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1:22-36절 / 쫓아내지 못하매(26.09.03)

2026.09.3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 “그리하면 우리가 네게 선대하리라“(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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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까지는 남쪽 지파인 유다, 시므온, 베냐민의 정복 이야기였습니다. 오늘은 북쪽 지파들의 이야기입니다. 안타깝게도 ‘쫓아내지 못하였다’와 ‘함께 거주하였다’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마찬가지로 정복에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황은 더 심각해집니다.

북쪽 지파의 중심은 요셉 가문,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입니다. 이들이 벧엘을 치러 올라가는데, 22절에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전제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시니라” 남쪽 유다에게 하셨던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미 약속으로 주신 땅이니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요셉지파는 정복을 위해 정탐을 보냅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치기 전 정탐꾼을 보냈던 것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두 이야기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여리고에서 정탐꾼을 만난 가나안 사람은 기생 라합이었습니다. 라합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수2:9절) 이방 여인이 하나님을 알아보고, 그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먼저 언약맺기를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라합은 이스라엘의 일원이 되었으며, 훗날 메시아의 족보에까지 이름을 올립니다.

하지만 오늘 벧엘의 정탐은 정반대입니다. 요셉 가문의 정탐꾼들은 성읍에서 나오는 한 사람에게 24절 “이 성읍의 입구를 우리에게 보이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선대하리라”고 제안합니다. 그 사람은 아무런 신앙 고백 없이, 그저 목숨을 부지하려고 자기 성읍의 입구를 팔아넘깁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과 언약을 맺지 말고 진멸하라 하셨는데, 요셉 가문은 먼저 한 사람과 거래를 맺어 그를 살려 주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라합의 경우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돌아왔기에 살아남았지만, 이 사람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하고 편의를 선택했기에 살아남았습니다. 같은 정탐 장면이 한쪽에서는 믿음의 이야기가 되고, 다른 쪽에서는 타협의 이야기가 됩니다.

요셉 가문이 이런 방식으로 성읍을 공격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어떤 방법으로든 이기게 하셨을 텐데, 바른 길은 시간이 걸리고 힘이 드니 빠른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입구를 알려 주자 성읍을 함락하고, 약속대로 그와 가족은 살려 보냅니다. 사람과 맺은 약속은 지켰으나, 그 약속을 지키려고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린 것입니다.

이런 선택의 결과가 무엇일까요? 26절, 그가 헷 사람의 땅으로 옮겨 가 성읍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루스’라 했습니다. 루스는 이스라엘이 진멸한 벧엘의 옛 이름입니다. 없앤 줄 알았던 가나안 성읍이, 이 사람에 의해서 다른 땅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 없애야 할 것을 온전히 바치지 않으면, 그 남겨진 것이 반드시 되살아나 다시 세력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한 사람쯤이야’ 했던 작은 타협이 이런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3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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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절부터 므낫세를 시작으로 북쪽 지파들의 목록이 이어지는데, 그 문장의 결론은 한결같습니다. 므낫세가 벧스안과 다아낙과 돌과 이블르암과 므깃도의 주민을 열거하는데, 마땅히 ‘쫓아냈다’로 끝나야 할 문장이 “쫓아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족속이 결심하고 그 땅에 거주하였더니”로 끝납니다. 이 결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28절, 29절 에브라임, 30절 스불론, 31절 아셀, 33절 납달리가 모두 ‘쫓아내지 못하였다’와 ‘함께 거주하였다’로 이어집니다. 가나안과의 공존이 예외가 아니라 북쪽 전체의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반복 속에서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을 본문을 강조합니다. 처음엔 이스라엘이 주도권을 쥔 모습입니다. 28절은 이스라엘이 강성한 뒤에는 가나안 족속에게 노역을 시켰다고 합니다. ‘강성한 뒤’라는 말은 이제 쫓아낼 힘이 있었다는 뜻인데,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쫓아내기는 힘드니 종으로 부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순종보다 편리를 택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주객이 바뀝니다. 31-32절의 아셀은 “그 땅의 주민 가나안 족속 가운데 거주하였으니”라고 표현됩니다. 앞서 ‘가나안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했다’던 순서가 바뀌어, 이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 가운데 더부살이하는’ 모양이 된 것입니다. 33절 납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34절에서 그 역전이 절정에 이릅니다. “아모리 족속이 단 자손을 산지로 몰아넣고 골짜기에 내려오기를 용납하지 아니하였으며.” 단 지파는 가나안을 쫓아내기는커녕, 도리어 가나안에게 산지로 쫓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차지하지 못한 이 단 지파는, 뒷날 사사기 18장에서 자기 기업을 아예 버리고 북쪽으로 옮겨 가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됩니다. 오늘 34절은 그 비극의 시작입니다.

이 하강의 흐름이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시작은 ‘한 사람쯤’이라는 작은 타협, ‘철병거 때문에’라는 작은 실패였는데, 그것들이 쌓여 ‘함께 거주함’이 되고, 마침내 ‘가나안이 이스라엘을 쫓아냄’에까지 이릅니다. 진멸하지 못하고 남겨 둔 것이 되살아나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을 몰아내는 자리에 이른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지배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작은 타협과 작은 불순종에서 시작하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죄의 지배를 받게 되고,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편의를 앞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요셉 가문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두고도 빠른 길을 택해, 사람과의 거래를 위해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우리도 바른 길이 더디고 힘들 때 빠른 길의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외면한 빠른 길이 아닌 말씀 안에서 바른 길을 걸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작은 타협을 조심해야 합니다. 진멸하지 못하고 남긴 한 사람, 쫓아내지 못한 소수는 처음엔 사소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남겨진 것은 되살아나고, 함께 거주하던 것이 마침내 주인을 몰아냅니다. 죄는 대개 단번에 우리를 휘어잡기보다 조금씩 스며들어 자리를 넓히다, 어느새 하나님까지 밀어냅니다. 사사기의 혼란이 바로 거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작은 한 부분부터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순종하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지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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