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야고보는 1:26-27절에서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 말했습니다. 혀를 재갈 물리는 것,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2-4장은 이 세 가지를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2장은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말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이웃을 외면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심각하게 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결론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면 야고보의 목소리가 높아집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같은 격한 표현도 나옵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분노가 아니라, 믿는다는 성도들이 어떻게 이렇게 살 수 있느냐는 거룩한 안타까움입니다. 그만큼 그 당시 성도들의 삶이 심각했다는 것을 전제하고 본문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그 시대 사람들을 향한 꾸중으로만 듣지 말고, 내 믿음을 점검하는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14절에서 야고보는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라고 묻습니다. 그 당시 많은 성도들이 믿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고, 봉사도 하고 헌금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삶을 들여다보니 행함이 없었습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는 모습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있다는 말과 실제의 삶이 따로 였습니다.
야고보는 이런 신앙에 대해 14절 끝에서 충격적인 선언을 합니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러면 야고보가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가 문제 삼는 것은 입술과 머리에만 있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왕과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의 삶에는 반드시 변화가 나타납니다. 변화가 전혀 없는데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고 말한다면, 그 믿음은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행함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어낸 예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흩어진 성도들 가운데는 믿음 때문에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형편이 넉넉한 성도들이 곁에서 입으로만 걱정하고 도움의 손길은 내밀지 않았습니다.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행함과 믿음이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17,18,20,22,24,26절). 그리고 같은 결론이 17절과 26절에 두 번 나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26절은 이것을 몸에 빗대어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라고 말합니다. 형체는 있어도 생명이 떠난 몸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야고보는 좀 더 강하게 말합니다. 19절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은 귀신들도 압니다. 알고 두려워 떨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지는 않습니다. 아는 것으로 끝나는 믿음이라면 귀신들과 무엇이 다르냐는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을 자랑하는 성도들을 향한 야고보의 안타까움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20절에서 야고보는 그런 사람을 “허탄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허탄하다는 말은 원어로 속이 비었다는 뜻입니다. 겉으로는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안이 텅 비어 있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말하고 신앙의 모양도 갖추었지만, 그 안에 삶으로 드러나는 열매가 없는 사람입니다.
●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23절)
그리고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려 주겠다며 두 사람을 예로 듭니다. 21절의 아브라함과 25절의 기생 라합입니다. 두 사람은 겉으로 보면 극과 극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조상이고 믿음의 조상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 여인이었고 신분도 기생입니다. 이렇게 전혀 다른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든 이방 여인이든, 살아 있는 믿음은 똑같이 행함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23절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훨씬 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창15:6절).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 21절처럼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신 믿음이 순종, 행함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23절은 그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합니다.
22절은 이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1:4절에서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우리가 온전하게 된다고 했는데, 거기 사용된 ‘온전’이라는 단어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함께 일합니다. 24절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라고 한 것도, 믿음과 행함을 떼어 놓은 성도들을 향해 둘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3절 끝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나님의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을 삶으로 드러냈고, 하나님은 그를 벗이라 부르셨습니다. 믿음이 있다 하면서 삶으로 드러내지 않으면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믿음을 삶으로 실천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벗이라는 이름은 믿음을 삶으로 살아 낸 사람에게 주어진 놀라운 특권입니다.
25절은 라합의 이야기입니다.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을 숨겨주고 다른 길로 나가게 했습니다. 여리고 사람들 눈에 정탐들은 적이었고, 이 일이 드러나면 라합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습니다. 라합은 하나님에 대해 듣고 믿었고, 그 믿음이 마음에만 머물지 않고 목숨을 건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드리는 것으로, 라합은 자기 목숨을 거는 것으로 믿음을 드러냈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모두 목숨을 내놓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만큼 믿음은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남깁니다. 믿음을 작은 행함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이 편지는 오래전 성도들에게 쓴 것이지만, 야고보가 오늘 우리에게 편지를 써도 내용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입술에만 머무는 믿음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의 행함은 큰일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와 이웃을 배려하는 작은 행동 하나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오늘 내 곁의 이웃에게 그 믿음을 드러냅시다.
또한 하나님은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는 성도를 벗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성도를 찾으시고 귀히 여기시며 기뻐하십니다. 우리 늘봄교회 안에 하나님이 친구로 삼고 싶어 하시는 성도가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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