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3절)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왜 이 소명 이야기가 1장이 아니라 6장에 놓여 있는지 궁금합니다. 1-5장까지 하나님은 유다의 죄악을 드러내셨습니다. 자식처럼 기르셨는데 짐승만도 못하다 하셨고, 정의와 공의 대신 포학과 부르짖음이 가득하다 하셨으며, 여섯 번이나 화 있을진저를 선언하셨습니다. 그 뒤에 6장이 이어져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하지 못한 백성이 대조됩니다. 그리고 그 대조 속에서 선지자가 부름을 받습니다.
1절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은 처음에는 신실했으나, 나라가 강성해지자 교만해졌습니다. 제사장만 할 수 있는 분향을 자기 마음대로 하려다 나병에 걸렸고, 부정한 자로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생을 마쳤습니다. 52년을 통치한 웃시야 왕의 죽음은 백성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때 이사야가 본 것은 이 땅의 왕은 죽었지만,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여전히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참 왕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사야는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은 늘 변합니다. 영원할 것 같던 왕들도 때가 되면 다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영원히 보좌에서 통치하십니다. 그 하나님의 옷자락 한 자락만으로도 성전이 가득 찼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크신지를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2절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스랍은 ‘불타는 자’라는 뜻을 지닌 천상의 존재입니다. 여섯 날개 중 둘로만 날고, 넷은 자기 얼굴과 발을 가리는 데 씁니다. 왜 그럴까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감히 드러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상의 존재조차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는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릴 수밖에 없습니다.
스랍들이 찬양합니다. 3절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거룩하다는 말이 세 번 반복됩니다. 히브리어에서 같은 말을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최상급을 나타내는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단순히 ‘매우 거룩하다’가 아니라, 비교할 수 없고 견줄 데 없이 거룩하시다는 뜻입니다. 구약 전체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이렇게 세 번 반복해 강조한 곳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고 성전에 연기가 충만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 땅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셔서, 하나님이 임하시는 곳마다 진동합니다.
우리는 5장에서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비웃음을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어디 한번 일해 보시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6장은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 계셔서 높은 보좌에 앉으셨고,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합니다. 그런 하나님 향한 백성들의 조롱은 큰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시대도 여전히 진정한 왕으로 통치하시며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광돌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선 이사야의 첫마디는 5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좋기만 할 것 같은데, 실제로 그 앞에 서니 “내가 죽게 되었구나”하는 고백이 나옵니다. 5장에서 하나님이 여섯 번 ‘화 있을진저’ 하고 선언하셨는데, 이제 이사야가 자기 자신을 향해 ‘화로다’라고 부르짖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가 자신을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입술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백성들과 비교할 수 없이 신실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보니, 하나님의 일을 하던 그 입술조차 부정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만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죽게 되었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기 죄와 부정함을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하십니다. 스랍을 통해 제단의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을 정결케 해주십니다. 7절 하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숯이 ‘제단’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제단은 희생 제물을 잡아 바치고 그 피가 뿌려지는 곳, 곧 희생을 통해 죄가 사해지는 곳입니다. 그 제단의 숯불이 이사야의 입술에 닿자 그의 죄가 사해졌습니다. 곧 이사야의 정결함은 자기 노력이 아니라 제단의 희생에서 온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부정함이 정결하게 된 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희생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그 자리에서 이사야는 한 음성을 듣습니다. 8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하나님이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죄악으로 멸망을 향해 가고 있는 백성들에게 회복을 위한 말씀을 전할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선지서에 나오는 무서운 심판의 메시지 이면에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뜨거운 마음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8절 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이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그 말을 듣지 않을 것이고, 도리어 핍박할 것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이어지는 9-10절에서 하나님은 미리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사야는 자신을 드립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모습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누가 갈꼬, 누가 할꼬”라며 찾으실 때, “제가 여기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제가 그 일을 감당하겠습니다”하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은혜받은 자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대답입니다.
이사야가 묻습니다. 11절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언제까지 이 말씀을 전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대답은 성읍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고 가옥에 사람이 없으며 토지가 황폐하게 될 때까지라고 하십니다. 12절,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신다는 것은 포로로 끌려가 나라가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그때까지도 이 백성이 돌이키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3절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여기 ‘그루터기’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나무를 베어 밑동만 남으면 다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루터기가 남아 있다면 뿌리가 살아 있고, 거기서 새싹이 돋아납니다. 하나님이 심판으로 나무를 베셨지만 그루터기를 남기셨다는 것, 여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그루터기가 ‘거룩한 씨’라 불린다는 점입니다. 이사야에서 ‘씨’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실제로 이 그루터기 이미지는 11장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로 이어집니다. 잘린 그루터기에서 돋아나는 그 새싹이 메시아이십니다. 곧 이스라엘의 회복은 남은 자들의 힘이 아니라, 거룩한 씨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무섭게 심판하시지만, 그 심판의 메시지 끝에는 회복의 약속이 놓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행하시는 목적이 멸망이 아니라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견줄 데 없이 거룩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많은 일을 하는 것보다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거룩함은 우리 노력이 아니라 제단의 숯불, 곧 그리스도의 희생에서 옵니다.
다른 하나는 부르심 앞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이사야가 들은 것은 “누가 갈꼬” 하는 음성이었습니다. 은혜를 입은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렇게 물으십니다. 그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고백하며, 힘들고 어려워도 그 사명을 감당하는 삶이 되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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