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4절)
11장에서 예배의 질서를 다룬 바울은, 12장부터 14장까지 은사를 다룹니다. 그 유명한 사랑장인 13장이 바로 이 은사 이야기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은사를 길게 다룬다는 것은 곧 고린도 교회가 은사 때문에 문제를 겪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 문제의 중심에는 방언이 있었습니다.
1절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여기 ‘신령한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은사에 대해 바르게 알기를 원합니다. 먼저 성도들의 이전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2절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우상을 숭배했다고 하면 될 텐데, 굳이 “끄는 그대로 끌려갔다”고 표현합니다. 당시 이방 신전에서 사람들은 황홀경에 빠져 신비한 말과 행동을 쏟아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예수 믿기 전에는 그렇게 우상에 휘둘려 끌려다녔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것과 전혀 다른 일입니다.
어떻게 다를까요? 3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이 함께하시는 사람의 특징은 신비한 말과 행동이 아닙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1장에서 바울은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낌이 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율법에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 받았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저주받은 자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 하지 않고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의 주인, 내 생명과 시간과 소유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당시에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황제를 주로 인정하던 시대에, “내 주는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때론 목숨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른다면, 그것 자체가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십니다. 그런데 4-6절을 보면 바울이 같은 내용을 세 번에 걸쳐 독특하게 표현합니다. 4절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5절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6절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은사가 원어로 ‘카리스마’입니다. 이 단어는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에서 나왔습니다. 곧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은사를 ‘은사’, ‘직분’, ‘사역’으로 부르며, 그 주체를 각각 성령, 주(예수님), 하나님으로 말합니다. 곧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굳이 삼위 하나님을 다 언급할까요? 삼위 하나님은 서로 경쟁하지 않으십니다. 완전한 신뢰 가운데 하나를 이루십니다. 그런 삼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면, 그 은사는 마땅히 교회의 하나 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은사 때문에 경쟁과 분쟁이 생긴다면 그것은 은사를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11절)
7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유익은 내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유익입니다. 이것이 은사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은사는 내 자랑이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혼란에 빠진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자기 자랑과 영광을 구하느라 은사가 분열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11절도 중요합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우리가 받고 싶은 은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그분의 주권대로 각 사람에게 알맞게 나누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각자에게는 반드시 은사가 있습니다. 다만 자기 은사를 스스로 잘 모를 때가 있는데, 오히려 곁에 있는 이들이 정확히 알아보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은사를 나의 자랑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8-10절에서 바울은 은사의 종류를 열거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입니다.
몇 가지는 오해를 풀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와 지식의 은사는 세상의 똑똑함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는 자기들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다 혼란에 빠졌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은 말씀을 깨닫고 그것을 겸손히 삶에 적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은사도 특별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어떤 문제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확신을 뜻합니다. 보통 사람은 작은 문제에도 흔들리는데, 강해 보이지 않으면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은사입니다.
예언의 은사는 가장 많이 오해받습니다. 흔히 미래를 내다보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을 예언자라고 하고, 이들이 한 일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설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는 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 은사들을 말하며 바울이 거듭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7절 “성령을 나타내심”, 8절 “성령으로 말미암아”,“같은 성령을 따라”, 9절 “같은 성령으로”,“한 성령으로”, 그리고 11절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입니다. 다양한 은사가 있어도 그것을 주시는 분은 한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은사를 두고 누가 낫고 못하다며 경쟁하고 다투는 것은, 성령께서 은사를 주신 본래 뜻을 놓친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방언을 받으면 특별히 은혜받은 것이라 여겨 절제 없이 예배를 어지럽힌 것이 잘못된 모습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내게 주신 은사를 발견하여 공동체를 섬기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주셨으니, 내 은사가 무엇인지 기도하며 찾고, 모르겠다면 주변에 물어 발견하여, 그것으로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따라 섬길 때, 다른 사람은 힘들어하는 일도 기쁨과 감사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은사를 비교하거나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분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알맞게 선물로 주셨으니, 그것을 두고 자랑하거나 부러워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본래 하나 됨을 위한 것임을 기억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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