:1-20절/큰 기쁨의 좋은 소식(25.02.11)

누가복음2:1-20절/큰 기쁨의 좋은 소식(25.02.11)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7절)

 

1장은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요한의 탄생 이야기가 중심이었다면 2장은 드디어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천사는 이미 마리아에게 이렇게 알렸습니다. 1:31-32절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어질 것이요” 그렇습니다. 태어나실 예수님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영원하신 주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인간의 몸을 입으십니다. 그렇다면 영원하신 성자는 어디에서 태어나셔야 하며, 누구의 환영을 받아야 할까요? 당연히 가장 좋은 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의 화려한 축하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반대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때 세상을 다스리던 자는 로마제국의 아구스도 황제입니다. 그가 내린 명령은 1절 “천하로 다 호적하라”입니다. 한마디로 인구 조사를 실시하는 것인데, 목적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인들도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고향으로 돌아가 호적을 합니다. 요셉은 다윗의 집 족속이기에 살던 곳인 갈릴리 나사렛을 떠나 베들레헴을 향하여 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예수님께서 태어나십니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슬픔의 땅입니다. 창35:19절을 보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죽자 베들레헴에 묻었습니다. 삿19장에는 비극적인 사건인 레위인의 첩 사건이 나오는데,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여인의 고향이 베들레헴입니다. 이런 베들레헴이 미가5:2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는 예언이 있습니다. 가장 작은 곳, 슬픔의 땅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 메시아가 탄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예언이 성취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이처럼 슬픔의 장소가 10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장소가 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도착했을 때 마리아는 아이를 출산하게 됩니다. 세상 황제의 통치 아래서 가장 보호를 받아야 할 산모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거기다 이 가정이 머물 객실이 없어서 아이를 낳았는데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다고 합니다. 당시는 나귀나 말을 키우는 공간과 사람이 거주하는 공간이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세상 임금이 머무는 화려한 궁궐과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뉘이신 구유가 대조를 이룹니다. 이는 앞으로 예수님께서 어떤 사역을 이루어가실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낮은 곳으로 가시고, 소외되고 버림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들의 소망이 되실 것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14절)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자들도 밤중에 밖에서 양을 지키는 목자들이었습니다. 마태복음은 동방의 박사들이 예수님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는데 누가복음은 당시 낮은 신분인 목자들이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목자들에게 주의 사자가 나타나 주의 영광을 비춥니다. 목자들은 놀라고 무서워합니다. 이때 천사가 말합니다. 10절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해줍니다.

7절까지의 내용은 가장 슬픈 소식입니다. 산달이 임박했음에도 황제의 명령을 따라 호적을 하러 가야하고,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출산을 하게 되며 좋은 방이 없어 짐승과 함께 머무는 곳에서 아이가 태어나 구유에 뉘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천사는 이 일이 “큰 기쁨의 소식”이라고 합니다. 이유는 태어나신 분이 바로 예수님,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고 합니다. 여기 “구주”, “주”라고 하는데 태어나신 예수님이 “주인”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당시는 당연히 황제를 ‘큐리오스’, 즉 ‘주’라고 고백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황제가 아닌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예수님이 주인으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1:78-79의 말씀 처럼 돋는 해처럼 떠올라서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출 것입니다. 빛으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평강으로 채워주십니다. 목자들이 경험한 것도 그렇습니다. 어둔 밤에 주의 영광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무섭고 두려워하는 자들에게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실 일을 보여줍니다. 목자들에게는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이가 표적이 됩니다.

이 소식을 전하고 수많은 천군 천사가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14절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이 장면을 상상해보면 얼마나 놀라운 광경이며,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모습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을 수많은 천군 천사가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라고 찬양합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께 영광일까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영원하신 주님이 인간의 유한한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고, 한 여인의 배속에 머무시다고 갓난 아이의 몸으로 이 땅에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이신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분은 결국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짊어지실 것입니다. 이 일을 아버지 하나님께서 주도하셔서 진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가장 큰 슬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사람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의 종노릇하며 신음하는 백성들을 외면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꺼이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구원하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평화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친정한 목자가 되십니다. 주인이 되십니다. 빛과 생명이 되시고 평화가 되십니다. 슬픔의 변하여 큰 기쁨이 되게 하십니다. 주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서 주님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는 삶이 됩시다.
[출처] 누가복음2:1-20절/큰 기쁨의 좋은 소식(25.02.11)|작성자 늘봄교회

여호수아14:1-15절/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25.01.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2절)



14-19장까지는 요단 서편 땅 분배에 관한 내용입니다. 가장 먼저 14장에서 갈렙이 땅을 분배 받고, 이어 15장은 유다 지파가, 16-17장은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그리고 18-19장은 나머지 일곱 지파가 분배받는 내용입니다.

요단 동편은 모세가 가족의 숫자를 따라서 분배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요단 서편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나눌까요? 1절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족장들이 분배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지도자인 여호수아가 분배한 것이 아니라, 제사장 엘르아살와 여호수아 그리고 12지파 족장들이 함께 분배하였습니다. 가장 먼저 제사장의 이름이 언급된 것을 보면 지금까지 땅을 차지하는 과정도 하나님의 전쟁이었던 것처럼, 땅을 분배하는 것도 신앙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하나님이 주인되시는 땅입니다.

분배 기준은 “제비뽑기”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민34:13절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이는 너희가 제비 뽑아 받을 땅이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아홉 지파 반 쪽에게 주라고 명령하셨나니”라고 합니다. 5절도 다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과 같이 행하여 그 땅을 나누었더라”고 합니다. 힘들게 차지한 땅입니다. 어떤 땅을 차지하느냐가 지파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비뽑기를 통해 모든 과정과 결과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분배에 대한 설명 중에 다시 레위 지파와 관련된 내용이 두 번 반복됩니다. 강조점은 3절 하 “레위 자손에게는 그들 가운데에서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4절 “이 땅에서 레위 사람에게 아무 분깃도 주지 아니하고”입니다. 13장에서도 두 번이나 레위 지파 관련된 내용이 나왔습니다(13:14,33). 13장에서는 레위 지파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지 않고 화제물이 기업이 되며, 하나님께서 기업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14장에서는 기업을 주지 않았다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지금 땅을 분배받는 12지파가 레위 지파의 기업을 책임져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스라엘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말씀 공동체입니다. 이 중요한 사명을 맡은 이들이 레위 지파입니다. 그렇다면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는 12지파가 레위 지파를 하나님께서 명령한 방법대로 기업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채워주어야 합니다.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복된 공동체로 세워지는 길입니다. 만약에 나만 잘 살겠다고, 풍요 누리겠다고 외면한다면 결국 이스라엘은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질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실패하는 길입니다. 이런 일들이 안타깝게도 말라기 시대에 일어납니다. 예배가 무너지고 신앙은 형식화되고, 영적인 어둠이 가득합니다. 그래서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서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만 편하고 잘 살겠다고 살아간다면 사실은 모두가 실패하는 길입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을 수고스럽지만 감당하며 서로를 세워줄 때 함께 복된 삶이 됩니다. 우리의 작은 헌신과 희생을 통해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풍요를 누립니다.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12절)



가장 먼저 땅을 분배받는 사람은 갈렙입니다. 한 지파가 아닌 한 사람이 먼저 분배받는 것이 특이합니다. 그런데 이유가 있습니다. 갈렙은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했던 믿음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갈렙은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와 45년 전 모세가 했던 약속을 이야기합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12정탐꾼 사건입니다. 그때 갈렙의 나이 40세였습니다. 각 지파의 대표들이 선발되어 가나안 땅을 정탐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동행했습니다. 그런데 40일 정탐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보고 내용이 나뉩니다. 10명의 정탐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했습니다. 가나안 땅 차지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민14:8-9절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본문 7절에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라고 합니다. 또한 8절은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갈렙은 하나님께 충성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약속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45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10절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라고 합니다. 자신이 생명을 유지한 것 역시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시기 위함임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45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85세가 되었습니다. 분명 육신의 노쇠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갈렙의 믿음은 더욱 견고합니다. 더 확신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이가 문제가 아니요 믿음이 문제임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요청합니다. 12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갈렙이 요청한 땅을 헤브론입니다. 유다 지파에 속한 땅입니다. 그런데 갈렙은 차지하기 쉽지 않은 땅을 요청합니다. 12절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이 두려워했던 아낙 자손이 있는 땅, 크고 견고한 성읍입니다. 하지만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말씀하신 대로 물리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4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확신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이런 갈렙이 가장 먼저 기업을 차지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14절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우리의 신앙이 갈렙과 같기를 소망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견고하고 확신 넘치는 신앙, 육신은 늙어가지만 영적으로는 더 생명력 넘치는 신앙, 언제나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누리는 신앙이 됩시다.
[출처] 여호수아14:1-15절/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25.01.22)|작성자 늘봄교회

여호수아15:1-19절/내게 복을 주소서(25.01.23)

●“또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제비 뽑은 땅의”(1절)



땅 분배가 시작된 13장은 요단 동편 땅이, 14장은 가장 먼저 갈렙이 땅을 분배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갈렙의 이야기는 오늘 본문에 다시 등장합니다. 갈렙의 신앙을 귀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어서 15장부터 본격적으로 각 지파에 대한 분배가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분배받는 지파는 누구일까요? 바로 유다 지파입니다. 첫 번째로 분배를 받는다는 것은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중심 지파임을 알게 합니다. 광야를 행진할 때도 유다 지파가 앞장섰습니다.

이미 창49:8-12절에는 야곱이 유다에게 남긴 유언이자 축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창49:10절은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라고 합니다. 유다 지파에서 통치자가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언처럼 유다 지파에서 위대한 왕인 다윗이 등장하고,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야곱의 아들 중 하나님께서 장자로 인정하신 아들은 “요셉”입니다. 그래서 요셉의 두 아들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한 지파씩을 차지합니다. 대신 중심이 되는 지파는 유다 지파입니다.

유다 지파가 제비를 뽑아 분배받은 땅의 경계는 다른 어느 지파보다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남쪽은 에돔에 이르고 동쪽은 염해입니다. 그런데 5-12절까지는 북쪽 경계에 대한 내용이 아주 길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염해 바로 위에 자리하고 있는 6절 “벧 호글라”에서부터 경계를 따라 왼쪽으로 예루살렘(8), 기럇여아림(9), 벧 세메스(10), 에그론(11), 얍느엘(11)입니다.

북쪽 경계를 상세히 기록하는 이유는 다른 지파와 경계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한민족이니 적당히 서로 양보하면서 잘 살아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래서 분명한 경계를 정해주십니다. 내 땅의 경계가 중요하다면 다른 지파의 경계도 함부로 넘어서는 안 됩니다. 잘 지키는 것이 이스라엘 공동체가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땅의 경계를 묵상하다 보니 사람 사이의 경계를 생각하게 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넘지 말아야 할, 지켜야 할 경계가 있습니다. 친하다고 함부로 경계를 넘나들고, 해서는 안되는 말을 하게 되면 결국 관계는 깨지게 됩니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 경계를 잘 알고 지켜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중요합니다.



●“이르되 내게 복을 주소서”(19절)



13-19절까지는 다시 갈렙의 이야기입니다. 어제 본문 14:12절에서 이 산지를 달라고, 아낙 자손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쫓아낼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을 어떻게 완성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 “갈렙이 거기서 아낙의 소생 그 세 아들 곧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쫓아내었고”라고 합니다. 헤브론에 있었던 아낙의 세 아들 이름이 나옵니다. “세새, 아히만, 달매”. 이 이름은 민13:22절에도 나와있습니다. “그 곳에 아낙 자손 아히만과 세새와 달매가 있었더라”

민13장은 12정탐꾼이 가나안땅을 정탐한 내용인데 이 아낙자손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두려워했고 보고하면서 가나안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 결과 10명의 정탐들은 가나안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죽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만 들어왔습니다. 그때로부터 45년이 지났습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는 갈렙이 이들을 쫓아냅니다. 이렇게 쫓아낼 수 있는 대적들을 그때 두려워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오지 못했다는 사실, 가나안땅을 차지하기까지도 이렇게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에 대한 믿음입니다.

갈렙은 이어 드빌을 점령하는데 자신이 직접 나가지 않고 드빌을 점령하는 자에게 자신의 딸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고 합니다. 갈렙의 아우요 그나스의 아들인 옷니엘이 등장해서 드빌을 점령합니다. 옷니엘은 사사시대 첫 번째 사사로도 활동합니다. 약속대로 갈렙은 악사를 옷니엘에게 아내로 줍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인 18-19절 내용이 모호합니다. 악사가 출가하면서 남편에게 이야기해서 아버지 갈렙에게 “밭을 구하자”라고 합니다. 또한 자신은 아버지를 찾아갑니다. 갈렙이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19절 “내게 복을 주소서”라고 하면서 “샘물도 주소서”라고 합니다. 그러자 갈렙이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다라는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일까요? 15:1-12절까지는 유다 지파의 경계에 대한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63절은 유다 지파 성읍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사이에 13-19절의 갈렙과 옷니엘 그리고 악사의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이 내용은 분배받은 땅들을 어떻게 차지해야 하는가? 과연 어떤 사람이 복을 누리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앞으로 분배받은 땅을 정복해야 할 다른 지파들에 모범을 삼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갈렙은 14:12절에서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했고, 악사는 “밭을 주소서, 복을 주소서, 샘을 주소서”라고 합니다. 아버지 갈렙의 “이 산지를 주소서”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리고 받아 누립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두려움 가운데 나를 작게 여기는 자가 아니라 어떤 장애물과 문제 앞에서도 승리를 확신하는 자들입니다. 믿음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니다.
[출처] 여호수아15:1-19절/내게 복을 주소서(25.01.23)|작성자 늘봄교회

여호수아15:20-63절/유다 지파 성읍들(25.01.24)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기업은”(20절)

어제 본문 15:1-12절까지는 유다 지파가 받게 될 땅의 경계를 설명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기업으로 받게 될 성읍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유다 지파에 대해서 특별히 많은 분량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대표 지파임을 보여줍니다. 성읍의 목록을 구분하면 20-32절까지는 남부지역의 성읍들, 33-47까지는 평지의 성읍들, 48-60까지는 산지의 성읍들, 그리고 61-62절은 광야의 성읍들입니다. 그리고 평지와 산지의 성읍들은 그 가운데서도 나누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 성읍과 그 마을들이었으며”가 반복됩니다(36,41,44,46,51,54,57,59,60).

이렇게 기록된 성읍의 숫자를 세어보면 122개라고 합니다. 이 성읍들 전부를 읽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1-12절까지 경계를 이미 설명했으니, 세세한 성읍 이름들은 생략하고 그 경계 안에 있는 모든 성읍이 유다 지파의 기업이라고 해도 될텐데, 왜 이렇게 길게 기록하는 것일까요?

유다 지파에게는 이 성읍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또한 이 많은 성읍들이 자동적으로 기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통해 차지해야 합니다. 이미 13:6절에서 각 지파들이 분배 받은 땅을 어떻게 차지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아 있는 가나안족속들 쫓아내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각 지파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성읍들을 직접 정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기록된 하나하나의 성읍 이름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이름들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보면 많은 성읍은 유다 지파에 주어진 축복이면서 동시에 사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축복과 사명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명이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에는 관심이 많지만 사명은 외면합니다. 축복을 주시면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해서 사명을 감당할 때 그것이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복이 진정한 복입니다.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63절)

이렇게 유다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는데 마지막 절이 어떻게 끝나면 좋을까요? 완전히 차지했다는 내용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63절은 다른 결말입니다.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고 합니다. 지도를 보면 예루살렘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경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이어지는 분배 과정을 보면 다른 지파들도 쫓아내지 않았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분명 힘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승리를 확정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 대신 타협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지역 차지했으니 작은 부분 한두군데 차지하지 않아도 별 문제 없을 것이다, 혹은 가나안 사람들 살려두어 노예로 부리면 서로 좋은 것이 아닐까하는 안일한 생각이 자리잡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결국 이스라엘을 점점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해서 완전히 정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5장 앞부분 경계 설명과 뒷부분 성읍 설명 사이에 갈렙에 대한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갈렙을 모범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옷니엘과 악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 신앙에 적용해보면, 우리에게도 쫓아내야 할 옛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반복하는 죄악과 태도들이 있습니다. 작은 것이라고 외면하면 안 됩니다. 이 작은 것이 반복되면서 우리 삶과 신앙을 흔들고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점검하고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영적 싸움을 계속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여호수아23:1-16절/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25.02.0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3절)

여호수아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23-24장은 여호수아의 고별설교입니다. 본문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가 반복됩니다(1,2,14). 죽음을 앞두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내용을 설교를 통해 전달합니다. 23장의 고별설교는 대상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고, 24장의 고별설교는 세겜에서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설교합니다.

1절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오래 전에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12: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과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신실하게 성취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일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직접 체험한 것을 설명합니다. 본문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3,5,8,10,11,13,14,15,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특히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신 하나님이십니다(3,10). 그것을 이스라엘은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전쟁을 승리케 하셨고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아직 완전히 정복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승리의 출발은 하나님께서 너희(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함으로 살아갑시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8절)

그렇다면 이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여호수아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말씀으로 약속하셨고, 말씀대로 일하시고, 앞으로도 말씀대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역시 신실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6절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 않는 겁니다.

이 말씀은 수1:7절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가나안 땅에 정복하기 이전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군사적인 준비가 아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처한 현실과 동떨어져 보입니다.

그런데 23장에 와서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셨고 이루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경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차지한 가나안 땅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형통케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절대 우로나 좌로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유혹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유혹이 많습니다. 우리를 흔들려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공존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섬기던 신을 함께 섬기자고 유혹하고 더불어 혼인하고 왕래하며 살자고 합니다(12). 하지만 이것은 공존의 길이 아닌 멸망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신실함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오직 이스라엘은 8절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는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12절처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우로나 좌로 치우쳐 가나안 백성들과 함께 하면, 그들이 올무가 되며, 덫이 되고 채찍과 가시가 될 것입니다. 그 결과 13절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16절에서도 다시 반복합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시점에서 기억할 것은 14절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하나도 어김없이 이루어졌음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선한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불길한 말씀 역시 하나도 틀리지 않고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의 걱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약속의 땅, 아름다운 땅을 차지한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내야 할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주인 삼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