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6:25-40절 /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26.09.14)

2026.09.14 | 매일성경 | 코멘트 0개

●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2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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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절은 “그 날 밤에”로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또한 바위에서 불을 내어 표적을 보인 그날 밤입니다. 이때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처음으로 명령을 내리십니다. 그런데 그 명령이 전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미디안을 치기 전에 자기 집 마당부터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이 한 절이 기드온의 형편을 알려 줍니다.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 상이 아버지의 집에 있었습니다. 성읍 사람들이 그것을 함께 섬기고 있었으니, 기드온의 집이 그 지역 우상 숭배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집의 아들에게 그 제단을 헐라고 하십니다.

제물도 지정하십니다.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칠 년은 이스라엘이 미디안의 손에 고통당한 햇수와 같습니다. 미디안이 쳐들어온 그해에 난 수소입니다. 그 칠 년의 고난이 이제 끝난다는 뜻을 담은 제물입니다. 둘째라는 말은 순서보다 뛰어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26절에서 하나님은 헐어 낸 그 자리 곧 산성 꼭대기에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제단을 쌓고, 찍어 낸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우상을 부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상이 서 있던 자리에 하나님의 제단을 세우고, 그 우상의 나무가 번제의 땔감이 됩니다. 우상의 자리를 헐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를 세워야 합니다.

27절에서 기드온은 종 열 사람을 데리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행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뒤에 성읍 사람들이 그를 죽이라고 나서는 것을 보면(30절),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27절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아버지의 가문과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낮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했습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담겨있습니다. 마땅히 부끄러워하고 숨어야 할 사람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이 두려워서 밤에 행동합니다. 뒤바뀐 것입니다. 이것이 그 시대 이스라엘의 영적 형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떳떳하지 못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28절을 보면 성읍 사람들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 제단이 헐린 것을 발견합니다. 그들이 그것을 아침에 곧바로 알았다는 것은 그만큼 자주 그곳에 드나들었다는 뜻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에 그들의 열심이 그 정도였습니다. 놀란 마을 주민들은 범인을 캐어물어 기드온을 찾아내고, 30절에서 요아스에게 아들을 끌어내라고 합니다. 그런데 31절에서 뜻밖의 대답이 나옵니다. 그동안 우상 제단으로 이득을 보았을 요아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다투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원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다투는 자는 아침까지 죽임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진대 그의 제단을 파괴하였은즉 그가 자신을 위해 다툴 것이니라 하니라” 한마디로 바알이 신이니 스스로 해결하도록 놓아두라는 겁니다. 아들을 살리려고 꺼낸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우상인 바알의 실체를 그대로 드러냅니다. 스스로를 지키지 못합니다. 밤새 제단이 헐리는 동안 바알은 자기 제단 하나 지키지 못했습니다. 바알은 끝내 아무 일도 하지 못했고, 기드온은 살았습니다. 그래서 32절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여룹바알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바알과 싸우는 자라는 뜻입니다.

●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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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절에서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을 건너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칩니다. 앞에서 이들은 메뚜기 떼처럼 몰려와 땅의 소산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다시 왔습니다.

34절에서 마침내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라고 합니다. 여기 임하셨다는 말은 옷을 입힌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영이 기드온을 옷처럼 감싸셨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에서 이 영은 사사에게 전쟁을 감당할 능력을 주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러자 기드온이 나팔을 붑니다. 아비에셀이 따르는데, 아비에셀은 기드온 자신의 집안입니다. 우상의 제단이 있던 그 집안이 이제 전쟁의 선봉에 섭니다. 35절에서 므낫세 온 지파와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가 올라와 그를 영접합니다. 하나님이 다 갖추어 주셨습니다. 말씀도 주셨고, 표적도 보이셨고, 영도 입히셨고, 군사도 모아 주셨습니다.

그런데 36절에서 기드온이 멈칫합니다.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이 부분을 자세히 보아야 합니다. 기드온 스스로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37절에서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합니다. 하나님이 이미 말씀하셨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두 번이나 인정하면서, 그 말씀을 확인할 표적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이슬이 양털에만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그대로 하십니다. 이튿날 아침 양털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39절에서 기드온이 또 구합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지나쳤는지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라고 먼저 말합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땅에는 이슬이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40절에서 하나님이 그 밤에 그대로 하십니다.

사사기가 이 장면을 칭찬으로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주셨는데도 표적이 있어야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말씀 위에 서 있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표적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보다 표적을 앞세우는 것은 그 말씀을 주신 분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표시입니다. 기드온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대 이스라엘의 형편이 그러했습니다. 기드온의 모습은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그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다는 의미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 요구를 두 번 다 들어주셨습니다. 의심하는 기드온에게 표적을 통해 확신을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봅니다. 연약하고 더딘 사람을 꾸짖고 외면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십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여러 번 확인하고 망설이며 여기까지 왔고, 그때마다 하나님이 참아 주시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하나님과 우상이 뒤바뀌지 않았는지 살펴야 합니다. 기드온의 시대에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사람이 밤에 몰래 움직여야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더 붙들고 사랑하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복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헐어 낼 것은 헐어 내고 오직 하나님만 예배하는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또한 표적보다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눈에 보이는 것을 먼저 구하면 우리 신앙은 계속 흔들립니다. 하루에 한 절이라도 묵상하고, 그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며, 함께 나누는 자리에 참여하는 것이 건강한 신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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