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6:1-12절/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26.06.29)

2026.06.29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1절)

고린도전서 마지막인 16장에서는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기근과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헌금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앞으로의 선교 계획입니다. 이 안에 은혜받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1절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연보’는 쉽게 말해 구제 헌금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 같은 지도자들이 기근으로 어려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헌금을 모아달라고 부탁했고(갈 2장), 바울은 그 일을 여러 교회에 알리며 고린도 교회에도 동참을 권한 것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줍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매주 첫날’은 주일을 가리킵니다. 부활 이후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주일에 모여 예배드렸습니다. ‘각 사람’은 몇몇이 아니라 모두가 빠짐없이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수입에 따라’는 더 정확히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신 대로”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인색하지 말고 그에 합당하게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 ‘모아 두라’고 한 것은, 미리 기억하여 준비하라는 권면입니다.

돈에 대한 이야기는 민감한 문제인데, 바울은 놀랍도록 당당합니다. 그 이유가 3절에 있습니다. “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여기 ‘은혜’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헌금인데, 바울은 그것을 ‘은혜’라고 부릅니다. 곧 영적인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손에 잡히는 은혜, 만질 수 있는 은혜를 베푸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흘러 나가 다른 형제의 필요를 채우는 것, 그것이 헌금입니다.

바울이 이 헌금을 부르는 방식은 그 외에도 풍성합니다. 다른 서신에서는 같은 헌금을 ‘코이노니아’(나눔, 사귐)라 부르기도 하고, ‘디아코니아’(섬김, 봉사)라 부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의 ‘연보’는 원어로 ‘로기아’인데, 이는 강제로 내야 하는 세금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더 드리는 헌금을 뜻합니다. 의무로 떠밀려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넘쳐 자원하여 드리는 것이 헌금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것을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은혜받은 성도의 마땅한 반응으로 봅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은혜를 누리려는 사람, 은혜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물질로, 헌신과 봉사로 가시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물질이 우리 시대의 주인이자 우상이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표현되지 않는 은혜가 과연 참된 은혜일까요. 물질로, 섬김으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참된 은혜이며, 그 은혜는 우리가 드린 것보다 더 풍성한 은혜로 우리 삶을 채웁니다. 바울은 그 확신이 있었기에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이 당당함은 6절에서도 드러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과 겨울을 함께 지내며 머물기를 원하면서, “너희가 나를 내가 갈 곳으로 보내어 주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당시 바울은 에베소에 있었고, 고린도에 들렀다가 다음 선교지로 떠나려 했습니다. 선교지로 가려면 물질과 후원이 필요한데, 그것을 고린도 성도들에게 담대히 요청합니다. 누군가의 복음 전파를 통해 은혜를 받았다면, 이제 그들도 누군가를 보내어 복음이 전해지게 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받은 성도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 “만일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7절)

5절부터 바울은 앞으로의 계획을 밝힙니다. 에베소에서 출발해 마게도냐를 거쳐 고린도로 가려는 여정입니다. 그런데 7절에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라노라” 바울은 나름의 계획이 있었지만, 모든 일이 하나님의 허락 안에서 이루어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고린도에 오래 머물기를 원한 것은, 교회의 많은 문제가 하루 이틀에 해결될 수 없어 직접 가르치고 바로잡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에베소에 머무는 이유를 말합니다. “내게 광대하고 유효한 문이 열렸으나 대적하는 자가 많음이라” 에베소는 복음 전파의 전초 기지와 같은 곳이어서, 여기서 복음이 힘 있게 퍼지면 놀랍게 확산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적하는 자도 많았습니다.

지금 바울은 두 가지를 동시에 보고 있습니다. 복음이 확산될 ‘광대한 문’과, 그것을 막는 ‘많은 대적’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름답게 세워질 때는 반드시 그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가 중요합니다. 대적에 초점을 맞추면 멈출 수밖에 없지만, 열린 문에 초점을 맞추면 그 대적을 이기고 나아가게 됩니다. 바울은 대적이 아니라 복음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도 늘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문제와 어려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상황이 반드시 있습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추면 더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를 통해 이루실 그분의 놀라운 계획에 초점을 맞출 때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습니다.

10-12절에서 바울은 두 동역자를 언급합니다. 먼저 디모데입니다. 바울은 앞서 4:17절에서 자신의 가르침을 일깨우도록 디모데를 보낸다고 했는데, 여기서 그를 보내며 마음에 걱정이 많아 보입니다. 10-11절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그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 누구든지 그를 멸시하지 말라”

디모데는 젊은 사역자였습니다. 교만과 자랑이 밑바닥에 깔려 자기 기준으로 지도자를 평가하고 줄 세우던 고린도 성도들이라면, 젊은 디모데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교만이 아볼로파, 바울파, 베드로파 같은 분쟁을 낳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존중하고 그의 말에 귀 기울이라고 당부합니다.

12절은 아볼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아볼로에게 고린도로 가라고 여러 번 권했습니다. 그런데 아볼로는 지금은 갈 뜻이 전혀 없다고 합니다. 교회가 파당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자신이 가면 오히려 갈등을 키울 수 있다고 여겨,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역자들의 성숙한 분별이 엿보이는 대목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헌금이 받은 은혜의 가시적 표현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구제 헌금을 ‘은혜’라 불렀습니다. 우리의 헌금이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그 은혜가 물질로 흘러나오는 것인지 점검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다른 하나는 대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늘 하나님의 뜻과 그것을 방해하는 문제가 함께 있습니다. 방해하는 사람이나 걸림돌이 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기도하고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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