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15:20-63절/유다 지파 성읍들(25.01.24)

●“유다 자손의 지파가 그들의 가족대로 받은 기업은”(20절)

어제 본문 15:1-12절까지는 유다 지파가 받게 될 땅의 경계를 설명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기업으로 받게 될 성읍들의 이름이 나열됩니다. 유다 지파에 대해서 특별히 많은 분량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유다 지파가 이스라엘 대표 지파임을 보여줍니다. 성읍의 목록을 구분하면 20-32절까지는 남부지역의 성읍들, 33-47까지는 평지의 성읍들, 48-60까지는 산지의 성읍들, 그리고 61-62절은 광야의 성읍들입니다. 그리고 평지와 산지의 성읍들은 그 가운데서도 나누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 성읍과 그 마을들이었으며”가 반복됩니다(36,41,44,46,51,54,57,59,60).

이렇게 기록된 성읍의 숫자를 세어보면 122개라고 합니다. 이 성읍들 전부를 읽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1-12절까지 경계를 이미 설명했으니, 세세한 성읍 이름들은 생략하고 그 경계 안에 있는 모든 성읍이 유다 지파의 기업이라고 해도 될텐데, 왜 이렇게 길게 기록하는 것일까요?

유다 지파에게는 이 성읍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또한 이 많은 성읍들이 자동적으로 기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을 통해 차지해야 합니다. 이미 13:6절에서 각 지파들이 분배 받은 땅을 어떻게 차지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리니 너는 내가 명령한 대로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기업이 되게 하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남아 있는 가나안족속들 쫓아내 주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각 지파들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을 확신하고 성읍들을 직접 정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에 기록된 하나하나의 성읍 이름은 이스라엘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이름들입니다.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보면 많은 성읍은 유다 지파에 주어진 축복이면서 동시에 사명입니다.

그렇습니다. 축복과 사명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명이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축복에는 관심이 많지만 사명은 외면합니다. 축복을 주시면 사명을 감당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해서 사명을 감당할 때 그것이 축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복이 진정한 복입니다.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63절)

이렇게 유다 지파에게 기업을 분배하는데 마지막 절이 어떻게 끝나면 좋을까요? 완전히 차지했다는 내용이 나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63절은 다른 결말입니다. “예루살렘 주민 여부스 족속을 유다 자손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유다 자손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니라”고 합니다. 지도를 보면 예루살렘은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 경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을 쫓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시작해서 이어지는 분배 과정을 보면 다른 지파들도 쫓아내지 않았다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쫓아내지 못했을까요? 분명 힘이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이미 승리를 확정지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순종 대신 타협을 했습니다. 대부분의 지역 차지했으니 작은 부분 한두군데 차지하지 않아도 별 문제 없을 것이다, 혹은 가나안 사람들 살려두어 노예로 부리면 서로 좋은 것이 아닐까하는 안일한 생각이 자리잡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 이 정도면 괜찮겠지라는 생각이 결국 이스라엘을 점점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해서 완전히 정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15장 앞부분 경계 설명과 뒷부분 성읍 설명 사이에 갈렙에 대한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갈렙을 모범으로 제시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옷니엘과 악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 신앙에 적용해보면, 우리에게도 쫓아내야 할 옛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반복하는 죄악과 태도들이 있습니다. 작은 것이라고 외면하면 안 됩니다. 이 작은 것이 반복되면서 우리 삶과 신앙을 흔들고 무너뜨릴 수도 있습니다. 점검하고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영적 싸움을 계속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여호수아23:1-16절/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25.02.05)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3절)

여호수아서 마지막 부분입니다. 23-24장은 여호수아의 고별설교입니다. 본문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가 반복됩니다(1,2,14). 죽음을 앞두고 어쩌면 가장 중요한 내용을 설교를 통해 전달합니다. 23장의 고별설교는 대상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고, 24장의 고별설교는 세겜에서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설교합니다.

1절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하신 지 오랜 후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오래 전에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12: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아브라함과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신실하게 성취하십니다.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그리고 이 일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의 순종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직접 체험한 것을 설명합니다. 본문에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입니다(3,5,8,10,11,13,14,15,16).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특히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신 하나님이십니다(3,10). 그것을 이스라엘은 직접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전쟁을 승리케 하셨고 지파들에게 땅을 분배해 주셨습니다. 아직 완전히 정복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승리의 출발은 하나님께서 너희(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놀라운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날마다 기억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담대함으로 살아갑시다.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8절)

그렇다면 이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여호수아가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말씀으로 약속하셨고, 말씀대로 일하시고, 앞으로도 말씀대로 성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니 신실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스라엘 역시 신실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6절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그 무엇보다 우선순위를 두고 집중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우로나 좌로 치우치지 않는 겁니다.

이 말씀은 수1:7절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가나안 땅에 정복하기 이전입니다. 전쟁을 앞두고 있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군사적인 준비가 아닌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처한 현실과 동떨어져 보입니다.

그런데 23장에 와서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했더니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셨고 이루셨습니다. 여호수아가 경험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차지한 가나안 땅에서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면 형통케 하십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절대 우로나 좌로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그 땅은 유혹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유혹이 많습니다. 우리를 흔들려는 것들이 많습니다. 가나안 백성들은 공존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섬기던 신을 함께 섬기자고 유혹하고 더불어 혼인하고 왕래하며 살자고 합니다(12). 하지만 이것은 공존의 길이 아닌 멸망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신실함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오직 이스라엘은 8절 “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가까이 하기를 오늘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는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만 가까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12절처럼 “너희 중에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가까이”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우로나 좌로 치우쳐 가나안 백성들과 함께 하면, 그들이 올무가 되며, 덫이 되고 채찍과 가시가 될 것입니다. 그 결과 13절 “너희가 마침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16절에서도 다시 반복합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시점에서 기억할 것은 14절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선한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고, 하나도 어김없이 이루어졌음을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선한 말씀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불길한 말씀 역시 하나도 틀리지 않고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죽음을 앞둔 여호수아의 걱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가장 복된 삶입니다.

약속의 땅, 아름다운 땅을 차지한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입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아내야 할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주인 삼고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여호수아24:1-18절/섬길 자를 택하라(25.02.06)

여호수아24:1-18절/섬길 자를 택하라(25.02.06)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1절)

23장에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했던 고별설교에 이어, 24장은 모든 백성들에게 합니다(2). 장소는 ‘세겜’입니다. 의미 있는 장소입니다. 창12:6-7절을 보면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고 합니다.

부름을 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가나안 땅인 세겜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당시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이루어졌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그 장소, 세겜에서 하나님과 다시 언약을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약속과 여호수아 시대 성취까지의 기간이 약 700여 년입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오셨습니다.

그 과정을 2-13절까지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며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거주하며 다른 신을 섬기고 있을 때 그곳에서 아브라함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삶이 아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 부르셨습니다. 오직 은혜의 선택입니다. 그리고 땅과 민족에 대한 약속을 주셨습니다. 자녀가 없는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약속하시고 100세의 나이에 이삭을 주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이삭은 야곱과 에서를 낳고 야곱의 자손들이 애굽으로 이주합니다.

다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십니다. 이를 위해 모세와 아론을 보내시고, 완악한 바로와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리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앞을 홍해가 가로 막았을 때 하나님은 추격하는 애굽 군대와 이스라엘 사이를 구름과 흑암으로 갈라 놓으시고(출14:20) 결국 애굽 군대를 바다에 빠지게 하십니다. 7절 하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의 눈이 보았으며 또 너희가 많은 날을 광야에서 거주하였느니라”고 합니다. 가데스 바네아 12정탐 사건으로 당시 20세 이상의 사람들은 광야를 40년 방황하다 죽었지만 20세 이하였던 세대는 출애굽의 기적들을 경험하였고 눈으로 직접 보았으며,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증인들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을 향해 이동할 때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브올의 아들 발람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하시고 오히려 축복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누구도 함부로 저주하거나 건들 수 없도록 인도하셨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약속하셨던 땅인 가나안땅을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12절은 “내가 왕벌을 너희 앞에 보내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나니”라고 합니다. 여기 ‘왕벌’은 대적들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 또한 하나님으로 인해 대적들이 느낀 공포와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을 보여집니다.

그러면서 역사의 회고 결론 부분에 반복되는 말이 “아니한”입니다(13). 칼이나 활로 승리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12). 수고하지 아니한 땅을 얻고, 건설하지 아니한 성읍을 얻었으며,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습니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 모든 것 이스라엘이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은혜를 회상하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도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기억하고 감사하며 은혜에 합당한 삶을 결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절)

여호수아가 이렇게 긴 역사를 요약하면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강조 한 이유는 14절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여호수아는 “경외하라, 섬기라, 다른 신들 치워버리라, 오늘 택하라”는 단어들을 사용해서 하나님만 섬기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여호수아의 염려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계속 우상과 함께 했습니다.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겼고, 애굽에서도 섬기던 신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거주하고 있는 가나안 땅은 극심한 우상숭배의 장소입니다. 약속의 땅을 차지한 이스라엘을 가장 위협하는 요소가 바로 하나님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땅을 차지한 것보다 이 땅에서 지속적으로 안식을 누리며 복된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15절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합니다. 여기 섬길 자를 택하라는 말은 우상을 선택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나온 역사를 돌아보면 절대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여호수아의 요청은 오직 하나님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를 강화시켜 줍니다. 그래서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합니다. “오직”,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삶이 복된 삶의 길입니다.

여호수아의 요청에 백성이 대답합니다. 16절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니” 여호수아처럼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겠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도 회복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회복의 시작은 베푸신 은혜에 대한 기억입니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만 선택하고 경외하며 섬기는 겁니다. 예배로 섬기고 말씀을 묵상함으로 섬기고, 말씀에 순종함으로 섬깁니다. 가장 복된 삶이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지속적으로 머무는 삶입니다.

여호수아21:1-19절/레위 사람의 성읍(25.01.31)

●“그 때에 레위 사람의 족장들이”(1절)

21장은 레위 자손이 거주할 성읍과 목초지를 분배받습니다. 이로써 가나안 땅에 대한 분배가 마무리됩니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정리해보면, 12장까지는 가나안 정복에 관한 내용이었다면 13장부터가 땅 분배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이미 분배된 요단 동편 땅에 대한 설명이 나오고 14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요단 서편 땅의 분배가 시작되는데, 가장 먼저 분배를 받은 사람이 갈렙입니다. 어떤 지파가 아닌 한 사람이 먼저 분배를 받는 것이 특이한데, 이유는 45년 전 갈렙이 가데스바네아에서 12정탐 중 한 사람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믿음의 보고를 했기 때문이고, 지금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렙에 이어 유다 지파가 땅을 분배받습니다. 그리고 요셉 자손, 즉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가 분배를 받는데 이들은 땅 분배에 대해 불평했습니다. 자신들이 큰 민족을 이루었는데 분배받은 땅은 작다는 겁니다. 이에 대해 여호수아는 “스스로 개척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다섯 지파가 분배를 받았고 나머지 일곱 지파가 아직도 분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18장을 보면 이들은 땅을 분배받는 일에 소극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일곱 지파에게 한 지파 당 세 사람씩을 선정해서 분배받을 땅을 두루 다니며 지도를 그려오라고 합니다. 그것을 가지고 제비를 뽑아 분배를 합니다. 베냐민 지파를 시작으로 모든 지파에게 땅 분배가 마무리됩니다. 그 가운데 시므온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은 유다 지파에 속한 땅입니다. 유다 지파는 자신들의 땅이 많기 때문에 시므온 지파와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지도를 보면 시므온 지파가 유다 지파 안에 속해 있습니다. 이런 유다 지파의 모습은 앞에서 분배받은 땅이 작다고 불평했던 에브라임 지파와 대조를 이룹니다.

이렇게 12지파에 대한 땅 분배가 마무리되자 하나님은 20장에서 도피성을 정하라고 하십니다.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시는지를 알게 합니다. 생명이 소중하기에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아야 합니다. 도피성은 20:3절 “부지중에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는 말씀처럼 고의가 아닌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들이 피의 보복자를 피해 도망할 수 있는 곳입니다. 고의로 사람을 죽인 자는 도피성으로 피한다해도 재판을 통해 범죄가 드러나면 도피성에 머물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갚아야 합니다.

이렇게 도피성으로 피한 자는 먼저 회중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 그의 범죄가 고의성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면 도피성에 머물게 됩니다. 언제까지 머무냐면 20:6절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주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는 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자기 성읍 자기 집으로 돌아갈지니라”고 합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의 죽음이 이 사람의 죄를 속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수로 죽인 것이지만 죄는 죄입니다. 그것을 속죄하는 것이 대제사장의 죽임이고, 이후에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자유를 주신 것과 같습니다.

도피성은 요단 동편에 세 개, 요단 서편에 세 개로 모두 여섯 개입니다. 위치가 흩어져 있어 하루 안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3절)

땅 분배 마지막으로 레위 사람이 나와 거주할 성읍과 목초지를 요구합니다. 그 근거가 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사 우리가 거주할 성읍들과 우리 가축을 위해 그 목초지들을 우리에게 주라 하셨나이다”입니다. 민35:1-8절에 보면 나와 있습니다. 이런 레위 사람의 요구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3절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자기의 기업에서 이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을 레위 사람에게 주니라”고 합니다. 12지파가 자신들의 성읍과 목초지를 주어 레위 사람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이렇게 레위 사람은 전국에 흩어져 생활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도록 했습니다. 레위 지파를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알고 바르게 섬기는 것이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의 성패를 좌우하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이스라엘은 레위 지파의 물질적인 부분을 책임지며 함께 살아갑니다.

4-7절은 레위 사람을 위한 땅 분배의 개요를 설명하고 8절부터는 세부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4-7절 각 절 끝에 나오는 성읍의 숫자를 다 합하면 48성읍입니다. 레위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핫(고핫)과 게르손 그리고 므라리입니다. 그핫 가족에 대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이 들어 있는데 이들이 먼저 분배를 받습니다. 유다와 시므온, 그리고 베냐민 지파 성읍 중 13성읍입니다. 이어 그핫 가족이 받은 성읍은 에브라임과 단, 므낫세 반지파 중에서 10성읍입니다.

게르손 자손은 잇사갈, 아셀, 납달리, 므낫세 반지파 중 13성읍이고, 마지막으로 므라리 자손은 르우벤과 갓, 스불론 지파 중에서 12성읍입니다. 대략 한 지파당 4성읍 씩, 도합 48성읍을 분배해주었는데, 납달리 지파는 3성읍을 분배했고 유다와 시므온이 9성읍을 분배했습니다.

도피성 제도와 레위 사람들이 흩어져 각 성읍에 거주하는 내용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내 생명이 소중하닥면 다른 사람의 생명 역시 소중하게 여기고 무고한 피를 흘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자신들의 기업을 내놓아 레위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겁니다. 레위인은 말씀을 책임지고, 이스라엘의 생활을 책임지며 함께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출처] 여호수아21:1-19절/레위 사람의 성읍(25.01.31)|작성자 늘봄교회

여호수아22:10-20절/요단 가에 쌓은 제단(25.02.03)

여호수아22:10-20절/요단 가에 쌓은 제단(25.02.03)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11절)

요단 동편 지파인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는 요단 서편을 차지하기까지 앞장 서서 싸우라는 자신들의 책임을 완수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이들을 축복하고, 권면하여 요단 동편으로 돌려보냅니다. 이렇게 아름답게 마무리가 되는가 싶은데,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여 이스라엘이 전쟁의 위기를 만납니다.

시작은 르우벤과 갓, 므낫세 반지파가 요단 동편으로 돌아가다가 쌓은 큰 제단 때문입니다. 10-12절에는 이 제단의 위치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요단 언덕 가”라고 하는데, 11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들은즉 이르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가 가나안 땅의 맨 앞쪽 요단 언덕 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 하는지라”고 합니다. 이 절은 “이스라엘 자손”과 요단 동편 자손을 구분합니다. 이런 구분이 오늘 본문에 계속됩니다. 13절에는 “이스라엘의 온 회중”과 “그들”을 구분하고, 16절은 “여호와의 온 회중”과 “너희”가 구분됩니다. 19절에서는 “너희의 소유지”(요단 동편)와 “여호와의 소유지”(요단 서편)가 구분됩니다. 문제가 발생하자 하나로 보였던 이스라엘에 구분이 생깁니다.

이런 구분 속에 제단을 쌓은 장소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쪽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을 보면 그들이 거주하는 요단 동편 땅이 아닌 요단 서편 땅에 제단을 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들의 땅도 아닌데 왜 요단 서편에 제단을 쌓은 것일까요? 제단은 제물을 드리기 위해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데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성막에서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레17:8-9절). 지금 성막이 있는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는 ‘실로’입니다. 그러므로 요단 가에 쌓은 제단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가 아니라면 이 제단은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으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이런 불순종과 우상숭배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가져옵니다. 이미 그것을 여러 차례 경험했습니다. 그러니 전쟁을 해서라도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 전쟁을 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바로 전쟁하지 않고 대표단을 파견해서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고자 합니다. 자신들의 판단이 맞다고 생각되지만 혹시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기에 주의를 기울이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유가 드러나지만 만약에 이런 과정이 없었더라면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정착하지마자 동족끼리 전쟁을 하는 비극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파견단의 대표는 비느하스입니다. 17절에도 나오는 브올의 사건 때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했던 인물입니다. 민25장의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고 있을 때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고 우상 숭배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게 한 사람이 비느하스입니다. 민25:11절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비느하스와 더불어 서편 지파에서 각 한 사람씩 10명의 지도자들이 함께 합니다.

우리 삶의 많은 문제도 오해로 인해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판단과 이해가 사실과 다른 경우들이 많습니다.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행동하므로 얼마나 많은 갈등이 발생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서 교훈을 얻어야 겠습니다. 내 판단이 서더라도 주의 깊게 알아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19절)

대표단은 요단 동편 지파들을 만나 책망합니다. 16-18절이 그 내용인데 반복되는 말이 하나님께 범죄, 여호와께 거역, 여호와를 배반입니다(16,18,19). 이렇게 제단을 마음대로 쌓는 행동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요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그 예를 17절에서 브올의 사건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오늘까지 우리가 그 죄에서 정결함을 받지 못하였거늘 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우상숭배와 음행의 유혹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20절에는 아간의 범죄도 거론합니다. 7장에 나온 것처럼 아간 한 사람의 탐심으로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군사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아직도 가나안땅 완전히 정복하려면 계속 전쟁을 치러야 하는데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합니다. 19절 ”그런데 너희의 소유지가 만일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여호와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와 우리 중에서 소유지를 나누어 가질 것이니라“고 합니다. 여기서도 서편 땅과 동편 땅을 구분합니다. 동편 땅은 하나님의 임재이 상징인 성막이 없기에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된다면, 서편 하나님의 성막이 있는 여호와의 소유지로 건너오라고 합니다. 그러면 기꺼이 소유지를 나누어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자고 합니다.

본문을 보면 요단 서편 지파들이 하는 구분이 그렇게 바람직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제시한 제안은 아름답습니다. 요단 서편 땅을 분배할 때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땅이 작다고 불평했습니다. 후에 일곱 지파가 받은 땅은 크지 않은 땅들입니다. 유다는 시므온에게 이미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땅을 양보해서라고 함께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기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며 문제만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혼란에 빠집니다. 양보와 희생을 통해 함께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출처] 여호수아22:10-20절/요단 가에 쌓은 제단(25.02.03)|작성자 늘봄교회

여호수아 22:21-34/증거가 되는 제단 모형(25.02.04)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22절)

요단 동편 지파들이 돌아가면서 요단 언덕 가에 큰 제단을 세웠습니다. 이로인해 이스라엘은 전쟁의 위기를 만납니다. 전쟁 전에 이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비느하스를 중심으로 대표단이 파견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대화를 통해 오해가 풀어지는 내용입니다.
동편 지파들이 서편에서 파견된 대표단에게 설명합니다. 먼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22절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께서 아시나니”입니다. “전능하신 자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 속에 하나님의 이름이 세 번 들어가 있습니다. 특이한 표현입니다. “엘 엘로힘 야웨”입니다. 쉽게 번역하면 “여호와, 신들 중의 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 개가 들어가 있는 하나님의 이름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동편 지파들이 이렇게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이 얼마나 결백한지를 강력하게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이들이 제단을 세운 이유는 서편 지파들의 판단과는 전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그래서 23절 “우리가 제단을 쌓은 것이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 함이거나 또는 그 위에 번제나 소제를 드리려 함이거나”라고 하면서 서편 지파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우상숭배를 위한 제단도 아니요, 성막 앞의 제단이 아닌 다른 제단을 만들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함도 아니라는 겁니다. 29절을 보면 동편 지파들도 분명하게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은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성막 앞에 있는 제단”에서만 드려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심각한 오해를 불러 일으킬 제단을 쌓은 이유가 무엇인가? 24절 “우리가 목적이 있어서 주의하고 이같이 하였노라 곧 생각하기를 후일에 너희의 자손이 우리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라고 설명을 시작합니다. 여기 사용된 단어가 “목적이 있어, 주의하고, 생각하기를”입니다. 이들은 깊이 생각했습니다. 주의했습니다. 그럼에도 목적이 있어 이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편 지파들이 보았을 때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생각 없이, 갈등을 불러 일으킬 일을 행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내 판단과 생각이 맞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이런 과정 통해 서로의 마음을 알아가는 시간이 없었더라면 어떤 비극이 일어났을지 생각만해도 끔찍합니다.
우리가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겪는 갈등이 이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상대방도 깊이 생각하고 하는 행동과 말인데, 입장과 상황이 다르다 보니 우리의 생각과 다른 경우들이 있습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알아보지 않고 판단하고 행동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유 때문인지 묻고 듣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너희 사이와 우리의 후대 사이에 증거가 되게 할 뿐으로서”(27절)

요단 동편 지파들의 걱정은 지금 당장이 아닌 후일에 대한 것입니다(24,28). 후손들에 대한 것입니다. 미래세대의 신앙을 생각해서 한 행동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들의 행동은 칭찬해야 마땅합니다. 동편 지파들의 걱정은 이것입니다. 지형적으로 요단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이 나뉘는데, 시간이 흐르면 남남처럼 살게 되지 않을까입니다.

서편 지파들이 24절 하 “너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혹은 25절 “여호와께서 우리와 너희 사이에 요단으로 경계를 삼으셨나니 너희는 여호와께 받을 분깃이 없느니라”라고 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걱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우리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세대까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이 가장 중요한데, 요단이라는 경계 때문에 후에 하나님을 신앙하는 일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깊고 지혜로운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알고 보니, 서편 지파들의 생각이나 동편 지파들의 생각이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 겉으로 표현되는 내용이 달랐을 뿐입니다. 서편은 성막이 있기에 그곳을 중심으로 잘 섬기면 됩니다. 하지만 동편은 후대에 서편 지파들이 하나님 섬기는 것 금지하지 못하도록 눈에 보이는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단 모형을 세운 것입니다.

본문에 “증거”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27,28,34). 특히 34절에서는 세운 제단 이름을 “엣”이라고 하는데 의미가 “증인, 증거”입니다. 이렇게 분명한 증거가 되어야 하기에 요단 동편이 아닌 요단 서편 언덕 가에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아야 하기에 큰 제단을 만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신앙하는 상징물로 제단 모형을 만든 것이지요.

동편 지파들의 설명을 듣고 보니 이 일은 전쟁해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같은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기 위함입니다. 대표단이 듣고 기뻐합니다. 그리고 돌아와 서편 지파들에게 보고하니 33절 “그 일이 이스라엘 자손을 즐겁게 한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을 찬송하고”라고 합니다. 위기가 변하여 기쁨과 찬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기기 위한 같은 마음이지만 생각이 달라 오해가 발생하였습니다. 곧바로 전쟁하지 않고 서로 묻고 대답하므로 오히려 위기가 기쁨으로 변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미래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미리 해결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