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15절)
사사기에는 열두 사사가 등장하는데, 오늘은 둘째 에훗과 셋째 삼갈 이야기입니다. 에훗의 이야기는 길게, 삼갈은 단 한 절로 나옵니다.
12절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니라.” 여기 ‘또’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선을 행했다는 ‘또’가 아니라, 악을 행했다는 ‘또’입니다. 죄가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악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한 악이라고, 12절이 두 번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모르게 무언가를 한다고 여기지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 결과 12절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강성하게 하셔야 할 대상은 이스라엘인데 도리어 그 대적을 강성하게 하십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악을 행한 것은 본래 더 풍요롭고 강성해지려는 욕망 때문이었는데, 하나님은 그들보다 대적을 더 강하게 하셔서 도리어 그 대적에게 눌리게 하십니다. 삶의 초점을 세상의 풍요와 강성에 맞추면, 하나님이 다른 이를 더 강하게 하셔서 우리를 짓누르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강성해진 에글론은 암몬과 아말렉을 규합해 이스라엘을 치고 ‘종려나무 성읍’을 점령합니다(13절). 종려나무 성읍은 여리고입니다. 여리고가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 처음으로 무너뜨린 성입니다. 그 여리고를 도리어 대적에게 빼앗겼다는 것은, 큰 위기에 직면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은 모압을 십팔 년간 섬깁니다(14절).
이스라엘이 섬긴 모압왕의 이름이 에글론인데 히브리어로 ‘송아지’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17절은 그를 “심히 비둔한 자”라 소개합니다. 곧 살진 송아지 같은 왕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는 제단에 바쳐질 희생제물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이 참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않자, 살진 송아지 같은 자에게 십팔 년간 지배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면 자유로워질 것 같지만, 실은 이런 자에게 휘둘리게 된다는 것을 이렇게 보여줍니다.
십팔 년의 고통을 당하자 이스라엘은 부르짖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구원자를 세우십니다(15절). 여기서 사사기의 순환이 다시 이루어집니다. 불순종 → 압제 → 부르짖음 → 구원자. 다만 이 부르짖음이 참된 회개였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고, 그저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응답하셨다고만 합니다. 이스라엘이 언약을 저버려도 부르짖으면 다시 구원자를 세워주십니다.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세우신 구원자는 에훗인데, 15절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고 소개합니다. ‘베냐민’은 히브리어로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오른손의 아들 지파에서 난 에훗이 왼손잡이입니다. 원문은 이를 ‘오른손이 묶인 자’로 표현해, ‘오른손의 아들’과 ‘오른손을 못 쓰는 자’라는 대조를 이룹니다. 왼손잡이를 오른손에 장애가 있는 사람으로도 보지만, 오른손보다 왼손을 잘 사용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에훗은 왼손잡이였기에 오른쪽 허벅지에 칼을 숨길 수 있었고, 아무도 그쪽을 경계하지 않았습니다(16절).
● “칼을 빼어 왕의 몸을 찌르매”(21절)
에훗은 공물을 바친 뒤 일행을 돌려보내고, 홀로 왕에게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가 돌이킨 지점을 19절 “길갈 근처 돌 뜨는 곳에서부터 돌아와서” 이 ‘돌 뜨는 곳’은 원어로 ‘새긴 형상’, 곧 우상을 가리키는 말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이 26절 에훗의 도주 장면에서 다시 나와, 암살 이야기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의미가 있다는 것이지요.
주목할 것은 이 우상의 자리가 ‘길갈 근처’라는 점입니다. 길갈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켜 하나님과 언약을 새롭게 한, 잊을 수 없는 은혜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언약의 자리 곁에 이제 우상이 서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 줍니다. 하나님과 언약 맺던 자리 옆에 우상을 세운 것, 그 우상숭배의 결과가 바로 십팔 년의 압제였습니다. 에훗이 그 우상의 자리를 지나며 돌이켜 구원을 향해 나아간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에훗은 “은밀한 일”, “하나님의 명령”을 아뢴다며 왕과 단둘이 마주합니다(19-20절). 이방 왕은 신의 계시라면 귀를 기울였기에, 신하를 다 물리고 에훗을 맞습니다. 왕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에훗은 왼손으로 오른쪽 허벅지의 칼을 빼어 그 몸을 찌릅니다(21절). 22절은 칼자루까지 들어가고 기름이 엉겼다고 사실적으로 그리는데, 이는 에훗이 이 위험한 일을 얼마나 단호하고 확실하게 해냈는지를 보여 줍니다. 실패하면 자기 목숨이 달아나는 일을,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담대히 감행한 것입니다. 신하들이 왕이 ‘발을 가리운다'(용변을 본다)고 여겨 지체하는 사이, 에훗은 빠져나가 도망합니다(24-26절). 그러고는 에브라임에서 백성을 모아 요단 나루를 막고 모압 사람 만 명을 쳐서, 마침내 모압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27-29절). 그 땅이 팔십 년 동안 평온을 누립니다(30절).
31절은 이야기가 삼갈에게로 넘어가는데, 단 한 절입니다. 이 짧은 한 절에 두 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아낫의 아들 삼갈’이라고 하는데 ‘아낫’은 이방 신의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삼갈이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이방인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인조차 들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그가 쓴 무기가 ‘소 모는 막대기’입니다. 칼이 아니라 소를 몰던 농기구 하나로 블레셋 사람 육백 명을 쳤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군사적으로 얼마나 뒤처져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그 초라한 막대기로도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한 절짜리 이 이야기가,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 어떤 도구로든,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든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는 삶의 초점을 강성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풍요와 강성을 좇아 악을 행했는데, 하나님은 도리어 대적을 강성케 하셔서 그들을 눌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풍요에 삶의 방향을 맞추면 도리어 그것에 짓눌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참 왕으로 섬기며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을 안정과 평안으로 책임지십니다.
다른 하나는 어떤 사람도 어떤 도구도 쓰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왼손잡이 에훗을 사용하시고, 이방인 삼갈의 소 모는 막대기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내게는 아무것도 없다”고 낙심할 때에도, 하나님은 어떤 형편의 사람이든 어떤 방법으로든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이 행하실 일을 기대하는 하루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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