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4절)
12-14장까지 바울은 은사를 다룹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각 사람에게 필요를 따라 주권적으로 주시는 선물이며, 그 목적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있습니다. 은사를 말하는 12장과 14장 사이, ‘사랑’장인 13장이 놓여 있다고 했습니다. 은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고린도 교회 은사 문제의 진짜 핵심이 드러납니다. 바로 방언이었습니다.
1절 “사랑을 추구하며 신령한 것들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바울은 은사를 사모하라고 하면서도, 그보다 먼저 사랑을 추구하라고 합니다. 사랑이 없는 은사는 앞서 말한 대로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사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그 은사를 통해 사랑이 나타나고 있는가가 은사 자체보다 더 중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었습니다. 사랑 없이 은사를 자랑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대조합니다. 먼저 예언이 무엇인지 짚어야 합니다. 은사의 종류를 설명할 때도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예언은 미래를 점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설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나누는 것이 예언의 은사입니다. 이런 예언을 하라고 합니다.
왜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을 하라고 하는 것일까요? 방언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지만, 곁에 있는 사람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반면 예언은 알아들을 수 있기에 사람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합니다. 그래서 4절이 핵심입니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여기서 ‘덕을 세우다’라는 말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이 단어는 원어로 ‘오이코도메’인데, ‘집을 짓다’라는 뜻입니다. 건물을 한 층 한 층 쌓아 올리듯, 사람을 세워가고 공동체를 건축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언은 자기 자신을 세우지만, 예언은 교회라는 집을 함께 지어 올립니다. 은사를 주신 목적이 교회를 세우는 데 있다면, 공동체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예언이 더 중요합니다.
이 ‘세움(오이코도메)’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 거듭 등장합니다. 3절 “덕을 세우며”, 4절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5절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12절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17절 “다른 사람은 덕 세움을 받지 못하리라” 이 단어의 반복은 곧 고린도 교인들이 서로를 세우지 않고, 자기만 세우는 방식으로 은사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방언을 하지 말라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더구나 18절에서 바울은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합니다. 바울 자신이 누구보다 방언을 많이 했습니다. 방언을 못해서 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5절 뒷부분에서 조건을 답니다.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방언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도록 통역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유익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알아들을 수 없기에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아무리 유창한 방언이라도 공동체 안의 성도들이 알아 들을 수 없다면 무익하다는 겁니다.
●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15절)
바울은 이것을 자신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자신이 방언으로만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침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7-8절에서는 악기를 예로 듭니다. 피리나 거문고도 분명한 음을 내지 않으면 무슨 곡인지 알 수 없고, 나팔이 분명하지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준비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나팔로 전쟁의 신호를 보냈는데, 그 소리가 분명하지 않으면 아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9절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소리와 같습니다. 또한 11절은 서로 알아듣지 못하면 서로에게 외국인처럼 되고 만다고 합니다. 알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내용이 중요하기에 13절부터 예배의 실제 상황을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대표 기도를 하러 나온 사람이 방언으로 기도한다면 회중은 당황할 것입니다.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14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여기 ‘마음’은 ‘나의 생각’, 이성적 사고영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방언으로 기도할 때는 그 내용을 자기 머리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드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말로 기도하면 그 내용을 알기에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데, 방언은 그 이해가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5절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이런 의미입니다. 기도도 찬송도 영으로 하되 마음으로, 곧 그 뜻을 이해하며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찬송도 가사의 의미를 묵상하며 부를 때 은혜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방언으로 축복하고 감사하면, 곁에 있는 사람은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해 ‘아멘’ 할 수 없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면 그 감사에 동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19절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개인적으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을 바울은 막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알아들을 수 있는 다섯 마디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만 마디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방언을 신비한 은사라며 자랑하여 시도때도없이 떠들어대는 것보다 공동체의 성도들을 생각하며 유익이 되도록 은사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런 바울의 권면을 통해 고린도교회를 보면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사로 교회가 오히려 혼란과 상처 가운데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은사의 기초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은사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섬김이 사랑 위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 유익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은사는 나를 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세우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나의 덕을 세우는가, 아니면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를 물으며, 함께 모인 자리에서 서로를 세워가는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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