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3절)
어제 본문에서 삼손은 결혼 잔치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를 협박해 답을 알아냈고, 삼손은 아스글론에 내려가 블레셋 사람 30명을 죽여 그 옷을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심히 노하여 아내를 두고 아버지의 집으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그 사이에 장인은 삼손의 아내를 삼손의 친구였던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 일어난 일입니다.
1절에서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아내를 찾아갑니다. 아내를 두고 떠났던 일을 풀고 화해하려고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이미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어 있었습니다. 장인은 삼손을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2절에서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네 친구에게 주었으니 대신 그의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삼손이 말합니다. 3절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삼손의 분노가 장인이 아닌 블레셋을 향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아내를 협박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보복해도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 보면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먼저 낸 사람은 삼손이었습니다. 삼손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고 남의 탓만 합니다. 그러니 문제가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 약속된 나실인이었지만, 삼손은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삼손은 여우 300마리를 붙들어 꼬리와 꼬리를 매고 두 꼬리 사이에 홰를 하나씩 답니다. 홰는 횃불입니다. 5절에서 홰에 불을 붙여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넣습니다.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않은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가 다 탔습니다. 밀을 거두는 때였으니 한 해 농사가 다 사라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누가 이 일을 했느냐고 묻고,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 장인 때문에 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살랐습니다. 14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은 답을 알아내지 못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겠다고 아내를 협박했습니다. 아내는 그 일을 피하려고 삼손 앞에서 울며 답을 알아냈지만, 결국 그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보복이 보복을 부르고 있습니다.
7절에서 삼손은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고 하고,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입니다. 많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죽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 머뭅니다. 지금 삼손은 개인의 분노와 복수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삼손이 치고 있는 대상은 블레셋입니다. 이상한 방식이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사사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한 사람의 분노지만, 그 밑에는 블레셋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이 흐르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삼손은 눈엣가시입니다.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유다지파를 이용합니다. 11절에서 유다 사람 3000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 삼손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이 잡으러 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입니다. 이스라엘이 싸워야 할 상대는 자기들을 다스리는 블레셋인데, 유다는 자기 편을 잡으러 나섰습니다. 누가 적인지도 모르게 된 이스라엘의 형편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삼손에게 말합니다. 11절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블레셋의 지배를 받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오래 지배를 받다 보니 유다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우리도 세상 속에서 죄의 영향 아래 살아갑니다. 그것이 오래되면 다들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여기며 익숙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오래 무엇인가에 매여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삼손은 동족인 유다 사람들에게 결박당합니다. 13절에서 그들은 결단코 죽이지 않겠다고 하고 새 밧줄 둘로 삼손을 결박해 바위 틈에서 끌어냅니다. 새 밧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는 튼튼한 줄이고, 그것도 두 겹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으로는 절대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18절)
삼손이 레히에 이르자 블레셋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마주 나옵니다. 그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떨어졌습니다. 15절에서 삼손은 나귀의 새 턱뼈를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입니다. 한 사람이 천 명을 죽이는 일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영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이렇게 말합니다. 16절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여호와의 영이 임해서 한 일인데 삼손은 내가 했다고 말합니다. 17절에서 턱뼈를 던지고 그곳을 ‘라맛레히’라 이름합니다. “턱뼈의 언덕”이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이룬 일을 기념하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18절에서 상황이 바뀝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 13장부터 이스라엘이 부르짖었다는 말이 없었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부르짖음이 나옵니다. 그리고 삼손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방금 전까지 내가 천 명을 죽였다고 하던 삼손이, 목이 마르고 나서야 이 구원을 베푸신 분이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턱뼈로 언덕을 쌓을 만큼 강한 사람도 목마름 하나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삼손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물이 솟아납니다. 삼손은 그 물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합니다. 그래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습니다. “부르짖는 자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17절의 라맛레히가 삼손이 자기 공을 기념한 이름이라면, 엔학고레는 부르짖는 자에게 응답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이름입니다. 20절은 삼손이 블레셋 사람의 때에 20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냈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사사로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내용이 아니라 별다른 변화없이 계속해서 블레셋의 압제를 당했습니다. 삼손이 사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유다는 지배받는 것에 익숙해져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몰랐고, 삼손은 힘이 있다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부르짖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우리의 현주소를 바로 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우리 삶의 문제와 어려움과 연약함을 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에게 샘을 터뜨려 주십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사가 이렇게 산다는 것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아래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을 이어 가고 계셨습니다. 우리 인생과 가정과 공동체가 너무 어둡고 혼란해서 끝났다고 여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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