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3절)
24장부터 이어지는 이사야 묵시록은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승리와 성도의 승리를 노래합니다. 어제 25장이 사망을 멸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했다면, 오늘 26장은 그 구원을 경험한 백성이 유다 땅에서 부를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는 완성될 승리만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아직 고통이 남은 이 땅의 현실과, 그 너머의 부활 소망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1절 “그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시리로다” 여기 ‘견고한 성읍’이 나옵니다. 어제 25:2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쌓은 견고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셨습니다. 오늘 26:5절에서도 하나님은 “높은 데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신다”고 하십니다.
사람이 쌓은 성은 아무리 높고 견고해도 다 무너지는데, 성도에게는 무너지지 않는 다른 성이 있습니다. 그 성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친히 “구원을 성벽과 외벽으로 삼으신” 성입니다. 눈에 보이는 요새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그 자체가 성벽이 되니, 누구도 흔들거나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사람이 쌓은 성과 하나님이 세우신 구원의 성이 대조됩니다.
이 견고한 성 안에서 누리는 것이 3-4절의 평강입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여기 ‘심지가 견고한 자’는 원문으로 그 마음(생각)이 하나님께 굳게 붙들려 기대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다른 데로 흩어지지 않고 하나님께 고정된 마음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이 ‘평강, 평강’이라 거듭 이르시는 완전한 평강을 주십니다. 그 근거가 4절입니다.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여기 ‘영원한 반석’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평강의 유일한 기초가 이 변치 않는 반석입니다.
7절부터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의인의 길과, 은총을 받고도 돌이키지 않는 악인의 길이 대조됩니다. 7절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의인의 길은 정직이고, 그 길을 하나님이 평탄케 하십니다. 의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8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심판하시는 길에서 우리가 주를 기다렸사오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 영혼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의인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가장 절박하고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그때,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반드시 역사하심을 신뢰하며 인내하는 사람입니다. 9절은 그 사모함이 밤에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고” 깊은 어둠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간절히 구하는 것입니다.
반면 악인은 10절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 악인이 은총을 못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는데도 의를 배우지 않습니다.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않고, 그 은혜를 기억하지 않으며, 도리어 정직한 자의 땅에서 불의를 행합니다. 곧 악인의 멸망은 하나님이 은혜를 안 주셔서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스스로 그 길을 택한 결과입니다. 10절 끝의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그 통치를 인정하지 않고 제멋대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11절, 하나님의 심판의 손이 높이 들려도 그들은 보지 못한 채 멸망의 길을 갑니다.
반면 13절은 하나님 백성의 신실함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여 주 외에 다른 주들이 우리를 관할하였사오나 우리는 주만 의지하고 주의 이름을 부르리이다” 이스라엘은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다른 나라가 다스린다는 것은 그 나라의 우상을 강요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백성은 그 이방의 신들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의 이름만 불렀다는 것입니다. 14절은 그 지배하던 자들, 곧 죽은 자들이 다시 살지 못하리라 하는데, 이는 뒤에 나올 하나님 백성의 부활과 정면으로 대조됩니다. 압제자들은 죽어 일어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죽어도 다시 삽니다.
●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19절)
16절부터는 이 땅의 냉정한 현실이 펼쳐집니다. 묵시는 하늘의 승리와 땅의 현실을 번갈아 보여 주는데, 1-15절이 하나님이 주실 궁극의 승리라면, 16절부터는 아직 그 승리에 이르지 못한 성도의 고통스러운 현실입니다.
16-17절, 환난 중에 백성이 하나님을 찾아, 마치 해산이 임박한 여인이 산고 중에 부르짖듯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부르짖으면 좋은 응답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18절이 뜻밖입니다. “우리가 잉태하고 산고를 당하였을지라도 바람을 낳은 것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그 극심한 산고 끝에 낳은 것이 아기가 아니라 바람이었습니다. 온 힘을 다해 부르짖고 애썼는데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헛된 수고로 끝난 것 같은 절망입니다. 성도가 이 땅에서 겪는 현실이 종종 이렇습니다. 기도하고 몸부림쳐도 현실은 그대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19절에서 완전한 반전이 일어납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바람만 낳은 것 같던 그 헛됨의 자리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이 선언됩니다. 이것은 구약에서 가장 분명한 부활의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통 속에 죽어 간 성도들을, 하나님이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일으키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라는 표현이 아름답습니다. 이슬이 마른 땅을 적셔 생명을 살리듯, 하나님의 생명의 이슬이 티끌에 누운 자들을 살려 낸다는 것입니다.
이 부활 선언은 어제 25장에서 이어집니다. 25:7-8절에서 하나님은 온 세상을 덮은 죽음의 수의를 벗기시고 “사망을 영원히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26:19절에서는 그 사망을 멸하시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다고 하십니다. 죽음을 없애실 뿐 아니라, 죽음에 삼켜진 자들을 도로 살려 내시는 것입니다.
이 약속이 신약에서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사망은 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 죄의 문제를 담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죄가 해결되었다는 것은 곧 죽음이 해결되었습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첫 열매로 이루어진 확실한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의 결론은 27:1절입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그의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리워야단은 고대에 혼돈과 악을 상징하는 바다 괴물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 곧 사탄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의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용이 이 이미지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그 악의 세력을 견고한 칼로 완전히 죽이시고, 성도에게 최종 승리를 주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심지를 하나님께 고정하여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이 하나님께 굳게 붙들린 자를 완전한 평강으로 지키십니다. 우리 삶에 평강이 없다면, 내 시선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흩어져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원한 반석 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께 마음을 고정하는 것이 평강의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부활의 소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 땅의 수고가 바람을 낳은 것처럼 헛되어 보일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분입니다. 사망을 멸하실 뿐 아니라 죽음에 삼켜진 자를 도로 일으키시며, 그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이미 확증되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삶의 모습은 같아도, 성도는 죽음이 가둘 수 없는 부활의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 소망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믿음의 길을 걸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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