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니엘이 그것을 점령하였으므로”(13절)
어제에 이어 유다 지파의 정복이 계속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이 가나안 땅 앞에서 보이는 태도가 대조를 이룹니다. 담대히 도전하여 땅을 차지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에도 주저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사기가 시작되는 이 첫 장에서,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오늘 본문이 보여 줍니다.
먼저 등장하는 사람은 갈렙입니다. 그는 옛날 열두 정탐꾼 가운데, “그 땅은 우리의 밥이라 하나님이 주셨으니 올라가자”고 외친 두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세상을 떠났고, 그 믿음의 세대에서 갈렙만 노년으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이라 부릅니다(수14:6절). 그나스는 본래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이방 계열입니다. 곧 갈렙은 이방인 출신이면서도, 어느 이스라엘 사람보다 하나님을 굳게 신뢰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혈통이나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성공과 실패를 나누는 것이 이것입니다.
갈렙이 12절 “기럇 세벨을 쳐서 점령하는 자에게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옷니엘이 나서서 그곳을 점령합니다. 이 옷니엘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사기에 등장하는 첫 번째 사사가 바로 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점령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보면 유다도 철병거 앞에서 물러서고 베냐민도 쫓아내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런 땅을 옷니엘은 믿음으로 취한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날 것 같은데, 14절을 보면 뜻밖에 갈렙의 딸 악사에게로 이어집니다. 성경이 여인의 이름을 이렇게 분명히 기록하는 일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만큼 악사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는 출가하며 남편 옷니엘에게 아버지께 밭을 구하자고 청하고, 나귀에서 내려 아버지에게 직접 나아가 담대히 구합니다. 15절 “아버지께서 나를 남방으로 보내시오니 샘물도 내게 주소서” 남방은 메마른 사막 지역이라, 땅이 있어도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악사는 그것을 알고 윗샘과 아랫샘을 구했고, 갈렙은 그대로 내어 줍니다. 악사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땅과 물을 구한 것은 성품이 억척스러워서가 아니라, 이 땅이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마땅히 차지해야 한다는 신뢰가, 주저앉지 않고 나아가게 한 것입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에 이어 16절은 또 한 이방인을 소개합니다. 모세의 장인은 ‘겐 사람’, 곧 이방인이었는데, 그 자손이 유다 자손과 함께 광야로 올라가 그 백성 가운데 거주합니다. 갈렙도, 겐 사람도 이방 출신입니다. 성경이 거듭 이방인을 세우는 것은,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가 아니라 누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느냐가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길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 “철 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19절)
17절은 유다와 시므온이 함께 스밧의 가나안 족속을 친 이야기인데, 여기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그곳을 진멸하였으므로 그 성읍의 이름을 호르마라 하니라” ‘진멸’은 히브리어로 ‘헤렘’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을 죽인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구별하여 없앤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성읍에 붙은 이름 ‘호르마’가, 바로 이 ‘헤렘’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입니다. 곧 ‘진멸된 곳’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 성읍이 헤렘으로 하나님께 바쳐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내용을 그대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나안을 진멸하라 명하신 것은 잔인함 때문이 아닙니다. 가나안의 죄악이 너무 관영하여, 그들과 공존하면 이스라엘이 반드시 그 삶에 물들어 함께 멸망하기 때문입니다. 죄는 타협하거나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제거해야 하는 것임을, 하나님은 이 진멸 명령으로 보이신 것입니다. 유다와 시므온이 스밧을 헤렘으로 바쳐 ‘호르마’라 이름한 것은, 그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자리였습니다.
문제는 그 순종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유다는 계속 나아가 여러 성읍을 점령하는데, 19절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으므로 그가 산지 주민을 쫓아내었으나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그들을 쫓아내지 못하였으며” 이 한 절 안에 안타까운 대조가 있습니다. 앞부분은 “여호와께서 유다와 함께 계셨다”이고, 뒷부분은 “철병거가 있으므로 쫓아내지 못하였다”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데도, 철병거라는 무기 앞에서 물러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내가 그 땅을 넘겨주었다” 하셨고 산지 주민을 실제로 쫓아내게 하셨다면, 그 하나님이 철병거를 이기게 못 하실 분이겠습니까. 유다가 물러선 것은 무기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한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21절의 베냐민은 더합니다.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철병거 같은 이유조차 없습니다. 쫓아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쫓아내지 않은 것이고 의도적으로 함께 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정면 도전입니다. 이미 많은 땅을 차지했으니 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여부스 족속이 오늘까지 그들과 함께 예루살렘에 거주하게 됩니다. 결국 이것이 장차 심각한 문제로 이어집니다. 이처럼 한 사람, 한 나라의 무너짐은 작은 부분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은 이 두 실패의 사이에, 갈렙의 이야기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20절, 갈렙이 헤브론에서 아낙의 세 아들을 쫓아냈다는 것입니다. 이 아낙 자손은 어제 본 그 거인 족속, 곧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두려워하게 만든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어쩌면 철병거보다 더 두려운 그 거인들을 갈렙이 물리쳤습니다. 이런 대조가 의미하는 것은, 유다가 “철병거 때문에” 물러섰다지만, 정작 철병거보다 무서운 거인을 믿음의 사람 갈렙은 이겼다는 것입니다. 곧 문제는 철병거가 아니라, 그 앞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믿음이었음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도전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갈렙과 옷니엘과 악사는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믿음으로 주저앉지 않고 나아가 그 땅과 샘을 차지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것은 “어떻게 되겠지” 하며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약속을 붙들고 현실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앞서 달리는 것도, 하나님이 다 해주시겠지 하며 뒤에 머무는 것도 아닌,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내가 해야 할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작은 타협을 남겨 두지 않는 것입니다. 유다와 베냐민이 쫓아내지 못한 것은 전체로 보면 일부에 불과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남겨 둔 조금이 훗날 이스라엘을 가나안 문화에 물들게 하고 혼란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조금 불순종한 것은 결국 불순종입니다. 우리를 흔드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라 작은 타협과 합리화일 때가 많습니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여, 철병거 같은 핑계 앞에 주저앉지 않고 온전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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